“네가 무엇을 먹는가를 말하라. 그러면 내가 너의 사람됨을 말하리라”라는 말이 있다. 이는 18세기 프랑스의 법률가 브리야 사바랭이 쓴 『'미각의 철학'』에 나오는 말이다. 또한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쌍소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저서에서 인간이 수동적으로 시간에 얽매지 않고, 시간에 쫓겨 다니지 않는 지혜와 능력을 느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벌써 2022년 한해도 저물어 간다. 그렇고 보면 세월이 참 빨리 간다. ‘빨리빨리’에 익숙한 생활 속에서 세모가 되면 우리의 삶을 한번쯤 찬찬이 되돌아보게 된다. 요즘 우리는 식품 홍수 속에 정작 제대로 된 먹을거리의 기근에 허덕이고 있다. 햄버거 피자 등 패스트푸드, 화학비료와 농약에 찌든 수입농산물, 식품첨가물로 범벅이 된 각종 가공식품의 홍수 속에 우리사회는 먹을거리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사회가 돼 버린 오래다. 이러한 패스트푸드로 통칭되는 ‘속도지향의 사회’ 대신에 ‘느리게 사는 삶’을 지향하는 '치따슬로(cittaslow)’, 즉 ‘슬로시티(Slow City)’ 운동이 유럽에서 전 세계로 소리 없이 번지고 있다.
유럽 슬로시티운동의 발상지인 이탈리아의 ‘그레베 인 키안티(Greve in Chiant Mayor Greve Paul Saturni, 약칭 그레베)’가 바로 그곳이다. 대형승용차·청량음료 자판기가 없는 도시, 첨가물 없는 전통식 식품생산, 패스트푸드가 없는 마을. 슬로시티 그레베의 속살이다. 그레베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피렌체에서 남쪽으로 31k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슬로시티운동은 인구 1만4000명인 작은 도시 그레베에서 2002년 여름 당시 파울로 사투르니니(Paolo Saturnini, 1945-2020) 시장이 마을사람들과 세계를 향해 ‘느리게 살자’고 호소한데서 비롯됐다. 파울로 전 시장은 패스트푸드에서 벗어나 지역요리의 맛과 향을 재발견하고 생산성 지상주의와 환경을 위협하는 바쁜 생활태도를 몰아내자고 강조하고 나섰다. 처음엔 주민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그는 ‘슬로’라는 것이 불편함이 아닌 자연에 대한 인간의 기다림이란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다. 파울로 전 시장은 지난 1990년부터 2003년까지 약 13년간 그레베의 시장으로 있었고, 그 뒤 투스카니 키안티 문화협회 회장을 맡기도 한 ‘문화시장’이었다.
슬로시티의 철학은 성장에서 성숙, 삶의 양에서 삶의 질로, 속도에서 깊이와 품위를 존중하는 것이다. 느림의 기술(slowware)은 느림(Slow), 작음(Small), 지속성(Sustainable)에 둔다. 사실 슬로시티운동, 즉 ‘느린 도시 만들기 운동’은 슬로푸드(Slow Food)운동의 연장선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슬로시티운동은 ‘먹을거리야말로 인간 삶의 총체적 부분’이라는 판단에서 지역사회의 정체성을 찾고 도시의 문화를 바꾸자는 운동으로 확대된 것이다. 이 슬로푸드운동에는 그레베는 물론 오르비에토, 브라, 포시타노 등 이탈리아의 4개 도시가 뜻을 모았고, 브라시의 언론인 출신인 카를로 페트리니 씨가 국제슬로푸드운동의 창시자로 큰 역할을 하였다.
슬로푸드운동은 맛의 표준화와 전 지구적인 미각의 동질화를 없애고 지역 특성에 맞는 다양한 식생활 문화를 추구하자는 국제운동이다. 지난 1986년 이탈리아 로마에 패스트푸드의 대명사인 맥도널드 햄버거가 진출해 전통음식을 위협하자 이탈리아 북부 피에트몬트 지방의 브라라는 곳에서 슬로푸드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 뒤 1989년 11월,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 각국 대표들이 모여 음식 관련 정보 교환, 즐거운 식생활의 권리 보호, 산업문명에 따른 식생활 양식 파괴에 대한 대처방안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슬로푸드 선언’을 채택함으로써 현재 전 세계로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슬로푸드의 심벌은 느림을 상징하는 달팽이이다. 슬로시티운동의 기본정책을 살펴보면 자전거 이용하기, 소음 제한, 보행자구역의 확대 등 전반적으로 시민생활의 속도를 늦추는 반면 여유 공간과 시간을 확대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슬로시티운동은 7가지 기본 규정을 통해 각 지역이 갖고 있는 정체성을 발굴하고 그 실천을 지향하고 있다.
첫째, 슬로시티운동은 지역과 도시의 특성을 유지·발전시키는 환경정책을 추진한다. 둘째, 땅의 가치를 극대화하고 단순한 점유의 의미를 최소화하는 정책을 유도한다. 셋째, 환경과 도시의 질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기술을 활용한다. 넷째, 자연친화적 기술로 얻어진 식품의 생산과 활용을 장려한다. 다섯째, 문화 전통과 접목된 토속생산품을 보호한다. 여섯째, 공동체와의 실질적인 연결을 통해 인적 교류와 접촉을 장려한다. 일곱째, 슬로시티에서의 삶에 대한 인식을 확대하고 청소년과 이들의 교육환경에 대해 관심을 쏟는다는 것이다.
슬로시티 그레베의 삶의 모습은 어떨까? 그레베시는 피렌체에서 자동차로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해발 500~700m의 산간도시인데 주산업은 포도 및 올리브 농사이다. 그레베에는 우선 대형 승용차나 패스트푸드점 그리고 코카콜라와 같은 청량음료 자판기를 보기 힘들다. 쇼핑몰의 입점이나 외지인의 부동산거래도 법으로 금지돼 있다고 한다. 마을 상점에는 늘 신선한 식품이 판매되고, 식당에는 슬로푸드만 판매하며 가정에서도 냉동식품을 기피하고 음식을 냉장고에 오래 보관하지 않는다. 그래서 냉장고 크기가 아주 작은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이곳의 전통산업인 올리브, 스파게티, 포도주공장 등은 모두 가내수공업인데 옛날 방식으로 올리브기름을 짜고 스파게티를 만들며 포도주를 발효시키기에 공해나 쓰레기발생이 적고 각종 첨가물도 없어 그야말로 슬로푸드가 생산되는 것이다. 이러한 식품들은 지역 내에서 소비되고 관광객에게 비싼 값으로 판매된다. 이곳에선 피자도 패스트푸드가 아닌 슬로푸드이다. 대량생산이 아닌 이탈리아식 전통요리법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독특한 사람들도 많다. 정육점을 40년 이상 운영하고 있는 시인, 1000년 넘어 대를 이어 올리브 밭을 가꾸는 농가, 토니블레어 전 영국수상이 이곳을 찾으면 꼭 들러 만난다는 식당주인 등등. 그레베는 전주민이 직업을 갖고 있어 고용률 100%를 자랑한다. 소득수준이 이탈리아의 중소도시 평균보다 훨씬 높고 생태관광도시로서 명성이 높아감에도 불구하고 범죄율이 전국에서 가장 낮은 신기한 마을이다.
슬로시티 그레베는 깨끗한 자연과 먹을거리, 전통 산업의 계승 그리고 그레베의 명인들이 있기에 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1999년 국제슬로시티운동이 출범된 이래 2022년 현재 33개국 290개 도시로 확산되었다. 우리나라도 완도·신안·담양·하동·예산·남양주·전주·상주·청송·영월·제천·태안·영양·김해·서천·목포 등 16개 도시가 슬로시티연맹에 가입되어 있다고 한다. 완도군 청산도는 옛 음식과 삶의 방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평가받아 지난 2007년 12월에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로 지정됐다. 한국슬로시티본부는 2005년 한국슬로시티추진위원회로 시작하여 2008년 4월부터 사단법인 한국슬로시티본부로 운영되고 있는 비영리 단체이다. 한국슬로시티본부는 ‘좋은 삶이 있는 슬로시티’를 내걸고 한국의 신규 슬로시티 후보도시의 추천, 기존 슬로시티 도시들의 재인증을 위한 품질 평가결과들의 취합, 한국 슬로시티들을 대표한 국제슬로시티연맹과의 협의 및 중재역할 수행 등을 맡고 있다고 한다.
슬로시티 운동은 전통과 자연을 보전하면서 유유자적하고 풍요로운 도시를 만들어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해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구가 5만 명 이하이고, 도시와 환경을 고려한 정책이 실시되고 있으며 전통문화와 음식을 보존하려 노력하는 등 일정 조건을 갖춰야 슬로시티로 가입할 수 있다. 실제로는 △에너지와 환경대책 △인프라 정책 △도시 삶의 질 정책 △농업, 관광 및 전통예술 보호 정책 △방문객 환대, 지역주민 마인드와 교육 △사회적 연대 △ 파트너십 등 7개의 대분류와 상세한 평가기준이 있다.
장희정 한국슬로시티본부 사무총장(신라대 호텔·의료관광학부 교수)은 “슬로라는 의미는 천천히, 제대로라는 뜻으로 ‘천천, 찬찬’을 이야기 한다. 도시가 갖고 있는 슬로자산들을 잊고 있었는데 느린 자산을 지켜나가자는 것이다. 지방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지방이 갖고 있는 느린 자산은 지방자산이 아닌 대한민국의 자산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들의 생각과 행동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슬로시티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경제 최우선’ ‘속도지향주의’의 삶의 방식에서 한발짝 벗어나 스스로 기쁜 삶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개념 중에 슬로비족과 다운시프트족이란 말이 있다. 마치 거북이나 달팽이처럼 천천히 한걸음씩 나아가는 생활태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슬로비족이나 다운시프트족이라고도 부른다.
슬로비(Slobbie: Slow But Better Working People)족은 ‘천천히 일하지만 더 일을 잘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로 물질보다는 마음을, 그리고 출세보다는 자녀를 중시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또 빡빡한 근무시간과 고소득보다는 비록 저소득일지라도 자신의 마음에 맞는 일을 느긋하게 즐기려는 사람들을 다운시프트(downshift)족이라고 부른다. 본래 다운시프트는 자동차의 기어를 저속으로 바꾸어 천천히 달리게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경제지상주의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회적 웰빙을 생각하는 그런 사회가 바로 슬로시티운동이 지향하는 사회 아닐까 싶다.
앞서 말한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에는 느리게 사는 법으로 7가지 방법이 소개돼 있다. 한가로이 거닐기, 남의 말 잘 듣기, 권태를 즐기기, 꿈꾸기, 기다리기, 마음의 고향 갖기, 글쓰기 등을 권하고 있다. 세모를 맞으며 이제는 삶의 템포도 좀 늦출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경성대 환경공학과 교수>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