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광 장편소설】 「팽이의 시간」(4) - 제2장 유년, 그 꿈 같은 날들

2. 유년, 그 꿈 같은 날들

이광 승인 2023.04.13 20:31 | 최종 수정 2023.06.26 15:21 의견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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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숙의 집은 당시엔 보기 드문 철제 대문으로 되어 있었다. 지난해 인호가 엄마를 따라 이곳을 들렀을 때 산뜻하게 맞아주던, 하늘색 페인트가 칠해진 철문이었다. 대문 옆 기둥에는 돌아가신 이모부의 함자가 새겨진 문패가 그대로 걸려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마당 한 옆의 키 큰 감나무였다. 감나무의 한 쪽 가지는 바깥채의 처마를 향해 뻗어 있었다. 그 처마 아래편에 보이는 창은 창턱이 인호가 발돋움했을 때의 눈높이와 비슷했다. 창은 목재로 된 이중 유리창이었고 안쪽 창엔 간유리가 끼워져 있었다. 감나무를 지나면 자연석으로 둘러싸여 마당보다 한 자가웃 더 높은 화단이 자리했고, 바깥채에 의해 일부 가려졌던 안채의 전모가 드러났다. 경숙은 자신의 핸드백을 안채 대청마루 위에 내려놓고 인호가 등에 메고 온 책가방을 받아주었다.

“안 무겁더나?”
“아니.”

인호는 짧게 답하곤 입을 굳게 닫았다. 그는 이모한테 한마디도 않을 작정이었으나 무심코 대꾸한 자신에 대한 불만을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드러냈다. 아무래도 자신을 가족과 갈라지게 한 장본인이 이모인 게 분명했다. 불편한 심기를 품고 있는데 곧이어 들려오는 이모의 말은 반발심을 한층 부추겨주었다. 하지만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그를 억누르고 있어 그 속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오늘은 인호 피곤할 텐께 씻고 푹 쉬거래이. 내일은 이모랑 같이 인호 전학 갈 학교 가보자꾸나. 학교가 니 맘에 들어야 할 낀데......”

인호는 제 표정을 살피는 이모의 눈길을 피하려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학교마저 바뀌는,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체념에서 새어나오는 풀죽은 소리를 내뱉었다.

“잘래.”
“그래. 그라믄 한숨 자고 나중에 씻자. 보래이, 저가 인자 니 방이데이. 이모가 퍼뜩 자리 봐 줄 텐께 좀만 기다리거래이.” 

동생 준호와 같이 쓰던 조그만 방에 비해 배 이상 넓어 보이는 방이었다. 벽 한 귀퉁이에는 아래쪽에 서랍이 달린 책꽂이가 서 있고 그 옆을 앉은뱅이책상이 앉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호는 저게 다 제 것임을 헤아리며 자신에게 이미 일어난 신변 변화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모가 장에서 새 이불과 요를 꺼낼 땐 그는 심기가 불편한 가운데 슬며시 자리 잡는 묘한 만족감을 물리칠 수 없었다. 요 위에 눕자 머릿속을 나비 한 마리가 팔랑거리며 졸음을 쫓아내는 것 같았다. 인호는 흔들리는 제 마음을 어찌 다스려야 할지 몰라 눈을 감고 억지낮잠을 청했다.  

다음날 경숙은 인호를 데리고 4학년 1학기 전학 수속을 위해 새 학교에 들렀다. 인호는 낯선 곳이지만 뭔가 끌리는 게 있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여기저기 훑어보았다. 부산에서 다니던 학교에 비해 건물도 그렇고 운동장 규모도 작아 보였다. 특별히 좋아 보이는 점도 없지만 더 작은 곳이란 사실이 싫지 않았다. 교무실에서 담임 선생님도 만날 수 있었는데 부산과는 달리 여선생님이었다. 오른팔에 손목 대신 갈고리를 달고 있는 상이용사 출신 수위 아저씨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전학 수속을 마치고 나가는 경숙을 향해 인사 삼아 말을 건넸다.

“고놈 참 똘똘하게 생긴네. 막둥인가요?”

경숙은 굳이 부인하지 않으며 수위에게 수고하라는 말을 남겼다. 그녀는 말없이 따라오는 인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함께 나온 김에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책방에서 인호가 읽을 만한 책을 사줄 생각이었다. 인호가 무엇을 골라야 할지 망설이고 있자 경숙은 ‘어린이 세계명작선집’을 가리켰다. 인호는 이렇다 할 내색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경숙은 책방 주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책방 주인은 귀한 손님을 만난 듯 상반신을 수그린 채 정중하게 책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경숙은 책방 주인이 권하는 책들을 전부 다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십 개월 할부로 그걸 다 구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책방 주인은 횡재를 한 사람처럼 환한 얼굴로 점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자. 여기 적힌 대로 잘 챙겨 실어라. 뒤에 약도 봐라, 찾기 쉬울 거다. 하늘색 철대문집.”

집에 도착하자 얼마 후 많은 책들이 자전거에 실려 배달되어 왔다. 경숙은 책을 일일이 확인한 다음 인호 방의 책꽂이에 꽂기 시작했다. 인호는 이모의 등 뒤에서 빈 책꽂이를 절반 넘게 채운 책들을 의젓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맨 먼저 고른 ‘어린이 세계명작선집’에 이어 ‘소년소녀 세계위인전집’이 꽂혔고 ‘한국 전래동화집’ ‘안데르센 동화집’ 그리고 ‘이솝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인호는 많은 것을 소유한 부자의 풍요로움을 느긋하게 누릴 수 있었다. 그는 이모에게 고맙다는 뜻을 이렇게 표했다.

“이거 싹 다 읽으께.”

그러나 인호는 여전히 말수가 적었다. 인호가 아직은 제 마음을 활짝 열어놓진 않았지만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 중이라고 경숙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았고 집으로 도로 보내달라고 떼쓰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 여겼다. 인호도 나름 자기 자신을 추스르고 있었다. 함께 동전을 주우러 다니던 친구들이 보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새 친구를 사귀기 위한 물색도 틈틈이 했다. 인호는 부산에서 제가 알아서 챙기던 일 중 하나였던 공중수도 줄서기를 준호가 대신 잘해낼지 궁금했다. 공중수도는 물 배급 시간이 되면 늘 장사진을 이루었다. 상수도 시설이 갖춰진 일부 지역에만 가정으로 수돗물이 보급되었고 대개는 우물이나 공중수도를 이용했다. 인호는 줄을 서 있다가 엄마가 오면 그 자리를 넘겨주고 다시 맨 뒷줄로 달려갔다. 엄마가 찰랑찰랑한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인호가 줄 서있는 곳을 지나가며 미소를 보낼 땐 그는 엄마와 한 동지라는 생각에 흐뭇해지곤 했다.

며칠이 지나 덕희가 찾아왔다. 그녀는 인호가 입던 옷가지들을 챙겨왔다. 인호는 그 옷을 보며 엄마가 자신을 데려갈지 모른다는 기대를 버려야만 했다. 반면 엄마가 자신을 데려감으로써 이제 막 제 앞에 펼쳐진 새로운 변화 또한 막이 내릴 거라는 은근한 아쉬움도 덩달아 사라졌다. 하지만 막상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덕희가 돌아가자 인호는 걷잡을 수 없는 허탈감에 빠져들고 말았다. 자신을 눈으로 어루만지며 무거운 발걸음을 떼던 엄마를 곧장 쫓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인호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의 이면에 이미 맛들인 새로운 생활에의 이끌림이 더 작용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인호는 그러한 자신의 속내보다 엄마가 자신을 두고 갔다는 사실에 연연하면서 혼란스러운 마음을 서운한 감정으로 덮어버렸다.

경숙은 잔뜩 굳어 있는 인호의 표정을 풀어주기 위해 갖은 술책을 동원해야 했다.

“짠! 이기 뭐꼬? 인호 좋아하는 곶감이네에.”

인호는 곶감으로 가던 눈길을 이내 거두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 싫어!”
“인호 곶감 좋아하는 거 이모 다 아는데.”

경숙이 웃음을 머금고 곶감을 쥐어주려 하자 인호는 손을 힘껏 오므리며 거절의 의지를 강력하게 표출했다. 먹고 싶은 것을 참아냄으로써 자신이 만만찮은 존재임을 부각시키고 싶었다. 현재의 상황이 자신의 뜻과 아무런 상관없이 어른들에 의해 결정됨으로 인해 상처 입은 자존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꽉 오므린 그의 손을 감싸고 경숙이 달래기 시작했다.

“방학 때 이모가 부산 데리간다 캤다 아이가. 엄마 보고 싶으믄 또 오라꼬 하믄 되고. 글치만 엄마도 다 니들 잘 키울라꼬 열심히 일하니라 바쁠 끼다. 그랑께 인호는 여서 이모랑 잘 지내보제이. 자, 약속!” 

인호는 이모가 내민 새끼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걸지 않았다. 경숙은 답답할 것 같은 긴 침묵을 참고 견디는 인호를 안타까이 지켜보았다. 마침내 그녀는 인호를 와락 껴안았다.

“인호야, 이모한테 웃는 낯 좀 보이 도. 니 웃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조타꼬. 니가 웃어야 이 이모도 신이 날 거 아이가.”

경숙에게 안기자 인호는 그동안 가두어 두었던 설움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조짐을 느꼈다. 한번은 터뜨려야 할 감정의 봇물이었다. 서서히 흐느낌이 새어나오기 시작했고 한순간에 고조되어 오열로 이어졌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인호가 웃어주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경숙도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인호를 껴안은 채 등을 토닥여주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얼마 후 울음이 멎고 슬픔이 가라앉는 동안 아늑한 기운이 두 사람 사이를 부드럽게 밀착시켰다. 가슴으로 나눈 눈물로 말미암아 인호는 이모에 대한 표면적인 거부감을 씻어낼 수 있었다. 실은 그녀를 엄마나 다름없는 존재로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때마침 경숙이 그에게 강아지 좋아하느냐고 물어오자 인호는 비로소 환한 웃음으로 답해주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경숙은 인호가 자신을 받아들이는 의사 표시로 느끼고 한 번 더 꼭 껴안아주었다. 인호는 미루고 있던 숙제를 다 한 것같이 홀가분해진 얼굴로 이모를 바라보았다. 이모가 아는 집에서 개가 곧 새끼를 뗀다고 했다. 다음 주에 강아지를 데려오겠다고 한 약속은 이모에 대한 신뢰를 더욱 굳건하게 해주었다. 강아지 한 마리 키우는 게 소원이었는데 드디어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생애 첫 강아지가 진돗개나 발바리이길 기대했던 인호는 상상도 않았던 불독 새끼임을 알고는 처음엔 다소 실망스러웠다. 경숙이 사과 궤짝에 방석을 깔아 강아지의 임시 잠자리를 만들었다. 그 궤짝을 마루에 두자는 걸 인호는 굳이 제 방으로 들여놓았다. 그리고 강아지 이름을 ‘쫑’이라 정했다. 인호가 “쫑, 쪼옹”하고 부르면 강아지는 바로 반응을 보이며 사과 궤짝을 타고 오르려 했다. 새끼인데도 주름이 잡힌 얼굴에 약간 멍청해 보이는 인상이 우스꽝스러웠고, 시무룩한 표정 또한 볼수록 귀여운 녀석이었다. 이내 정을 쏟기 시작한 인호는 첫 대면에서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는 사실이 미안할 정도로 쫑에게 빠졌다. 인호가 막 잠 들려 할 때 쫑이 낑낑거리는 소리가 그의 귓전을 두드렸다. 인호는 쫑이 헤어진 제 엄마가 보고 싶어 우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일어나 낑낑거리는 쫑을 꺼내 안아주었다. 이모가 자신을 안아주었던 것처럼 껴안고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쫑은 그의 품을 파고들더니 편안한 잠에 들었다. 쫑을 품에 껴안은 채 인호도 그대로 잠이 들었다.

바깥채엔 두 모자가 살았다. 서른을 넘긴 아들과 아직 환갑을 맞지 않은 그의 어머니였다. 인호가 “할무이예”하고 부르자 그녀는 정색을 하며 아줌마란 호칭으로 정정해주었다. 깜빡 잊고 그가 또 할무이라 하자 그녀는 여기 할매가 어디 있느냐며 주의를 주었다. 그의 아들도 아저씨라 불리길 결코 원치 않았다. 인호가 “아저씨” 하며 인사하자 그는 인호를 바라보곤 무덤덤한 표정 위에 슬쩍 웃음을 얹었다.

“그냥 세이라 불러라. 알았제?”

그러나 ‘세이’라 부르기엔 찜찜할 정도로 나이차가 있는지라 인호는 그와 마주치는 것을 가급적 피했다. 어쩌다 서로 부딪힐 때면 호칭 없이 꾸벅 머리만 숙였다. 그런데 쫑이 집에 들어온 지 며칠 지나서였다. 그가 인호를 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

“인호야, 니 동생 생깄다메. 그라믄 내가 젤 큰세잉께 막내이 동생 집 한 채 지어주꾸마.”
“정말요?”
“하모. 이 세이 말 함부로 뱉는 사람 아이다. 강아지도 커면 지 집이 있어야 된데이.”

그는 목공소에서 일을 하며 집 짓는 현장에도 불려가는 목수였다. 인호는 쫑의 집을 지어준다는 말에 정말 큰형 같은 그의 존재감이 믿음직스럽게 다가왔다. 사흘이 지나 두꺼운 합판으로 짱짱하게 짠 쫑의 집이 생겨 마당 한쪽 가에 자리 잡게 되었다. 

 

어느새 인호는 오래전부터 살았던 것처럼 이모집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하굣길에 가깝게 지내는 친구를 집으로 데려오기도 했다. 책에 관심 있는 친구라면 자신의 방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원하는 친구에겐 책을 빌려주었고 인호 또한 책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먼저 눈이 가는 대로 책을 꺼내 읽는가 하면 살펴보고 재미있어 보이는 책을 골라 읽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가 본 책은 ‘이솝 이야기’를 비롯하여 ‘플란다스의 개’ ‘엄마 찾아 삼만리’ ‘피노키오’ 등등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낮에는 책보다는 쫑과 보내는 시간을 우선했다. 학교를 마치면 쫑을 한순간이라도 더 빨리 볼 생각으로 종종걸음을 옮겼다. 집에 다다르기도 전에 이미 그를 반기며 짖는 쫑의 소리가 담을 넘어 들려왔다. 인호는 책가방을 놓아두기 바쁘게 쫑을 데리고 동네 산책에 나섰다.

경숙은 인호가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해나가자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혼자 대충 끼니를 때울 때완 달리 찬을 골고루 장만하고자 자주 장을 보러 갔다. 부엌일이 즐거워졌다. 안채는 경숙이 쓰는 큰방과 인호의 방, 그리고 부엌과 연결된 안방이 있었다. 안방에서 인호와 마주앉아 나누는 식사 시간은 경숙에겐 하루 중 가장 흐뭇한 때였다. 인호는 처음엔 꺼리던 큰방 출입을 이젠 마음대로 들락거렸다. 단 경숙이 바느질일로 바쁠 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삼갈 줄도 알았다. 맨 처음 큰방을 둘러보았을 때 방안의 분위기는 인호에게 야릇한 감흥을 일으키게 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벽에 걸어둔 나무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였다. 이모의 말에 의하면 매달린 게 아니라 못 박힌 것이라 했고, 죄를 지어 벌 받은 게 아니라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는 것이라 했다. 그 다음 눈에 띄는 것이 자개가 박힌 문갑 위에 놓인 성모상이었다. 성모상 아래 성모의 발에 눌려 꼼짝 못하는 게 뱀이란 사실도 인상적이었다. 무시무시한 뱀을 제압한 성모 마리아는 그 옆의 액자 속 상본엔 장미꽃에 둘러싸인 여왕의 모습으로 눈부시게 그려져 있었다. 지난날 구덕산 저수지의 깊은 물빛에서 가졌던 경외심이 차가운 것이었다면 큰방의 십자가상과 성모상에선 따뜻함이 감도는 경외심이 우러나왔다. 

인호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큰방에서 경숙과 함께 바느질을 하던 안나 아주머니는 일을 정리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일이 밀릴 때면 집에서 할 일감을 보자기에 싸 가지고 가기도 했다. 대구 토박이인 안나는 한꺼번에 몇 사람이 맞추는 혼수 한복 주문을 잘 받아왔다. 그녀는 경숙과 같은 성당 레지오 단원으로 활동하며 신앙으로 맺어진 자매였고 근자에 더욱 친하여졌다. 경숙은 터울이 지는 덕희와는 달리 서너 살 적은 안나를 친구와 같이 편안한 동생으로 대했다. 서로가 미망인이란 처지도 두 사람을 묶어주는 끈이 되었다.

은행원이었던 안나의 남편은 오래전 숙직근무 중 연탄가스 중독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그 후 안나는 딸 둘을 키우면서 화장품 외판원으로 생계를 꾸렸다. 성당 교우들이 그녀를 도우려 했고 그녀 또한 붙임성이 있어 단골을 꽤 많이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경숙을 만나 한복일도 겸하게 된 것이었다. 오전에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면 경숙과 안나는 바느질 일손을 놓고 성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했다. 먼저 떠난 남편이 하느님 품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게 해달라는 기도 또한 빠뜨리지 않았다.

하루는 인호가 쫑과 함께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자 경숙이 그를 불렀다. 큰방에는 안나 아주머니와 함께 수녀 한 사람이 와 있었다. 

“인호야. 수녀님이 우리 인호 보러 오신네. 인사 드리래이.”

예전 부산에서 먼발치의 수녀를 보고 왜 저런 옷을 입고 다니는지 의아했던 인호였다. 그런데 바로 그 옷차림이 눈앞에서 그를 향해 미소를 보내고 있지 않는가. 가까이에서 본 수녀의 인상은 머리에 쓴 두건의 엄숙함과 달리 환한 표정이 너무나 밝아 보였다. 인호는 머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인호, 반갑다. 이모님이 네 칭찬 많이 하시던데 정말 의젓하구나. 이번 토요일 성당에 올 수 있겠니? 수녀님이 인호한테 해줄 이야기가 많단다.” 

인호가 수녀의 말에 얼른 답을 못하고 경숙을 바라보자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부터 인호는 경숙이 저녁식사 전 성모상 앞에서 삼종기도 하는 동안 함께하겠다는 뜻으로 무릎 꿇고 그 옆을 지켰다. 기도를 마치고 성호를 긋는 자신의 동작을 어설프게 흉내 내던 인호를 바라볼 때도 경숙은 그 같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수녀는 경숙과 대화의 시간을 잠시 더 가진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대문 밖까지 배웅하려는 경숙을 두 손으로 만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인호가 주님 안에서 엘리사벳 자매님 영적 아들로 잘 클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엘리사벳이라는 이모의 세례명과 영적 아들이란 생소한 말 속에서 인호는 실체는 알 수 없지만 그 속에 흐르는 미묘한 기운 같은 게 느껴졌다. 뒤따르던 안나 아주머니가 인호와 눈을 맞추었다.

“인호, 주일학교 나오면 우리 세실리아가 좋아하겠네.”
“세실리아예?” 
“그래. 전학 왔다는 것도 알고, 인호 잘 생겼다고 그러데.”

안나 아주머니는 눈웃음을 던져주곤 수녀와 함께 돌아갔다. 인호는 주일학교란 곳이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자신을 알고 있다는 세실리아가 누군지도 궁금했다. 학교에서 지나치며 보았던 몇몇 여학생을 떠올려 보았지만 안나 아주머니의 딸로 지목할 만한 얼굴을 찾아내긴 쉽지 않았다. 

성당은 집에서 버스가 다니는 큰길로 나오면 바로 그 건너편에 위치했다. 완만한 경사를 이룬 지붕엔 검정색 기와가 깔려 있었고 벽면은 짙은 밤색 벽돌로 덮여 있는 단정한 느낌의 성전이었다. 인호는 주일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인호가 주일학교에 나가면 좋아할 거라던 세실리아는 그 앞에 나타나 아는 체하거나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모를 통해 세실리아가 그보다 한 살 아래인 3학년이란 건 알았지만 그 속에서 그 애를 가려내기가 만만찮았다. 댕기머리를 하고 있다는 단서를 하나 더 얻은 뒤에야 자세히 보니 안나 아주머니를 닮은 듯한 3학년 여자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아이는 인호와 눈을 마주치자 새침하게 딴 곳으로 눈을 돌렸다. 인호는 안나 아주머니가 해준 말과는 다른 태도를 보이는 세실리아가 마뜩찮으면서도 끌리는 데가 있었다. 3학년들만 보면 그 애가 있나 없나 하고 눈을 반짝이는 것이었다.

성당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학교 비슷하면서도 학교와는 달랐고, 극장 같은 분위기를 띄면서도 극장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제대 뒤편에 세워진 커다란 십자가는 집에서 보던 것과는 크기만큼 느낌에도 차이가 있었다. 인호는 그 십자가의 장엄한 모습에서 예수님이 소수의 사람들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진 존재임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인호는 경숙과 함께 주일미사도 참례했다. 성찬의 전례에서 라틴어로 외우는 신부의 기도 소리는 하늘나라의 언어처럼 신비롭게 들렸다. 신부의 기도가 끝나면 성당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내는 ‘아멘’ 하는 소리는 쉬 따라할 수 있었다. 인호가 ‘아멘’ 하며 두 손을 모았을 땐 그 자신도 그 속에서 일원이 된 것 같은 설렘을 맛보았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과 좀 더 가까워지는 듯 낯이 설면서도 든든한 유대감이 그를 감싸주었다.

저녁식사 후 경숙은 라디오의 연속극을 청취하곤 했다. 그 시간 인호는 큰방에 들러 같이 라디오를 듣기도 했고 제 방의 책을 가져와 방바닥에 누워 읽기도 했다. 그리고 간혹 경숙이 실타래 푸는 일을 돕기도 했다. 인호가 실타래에 끼운 양손을 벌려 긴 타원을 만들면 경숙은 실을 풀어 실패에 감았다. 실이 술술 풀려나가게 하려고 인호는 양손을 번갈아 적절히 틀 줄도 알았다. 경숙은 꽤 능숙한 그 모습을 보면서 인호가 제 어머니와도 실타래 푸는 일을 했으리라 생각했다. 

하루는 인호가 이모부에 대해서 묻자 경숙은 벽장에서 사진첩을 꺼내주었다. 이모부 최우진의 독사진이 맨 먼저 보였고, 그들 부부의 부산 생활이 담긴 사진이 여러 장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모의 결혼식 사진이었다. 사진 하단에는 ‘4278.10.27.’이라는 단기로 된 결혼일자가 새겨져 있었다. 면사포를 쓴 경숙 옆에 서 있는 애티를 막 벗은 소녀가 바로 덕희였다. 그 소녀가 지금의 엄마임을 알려주는 사진은 인호에게 세월의 흐름이란 걸 실감케 했다. 엄마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들끼리 공유하는 친밀감마저 불러일으켰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 소멸된 것이 아니라 실타래에서 풀리는 실처럼 실패에 감겨져 오늘에 이르렀음을 되새기게 하는 사진이었다. 신랑신부 앞에 놓인 의자에 앉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사진 속에서 손자인 자신을 알아보고 다정한 눈빛을 던지는 것 같았다. 

인호가 보기에 이모부는 대단한 멋쟁이였다. 중절모에 둥근 안경을 낀 갸름한 얼굴로 양복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동래 온천장에서 한복 차림의 이모와 함께 찍은 사진을 끝으로 이모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에는 이모가 대구에서 성당 교우들과 찍은 것만 몇 장 있었다. 뒷장의 사진첩에는 아버지와 엄마의 결혼식 사진이 보였는데 그것은 전부터 보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 옆쪽에 끼여 있는 사진 한 장이 그의 눈길을 확 끌어당겼다.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와 함께, 이모가 또 한 어린 아기를 무릎 위에 앉히고 웃으며 찍은 것이었다. 이모 무릎 위의 아기는 엄마가 안고 있는 아기에게 손을 내미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이모, 이 사진 좀 봐봐.”

경숙이 사진첩에 한참 빠져 있는 인호 곁으로 다가앉았다.

“으응, 인호 돌 때 순이랑 찍은 거구나.”

경숙이 불쑥 던진 말 속의 ‘순이’라는 아이 이름이 인호의 머릿속으로 쏜살같이 날아 들어왔다. 인호가 모르고 있었던 순이의 정체는 경숙의 입을 통해 곧바로 드러났다.

“인호는 누나 기억 안 나제?”

이번엔 누나라는 말이 그의 머릿속을 휘감았다. 인호는 지금 막 미답의 세계에 당도한 듯한 눈빛으로 스스로를 긴장시켰다.

“그라믄 이 아는 내고, 이 아가...... 누나라꼬?”

놀란 표정을 한 인호를 보자마자 경숙은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무의식중에 꺼낸 말 한마디로 뭔가 큰일을 저지른 것 같은 걱정이 확 들이쳤다. 동생 덕희가 순이의 존재를 인호에게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자신을 탓하며 인호의 눈치를 살폈다. 인호는 사진첩 속의 아이한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못을 박듯 혼잣말을 했다.

“내 누나 맞는 가베.”

경숙이 무슨 말로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고심하는 사이 인호는 제법 어른스럽게 입을 움직였다.

“괜찬타. 엄마한텐 말 안할 텐께 이모가 얘기해 도.”

생각해보면 인호에게 꼭 숨겨야 할 일은 아니었다. 이미 발설한 것을 번복한다고 덮어질 일도 아니었다. 순이와 인호는 연년생이었다. 경숙은 순이가 홍역을 앓을 무렵 어린 인호를 잠시 맡은 적이 있었다. 덕희는 홍역에 좋다는 토끼고기도 구해 먹이며 순이를 정성껏 돌보았으나 차도가 없어 큰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폐렴으로 악화된 순이의 어린 생명은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덕희는 딸을 가슴에 묻어야 했다. 경숙은 당시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정식은 자꾸 되살아나는 상실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순이의 흔적을 아예 지우기로 했다. 순이의 백일 사진부터 돌 전후의 사진까지 전부 태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한 장 더 현상하여 경숙이 갖고 있던 순이의 유일한 사진을 인호가 찾아낸 것이었다. 한 살 위의 누나가 홍역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이모의 이야기는 인호에게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할 불씨를 안겨주었다. 경숙이 나직한 목소리로 순이는 아기천사가 되었다고 말했을 때 인호는 정말 누나가 천사가 되어 있길 바랐다.

그날 밤 인호는 제 방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누웠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인호는 점점 과거의 세계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국민학교 입학하기 이전 낮잠을 자다 깼을 때 엄마가 이모와 둘이서 누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걸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했다. 그 기억은 마치 그릇의 본 모양을 전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작은 사금파리 한 조각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 사금파리가 기억의 동굴 속에서 순간 반짝거린 것이었다. 오늘 본 그 사진마저 없었다면 누나의 존재는 영영 모르는 채 넘어가지 않았을까 싶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이 세상은 아직 어린아이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에 싸여 있는 것 같았다. 사진 속 순이의 모습을 통해 천사가 된 누나를 상상해보았다. 

과거의 세계는 죽음의 세계와 얽혀 있었다. 이번에는 중절모를 쓴 이모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태 막연한 공포감 속에 가려졌던 죽음이라는 의미가 사람의 형상을 가진 실지 사건으로 이해되었다. 누나가 죽었고 이모부가 죽었다. 결혼식 사진 속에서 그를 바라보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도 죽었다. 언젠가 인호가 아버지에게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실종되셨고 할머니는 속세를 떠났다고 했다. 무슨 뜻인지 잘 몰라 인호는 엄마에게 재차 물어야 했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돌아가신 게 거의 확실하고 할머니는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인호에게 할아버지와 할머니 또한 죽음에 가까운 존재였다.

구렁 같은 죽음의 세계에서 인호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점점 더 빠져 들어가 과거가 아닌 앞으로의 죽음까지도 눈앞을 맴돌며 그를 압도하려 했다. ‘아버지가 죽는다. 엄마가 죽는다. 이모도 죽는다. 나도 죽는다.’ 어디선가 들은 바 있는 저승사자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했다. 두렵고 불길한 감정에 휩싸이자 어서 빨리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일었다. 인호는 제 방을 잽싸게 나와 이모 방문을 열며 문도 닫지 않은 채 뛰어들었다.

“이모, 무서워!”

갑자기 인호가 들이닥치자 경숙은 읽고 있던 성경책을 문갑 위에 얹고 그를 껴안아주었다.

“우리 인호, 꿈 꿋구나.”
“아니, 꿈이 아이고...... 생각했어.”
“뭔 생각?”
“사람들이 죽는 게 겁나! 이모는 죽으면 안 돼!”

인호는 경숙의 품에서 얼굴을 들고 그녀와 눈을 맞추면서 심각한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경숙은 인호가 망자의 사진을 보고 난 뒤 계속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그녀는 자세를 고쳐 인호와 마주보고 앉으며 양손으로 그의 양손을 감싸주었다. 

“인호야, 니도 좀 있음 주일학교에서 배울 낀데,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데이. 죽어도 예수님처럼 부활해가지고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기란다.”
“정말?”
“그래. 그래서 이모는 죽는 기 하나도 겁 안 난데이.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죽음이 안 무서운 기라. 영원한 하늘나라로 간다꼬 알고 있거든. 그라니까 인호도 주일학교 열심히 댕기야 된데이.”
“근데 아부지하고 엄마는 하느님 안 믿는데 우짜노?”
“인호가 기도 열심히 하면 되제. 이모도 돌아가신 이모부를 위해 하느님께 늘 빈다 아이가.”

인호는 이모와 함께 살게 된 것이 아주 다행이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아무래도 하느님이 자신을 잘 돌봐주신 것 같았다. 마음속에서 부모를 위해, 동생 준호를 위해 기도를 올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인호는 그 책임감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쫑을 데리고 나가는 산책은 인호의 일과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일이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난 쫑은 힘도 세어져 인호가 목줄을 잡고 걷다보면 끌려가는 모양새가 되곤 했다. 그럴 땐 그도 목줄을 쥔 손에 힘을 실어 쫑의 전진을 통제해야 했다. 타고난 용모가 우락부락해 쫑은 또래들 특히 여자 아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실제로는 담을 넘어온 고양이도 눈감아주는 온순한 면도 있었다. 인호는 쫑이 한번 물면 절대 놓아주지 않지만 주인의 명령 없이는 절대 물지도 않는다며 은근한 위협과 함께 안전보장을 제시하곤 아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쫑이 있어 인호는 인근 또래들 사이에서 나름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 되었다.

인호가 대구에서 처음 맞는 여름방학이었다. 경숙은 인호를 데리고 부산을 다녀오기로 했다. 인호는 구덕산 저수지 밑의 판잣집에서 얼마 전 새로 이사했다는 집이 보고 싶었다. 그들은 부산역에서 내려 곧장 덕희의 양장점을 찾아갔다. 덕희와 함께 준호도 그곳에 있었다. 덕희는 인호를 반기며 뭉클하게 일어나는 애틋한 정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준호는 오랜만에 보는 형을 환호하며 맞았다. 인호는 귀한 전화기가 가게 한 편에 놓여 있는 걸 보았다. 화물 운송과 관련된 연락을 원활히 주고받기 위해 이정식이 거금을 들여 설치한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급한 연락 방편으로 전보가 주로 이용되었고 전화를 갖춘 곳이 그리 흔치 않았다. 덕희는 전화기를 가리키며 쌀을 서른 가마 정도 팔아야 가입할 수 있는 거라며 은근히 자랑 삼았다. 인호는 수화기를 들어 전화를 받는 시늉을 해보았다. ‘뚜우’ 하면서 줄기차게 귓속을 채워주는 신호음에 흡족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덕희는 양장점 문을 평소보다 빨리 닫았다. 다 같이 새로 이사한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게에서 그리 멀지 않는 동네였다. 집은 인호가 다녔던 학교의 담장과 맞닿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헌집을 일부 헐어 블록을 다시 쌓고 양철 지붕을 씌운 형태로 단장하여 최근에 지은 집처럼 보였다. 안에 들어서자 오른편에 널찍하게 세멘을 발라둔 수도간이 눈에 들어왔다. 꼭지가 달린 수도 파이프가 요술지팡이처럼 서 있었고 한쪽엔 빨래판 구실을 하는 넓적한 돌이 깔려 있었다.

이정식은 부두에서 수입화물을 싣고 서울로 올라갔고 내일 오후 늦은 시간에 집에 온다고 했다. 경숙의 도움으로 트럭을 구입한 후 이정식은 줄곧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해내야 했다. 서울 부산을 오가는 장거리 화물을 주로 취급했는데  고속도로 개통 전의 국도라 편도에 꼬박 하루가 소요되었다. 이정식이 검수회사에서 근무할 때 안면을 익힌 항만하역업계의 연배들이 이제 각 분야에서 실무의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정식은 시간이 날 때마다 그들과 식사를 하고 가끔 술좌석도 가졌다. 그는 자신이 키울 사업의 밑그림을 크게 그려놓고 있었다.

인호는 엄마가 해준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경숙은 다음날 대구로 돌아가기로 했다. 인호가 가족과 하룻밤 더 자도록 두고 갈 작정이었다. 덕희도 그걸 원했다. 이정식은 인호가 오기 전날, 갈 때는 자신의 차에 태워 서울 가는 길에 대구에 내려주겠다는 의사를 미리 밝혀놓기도 했다. 그러나 인호는 이모와 함께 가고 싶었다. 바깥채에 쫑을 맡기긴 했지만 그래도 쫑을 돌볼 사람은 자기라는 생각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이모와 같이 가겠다는 인호의 말에 덕희는 가슴 한쪽이 움찔했다. 다음날 양장점에서 이정식의 전화를 받은 인호는 이모 혼자 돌아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이정식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아부지 말 들어! 내일 데리다줄 낀께 집에 있거라.”

경숙을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해주고 오는 인호를 보며 덕희는 아들이 제법 늠름해졌음을 느꼈다. 한편으론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론 안쓰럽고, 또 한편 서운한 구석도 곁들여진 여러 가지 감정이 뒤엉키고 있었다. 결국은 한창 자라나는 아들을 곁에 두지 못하는 아쉬움만 마당의 멍석처럼 마음 한가운데 깔리는 것이었다.

날씨가 무더웠다. 인호는 온종일 준호와 땀 흘리며 뛰어놀았다. 땀범벅이 된 형제가 집에 들어오자 평소보다 일을 일찍 끝낸 이정식도 도착했다, 그는 아이들을 수돗가로 불러내 엎드리게 하고 등목을 해주었다. 둘 다 이정식이 물을 끼얹을 때마다 소리를 내질렀다. 등줄기가 오싹 소름이 돋으며 시원해졌다. 

모처럼 네 식구가 함께 하는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덕희는 아들 둘 다 즐겨먹는 불고기를 상에 올렸다. 그리고 마른 납새미를 쪄 먹기 편하도록 살을 발라내놓았다. 마른 납새미는 인호가 아주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것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덕희는 큰 양푼에 수박을 썰고 얼음을 쪼개 넣어 화채를 만들었다. 이정식은 화채를 몇 숟갈 떠먹다 말고 인호를 바라보았다. 인호는 아버지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고 화채에 열중하고 있었다. 잠시 후 이정식이 헛기침을 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인호야, 이모집에서 지낼 만하나?”
“예, 지낼 만해예.”

인호가 아버지와 눈을 맞추었다. 아버지의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다행이다. 이왕에 갔으니 거서 국민학교는 졸업하고, 중학교는 부산서 댕기는 기다. 그라고 마음에 안 맞는 기 있다든지, 아부지 엄마가 보고 싶어 안 되겠다든지 하믄 말이다, 엄마한테 전화해라. 아부지가 바로 데리러갈 낀께. 그라고 니가 좋다카믄 사립학교로 전학시키 줄 수도 있응께 꼭 거서 국민학교 졸업할 끼라꼬 못 박을 필요는 업데이. 무슨 말인지 알겠제?”

인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 또한 국민학교를 졸업하면 부산으로 돌아올 거라는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아버지가 그 문제를 거론하자 아직 확실한 결정이 나지 않은 훗날의 일로 여겨졌다. 그는 이어지는 아버지의 말을 현재 자신의 대구 생활과 연관 짓지 않고 예사롭게 듣고 있었다.  

“내일 가거든 언제든지 니가 마음만 먹으면 부산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거라.  아부진 돈 마니 벌어서 너거 아무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해줄 낀께.”

 

이광 시인

◇ 이광 시인 : ▷200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부산시조 작품상, 이호우 시조문학상 신인상, 나래시조문학상 수상 ▷시조집  《당신, 원본인가요》, 《소리가 강을 건넌다》, 《바람이 사람 같다》, 현대시조 100인선 《시장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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