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광 장편소설】 「팽이의 시간」(5) - 제2장 유년, 그 꿈 같은 날들

2. 유년, 그 꿈 같은 날들

이광 승인 2023.04.17 10:02 | 최종 수정 2023.06.26 15:22 의견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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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의 감나무에 달린 동이감이 발갛게 물들어가던 날이었다. 인호가 학교에서 돌아오자 꼬리를 흔들며 나타나야 할 쫑이 보이지 않았다. 산책을 데리고 나가기 위해 목줄을 매려고 불러도 기척이 없었다. 전날부터 쫑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산책을 나가도 앞장서 가지 않고 마지못해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인호가 학교 가느라 나설 때면 으레 붙따라 얼굴을 들이밀던 동작을 오늘 아침엔 그냥 넘겨버린 것을 보면 아무래도 쫑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인호는 쫑의 이름을 외치며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어디선가 쫑이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채 대청마루 아래쪽이었다. 마루 밑 인호가 몸을 납작 구부린 자세를 취해야 보이는 구석에 쫑이 웅크리고 있었다. 찾아낸 반가움보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쫑은 거기서 나올 생각이 없는 듯 미동만 살짝 보여주었다. 인호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간곡하게 그의 짝을 불러내었다.

“쫑...... 쪼옹...... 쪼옹.”

마지못해 쫑이 몸을 일으켜 슬금슬금 기어 나오듯 움직였다. 그러나 몇 걸음 오다말고 그만 다시 주저앉아 몸을 웅크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때 인호는 쫑의 코에 누런 콧물이 맺혀 있는 것을 보았다.

경숙은 걱정하는 인호를 달래며 가축병원에 연락을 취했다. 수의사가 자전거를 타고 와 쫑을 대청마루 밑에서 끄집어내어 살펴보더니 바로 입원시켜야 한다고 했다. 인호가 안고 가려 했으나 경숙이 큰 소쿠리에 쫑을 올리고 머리에 이었다. 기력이 없는 쫑은 소쿠리에 엎드려 꼼짝 않고 있었다. 가축병원에서 수의사는 쫑이 홍역에 걸렸다고 했다. 인호는 하루빨리 쫑이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그 기도는 하느님이 틀림없이 들어줄 것이라 믿었다. 다음날 학교를 마치고 인호는 집으로 접어드는 길을 지나 한참을 더 걸었다. 쫑에게 줄 버터빵을 사가지고 가축병원을 찾아갔다. 쫑은 쇠창살을 지른 네모난 칸에 누워 있었다. 인호를 보자 비실비실 몸을 일으켰지만 더는 힘을 내지 못했다. 누른 콧물도 그대로였다. 인호가 떼어준 빵조각엔 입을 대지 않은 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쫑. 빠다빵 좋아하잖아. 먹고 힘내. 빨리 나아서 내랑 놀아야지, 응!”

인호의 간절한 격려에 대한 대꾸로 쫑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쫑의 눈동자엔 슬픔이 어려 있었다. 다음날 가축병원을 들렀을 때도 쫑은 여전히 아픈 몸이었다. 수의사에게 쫑이 언제쯤 집으로 올 수 있는지 물었지만 그는 잘 모르는 사람처럼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여기는 아이들이 오면 안 좋다며 이제 오지 말고 집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인호는 쫑과 헤어지기 전 두 손을 모우고 화살기도를 바쳤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수의사가 인호를 향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야야, 인자 작별의 시간이 왔단다. 쫑한테 안녕, 하고 그만 가거라.”

인호는 그가 자신을 얼른 내보내기 위해 한 말인 줄 알고 그곳을 나왔다. 그런데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쫑과의 작별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인호는 더 열심히 기도를 올렸다. 개를 무서워하는 계집아이들 앞으로 쫑을 데리고 가서 그들이 겁에 질린 모습을 은근히 즐기던 한 때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예수님께 빌었다. 만약 그 때문이라면 그 벌은 제가 달게 받겠다는 비장한 뜻도 밝혔다.

쫑의 죽음은 인호에게 크나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얘기로만 들어왔던 죽음이라는 실상을 접하고, 눈물 젖은 눈으로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제가 곧 죽을 걸 알고 있었던지 우수에 찬 쫑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경숙은 쫑의 죽음은 하느님께서 인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생명의 가치와 유한함을 일깨워주기 위해 자연의 순리를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인호는 이모의 말이 어려웠지만 어느 정도 이해는 되었다. 차츰 슬픔이 진정되면서 그럼 왜 모든 생명을 앗아가는 죽음이란 현상이 있는 것인지 하는 답이 없는 물음과 씨름했다. 순이가 생각났다. 순이도 홍역으로 눈을 감았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인호는 순이와 쫑이 하늘나라에서 만나길 바라며 하느님께 기도했다. 기도는 상상 속에서는 곧장 이루어졌다. 아기 천사가 되어 아이들 키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 날개를 펼치고 있는 순이와 그 아래 앞발을 벌리고 순이를 향해 고개를 쳐든 쫑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으로 펼쳐지는 것이었다.

 

날씨가 점점 쌀쌀해졌다. 바깥채에 살던 사람들이 이사하는 날이 왔다. 그 집 아들이 터를 사서 집을 지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경숙은 떠나는 그들을 위해 이사 가는 동네에 돌릴 시루떡을 쪘다. 그리고 그 동안 집안에 든든한 남자가 있어 좋았다는 말도 진심으로 전했다. 인호에게 ‘세이’라고 불러 달라하던 그는 쫑의 집을 만들어주었을 뿐 아니라 안채 입구에 평상도 짜 주었다. 인호는 그를 끝내 ‘세이’라 부르지 못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대문을 나서는 그를 향해 인호는 마음속으로 “세이” 하고 불러보았다. 마음이 통한 것일까. 그가 돌아서서 씩 웃으며 인호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인호도 손을 흔들었다.

바깥채엔 안나네가 들어오기로 되어 있었다. 바깥채가 조만간 이사 나갈 거란 의사를 전하자 경숙은 안나에게 그 사실을 바로 알려주었다. 경숙은 때가 오면 한 집에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전부터 밝혀두었고 안나 또한 그러길 원하고 있었다. 바느질일뿐만 아니라 집을 옮기게 되면 여러모로 좋은 점이 많았다. 아이들 학교가 가깝고 성당도 가까웠다. 게다가 수도시설이 갖춰져 물 쓰기가 편했다. 급수가 제한될 때에도 우물이 있어 미리 물을 받아두는 수고를 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한 집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과 서로 의지하며 살 수 있다는 게 첫째가는 이유였다. 안나는 셋방살이를 하는 내내 큰딸 루시아가 주인집 아들과 다툴 때마다 딸의 편이 되어주지 못한 안타까움을 꾹 눌러야만 했다.

안나에겐 국민학교 6학년 졸업반인 큰딸 루시아와 3학년인 작은딸 세실리아가 있었다. 루시아는 세실리아에 비해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어린이 미사에서 독서자로 나와 정확한 발음으로 귀에 속속 들어오게끔 성경을 읽었다. 그녀는 인호가 주일학교에 들어온 것을 알고 그에게 자신이 안나 아주머니의 딸이라며 먼저 아는 체했다. 학교에서 지나가다 만날 때도 반갑게 대해주었다. 그러나 세실리아는 달랐다. 그녀는 여전히 인호를 보면 못 본 체했다. 그건 인호도 마찬가지였다. 한 집에서 살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세실리아 앞을 지나가며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인호는 그들이 이사 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안나네가 이사 오는 날이었다. 짐꾼들이 짐을 풀고 옮기는 동안 안나 또한 바쁘게 움직였다. 경숙이 옷 보따리 등을 나르며 일을 거들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왔을 땐 세간은 자리를 잡았고 잔짐 정리가 시작되었다. 루시아와 세실리아가 제 물건들을 챙기자 짐이 쑥 줄어든 모습이었다. 경숙이 갓 삶아낸 옥수수를 그릇에 담아 바깥채로 가져왔다. 그릇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잘 익은 옥수수 향이 났다.

“인자 정리가 얼추 다 된 거 같구마. 나머진 차근차근 쉬어감서 해. 근데 인호가 오늘 따라 되게 늦네.”

“인호, 학교에서 애들이랑 공놀이하던데요.”

루시아의 말을 경숙이 웃으면서 받았다.

“루시아가 인호를 챙겨봤구마. 근데 녀석이 오늘 이사 오는 줄 알고 학교 갔는데 와 이리 안 오노.”

그때 초인종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인혼가 봐. 루시아, 문 열어 줘.”

안나의 말에 루시아가 혼잣말을 하며 일어섰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동화 속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거 같네.”

세실리아가 눈을 반짝이며 한 마디 덧붙였다. 경숙과 안나는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는 인호가 바깥채 툇마루 앞에 와서 꾸벅 절을 한 뒤에도 남아 있었다. 세실리아는 인호와 눈이 마주치길 기다렸지만 인호는 세실리아를 향해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인호는 마루에 걸터앉을 생각은 않고, 어른들 앞에 다시 머리를 숙이곤 제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심 그들과 어울려 옥수수를 먹으며 무슨 이야기가 오고가는지 듣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처음부터 너무 쉽게 마음을 내보여선 안 된다는 방어적인 태도는 어린 나이에 객지살이를 하며 나름의 처세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경숙의 판단은 달랐다.

“인호가 생각보담 낯가림이 심해.”

경숙의 말에 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세실리아에게 인호 몫의 옥수수를 건넸다.

“오빠 갖다주거라.”

세실리아가 안채 마루에 오른 인호에게 잰걸음으로 다가가 그를 불러세웠다.

“오빠! 이거 받아.”

오빠라는 호칭이 익숙하지 않은 인호는 옥수수를 건네받고 무슨 말을 할까 망설이다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고맙데이.”

그에 반해 세실리아는 미리 준비해둔 것처럼 서슴없이 인사를 이어가는 예기치 않은 모습을 보였다.

“오빠, 나는 윤세실이야. 우리 집에선 세실리아라고 불러.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그래. 나는 인호야, 이인호.”

인호는 엉겁결에 대답하곤 조금 어색한 미소를 보이며 곧장 제 방으로 들어갔다. 세실리아가 오빠라 불러준 사실에 들뜬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오빠라는 호칭이 그렇게 듣기 좋은 건줄 미처 몰랐다. 사이좋게 지내자는 그녀의 말에 충분히 맞장구쳐주지 못한 부분이 후회스럽긴 했지만 일단 말을 터놓고 나니 어려운 문제 하나가 풀린 것 같았다. 그동안 입을 꾹 다물고 큰일을 대하듯 벼르기만 했는데 그게 얼마나 답답한 것이었는지 속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경숙이 제안하여 안채에서 두 집 식구가 함께 저녁을 들기로 했다. 경숙과 안나가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는 동안 루시아와 세실리아는 그들의 방을 정돈하는 것 같았다. 마당으로 난 창 옆으로 바싹 다가서자 두 자매가 움직이며 내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뭔가 하느라 바쁜데 인호는 자기에게만 주어진 일이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마침 그의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대문 오른쪽 담을 낀 변소 귀퉁이에 세워둔 싸리비였다. 바깥채에서 살던 ‘세이’의 마당 쓰는 모습을 지켜봤던 인호는 싸리비를 집어 들었다. 제 존재를 드러낼 만한 일로 마당 비질이 적당할 것 같았다. 안채에서 바깥채 쪽으로 비질을 하면서 감나무 주변의 낙엽들은 담장 쪽으로 밀어붙였다. 비질 소리가 잘 나도록 마당을 긁듯이 쓸었다. 아니나 다를까 밖이 궁금했던지 루시아가 창을 열었다.

“인호, 마당 쓸고 있네. 먼지 안 나게 살살 해.”

“알았어.”

루시아가 웃음이 담긴 밝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인호는 서툰 비질을 지적받은 양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루시아 뒤엔 얼굴 반쪽만 드러난 세실리아가 보였다. 인호는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했다. 마당을 다 쓸고 나니 싸리비 지나간 자국이 깔끔했다. 이를 본 안나 아주머니의 칭찬은 인호가 그냥 듣고 넘기기엔 여운이 꽤나 강했다.

“아이구, 인호가 마당 훤하게 쓸어놨구나. 이 집에 하나 뿐인 남자 역할 톡톡히 하고 있네.”

아무래도 앞으로 마당 쓰는 일은 인호가 도맡아해야 할 것 같았다. 주어진 일이 없어 골라잡아 한 비질이 집안에 하나 뿐인 남자의 역할로 인정받았다는 점이 그를 은근히 고무시켰다. 집안에서 자기 할일을 찾으려 했다는 발상 자체에 스스로 높은 점수를 주었다.

두 집안 식구가 함께할 저녁이 준비되었다. 부엌으로 통하는 안방에서 평소 개다리소반으로 상을 차리기만 하다가 제삿날 쓰는 큰상이 놓이자 방안이 가득했다. 경숙과 안나가 마주보고 앉고, 인호 맞은편에 루시아와 세실리아가 앉았다. 인호는 세실리아와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상 위에 올려놓은 시선을 좌우로만 움직였다. 오늘 세실리아와 말문을 살짝 열긴 했지만 마음의 문까지 열어놓은 건 아니었다. 인호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몰라도 마음의 문을 활짝 열기 위해선 좀 더 뜸을 들여야 된다고 생각했다. 말없이 밥상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식사하는 인호에게 안나가 입을 열도록 부추겼다.

“인호, 양반이네. 밥상 앞이라고 한마디도 안 하고. 건데 요즘은 양반도 밥 먹을 때 재밌는 이야기도 하고 그러는 거야. 그래야 소화도 잘되고 밥맛도 좋단다. 언니, 내 말이 맞죠?”

안나가 동의를 구하자 경숙도 웃으며 말을 받았다.

“우리 인호 양반이지. 건데 재밌는 이야기도 얼매나 잘하는데, 그쟈?”

인호는 밥상을 둘러싸고 있는 얼굴들이 모두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윽고 뭔가 발언을 해야 한다는 조바심에 그는 오늘 절실히 와 닿은 한 가지 사실을 털어놓았다.

“보니까 이 집에서 내가 제일 불리할 꺼 같은데.”

“아니, 왜?”

불쑥 튀어나온 말이 뜻밖이라 안나가 곧장 되물었다.

“일 대 사라서.”

말뜻을 바로 알아차린 어른들의 웃음에 루시아도 덩달아 웃었다. 안나가 인호의 입장을 옹호했다.

“맞네. 일 대 사네. 어쩌지, 아줌마가 인호 편에 서야겠다.”

“엄마, 나도 인호 오빠 편 할 건데.”

세실리아였다. 안나가 흥을 돋울 기세로 화제를 끌어갔다.

“그럴래. 그럼 삼 대 이가 되니 인호가 유리해졌네. 아니, 보니까 전부 인호 편 같은데, 뭘. 루시아도 그렇지? ”

“아니, 나는 빼도 돼요.”

루시아가 말을 맺자 인호는 비장하면서도 투정이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여기 진짜 내 편이 어딘노? 전에 있었는데 하늘나라 갔으이......”

경숙은 인호가 수컷이었던 쫑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임을 안나에게 속삭이는 어조로 전했으나 그 소리는 인호에게도 들렸다. 순간 웃음을 참아내는 난처한 침묵이 주위를 감돌았다. 불현듯 쫑이 떠올라 나온 말이었지만 인호는 괜히 꺼냈다 싶어 입을 다물고 아랫입술을 삐죽이 내밀었다.

 

다음날 등교 시간이었다. 인호가 앞장서서 걷고 바로 뒤에서 루시아와 세실리아가 나란히 걸었다. 인호는 가끔씩 돌아보며 루시아를 거쳐 세실리아에게 눈길을 주었다. 더 이상 마음의 준비라는 건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세실리아를 향한 마음의 문은 밤새 절로 열려버렸다. 학교에 들어서서 각자 교실로 흩어질 때 서로가 손을 흔들어주었다. 손을 흔들며 세실리아가 웃음을 보내주자 인호는 자신도 웃음을 잘 머금고 있는지 입모양에 신경을 썼다. 이전 간혹 학교 운동장에서 세실리아와 마주쳤을 때 소가 닭 보듯 지나가던 장면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러면서 새침해 있는 세실리아의 표정을 곁눈질하기도 했는데 그런 게 다 물이 찰 때까지 기다린 물꼬 같은 것이었다.

겨울방학이 다가오고 있었다. 인호는 매일 같이 등교하면서도 쉬는 시간 세실리아를 만날 때마다 반가웠다. 운동장에 있을 줄 알고 찾았는데 보이지 않으면 허전했다. 물론 주일학교도 함께 다녔다. 세실리아는 학교에서는 ‘윤세실’이라는 이름으로 통했다. 인호도 세례명보다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 ‘세실’이라 불렀다. 세실은 유아세례를 받고 세례명을 따 호적에 올린 이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인호에게도 세례명이 정해졌다. 성탄 전날 인호가 세례를 받게 된 것이었다. 경숙의 세례명이 엘리사벳이라 세례자 요한으로 하면 좋겠다고 담당 수녀가 정해주었다. 세례자 요한은 엘리사벳이 늙은 나이에 얻은 아들이었다. 성세성사를 마치고 인호는 말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변화된 자신의 모습과 신성한 축복을 받았다는 느낌에 다소 흥분되었다. 경숙은 인호와 함께 여러 교우들의 축하를 받으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인호에게 대부라고 하는 새로운 존재도 생겼다. 그의 대부는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는 대학생이었다. 인호는 새로 얻은 제 본명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인호라고 불리어지는 세계와 요한이란 세례명으로 통하는 세계를 더불어 살게 될 첫 걸음을 사뭇 엄숙한 기분으로 내디뎠다.

성탄 전야에는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 경숙과 안나가 자정 미사를 보러 성당에 가면서 인호에게 바깥채 자매들과 함께 있으라고 했다. 인호는 이모가 그릇에 담아두고 간 홍시를 들고 자매들의 방을 찾았다. 열린 문 사이로 방안을 일별한 적은 있었지만 들어가 보는 건 처음이었다. 방안에는 책상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고 벽 한 구석엔 파스텔 톤의 베이지색 옷장이 서 있었다. 방에서 향긋한 비누 냄새 같은 게 났다. 인호는 그 냄새를 좀 더 깊이 맡으려고 입을 닫고 코로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두 자매는 인호를 반기며 홍시를 함께 먹었다. 평소 같으면 이미 잘 시간이 지났는데도 졸음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많은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루시아가 화제를 주도했다.

“부산에는 해수욕장이 많다던데 어디어디 가봤니?”

“송도 해수욕장만 두 번 가봤데이. 거기 가믄 하늘에 걸린 줄 타고 가는 케이블카가 있고, 바다 위에 떠 있는 구름다리도 있데이. 나는 구름다리 건너가 봤는데 다리 밑으로 바닷물이 출렁거리고 다리도 막 출렁거린다 아이가.”

“와! 무섭겠다.”

세실리아가 구름다리를 상상하며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짓자 인호는 열심히 뒷맛을 달았다.

“그래. 첨엔 별로 안 무섭지만 갈수록 무서워지는데, 중간쯤 갔을 때가 제일 무서운 기라. 구름다리가 자꾸 흔들흔들하니까 내 다리도 따라 흔들거리는데 겁이 그냥 저절로 나더라. 아부지 손 꽉 잡았다 아이가. 요새 같으믄 내 혼자도 건너갈 낀데 그땐 내가 일곱 살밖에 안 됐거든.”

갑자기 아버지 얼굴이 떠오르자 인호는 불쑥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아버지도 자신을 보고 싶어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무서울 때도 있지만 반면 세상 어떤 무서움도 다 막아줄 것 같은 존재였다. 이제 겨울방학을 했으니 곧 부산으로 가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살짝 들뜨기 시작했고, 가족과 함께 있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실제의 만남 이전에 상상 속의 만남이 주는 기쁨도 달콤한 것이었다. 미리 맛보듯 뇌리를 감도는 즐거움이 그를 설레게 했다. 잠시 후 인호는 세실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겐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이 인호의 마음을 움직였다.

“세실아, 니는 아부지 안 보고 싶나?”

“보고 싶지만 얼굴이 잘 기억이 안 나.”

세실리아가 약간 소침해진 목소리로 답하자 루시아가 말을 받았다.

“세실이 세 살 때 우리 아빠 하늘나라 가셨어. 세실이는 사진에 있는 아빠만 기억해. 하지만 나는 우리 아빠 목소리도 기억한다. 갑자기 요한이 너 때문에 아빠 목소리가 듣고 싶네.”

“미안. 갑자기 아부지 생각이 나서 한번 물어본 긴데.”

“근데 넌 왜 아빠하고 같이 안 사는지 물어봐도 돼?”

루시아의 갑작스런 응수에 인호는 숨을 한번 크게 내쉬었다.

“내가 와 여서 사는고 하믄 말이데이 우리 아부지 억수로 바뿐 기라. 우리나라에서 젤 바뿐 사람 중에 한 사람 아이가. 우리 엄마도 양장점 한다고 바뿌고, 그라고 이모는 또 혼자 있으이 심심할 거 아이가. 그래서.......”

인호가 뒷말을 얼버무리는 사이 루시아가 재차 물었다.

“그럼 언제까지 여기서 살 거야?”

“국민학교는 여서 졸업할 끼고, 중학교는 아직 모르겠는데 나중에 생각해볼라꼬”

눈빛을 반짝이며 인호의 말을 듣고 있던 세실리아가 슬쩍 끼어들어 화제를 바꾸었다.

“우리 아빠는 글씨를 참 잘 쓰셨대. 그래서 언니두 글씨 잘 쓰는데 나는 안 그래.”

“니는 글씨 못 쓴다꼬?. 얼마만치 못 쓰는지 함 보이주봐라.”

“싫어. 안 보여줄 거야.”

웃으면서 손을 내젓는 세실리아를 인호가 조르기 시작했다. 마지못해 보여주는 세실리아의 공책 속 깨알 같은 글씨는 그가 보기엔 예쁘기만 했다. 그리고 주저하면서도 순순히 자신의 공책을 공개한 세실리아가 더 정답게 느껴졌다. 인호는 누구에겐가 물어보려고 품고 있었던 의문 하나를 끄집어냈다. 인호는 루시아를 쳐다보았다. 어쩌면 루시아가 알기 쉽게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근데 내 궁금한 기 하나 있는데 누구는 하늘나라에 일찍 가고 누구는 또 오래 살다가 가고, 와 그라는지 아나?”

루시아는 그 정도는 자신이 능히 답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얼굴에 내비쳤다.

“그거야 하느님 뜻이니까 그렇지 뭐. 저녁때가 되면 엄마도 그러고 이모도 그러고 밥 먹으러 오라고 부르시잖아? 하느님도 사람마다 정해진 때에 하늘나라 오라고 부르시는 거야.”

“부르시는 건 알겠는데 먼저 부르는 사람은 뭐고, 나중에 부르는 건 또 뭐 땜인지 그기 궁금하다니까.”

인호의 다그쳐 묻는 말에 루시아도 보다 신중한 얼굴을 했다. 그와 비슷한 질문을 주일학교에서 누군가 수녀님에게 던진 적 있었다는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때 수녀님 답변을 다 기억하진 못하지만 머릿속에 들어 있는 이야기 한 가지가 떠올랐다. 절구 속의 삶은 콩은 한꺼번에 골고루 찧어지지 않고 조금씩 여러 차례의 절구질 끝에 마침내 한 덩어리의 메주가 된다는 말씀이었다. 먼저 찧어지거나 나중에 찧어져도 결국은 한 덩어리로 되는 것이었다.

“사람들 수명이 다 같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 같은데...... 사람마다 다 같을 수가 없으니 다 다를 수밖에. 하지만 그 차이는 하느님 눈에는 큰 차이가 아니래. 땅에서는 십년하고 백년하고 차이가 크지만 영원한 하늘나라에선 내나 매한가지야.”

인호는 루시아의 설명을 어느 정도 알아들으면서도 하늘나라는 아직 아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숨은 뜻이 있을 것이란 생각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들은 내일 있을 주일학교 성탄 축제로 화제를 돌렸다. 루시아는 성탄 연극에서 가장 비중 있는 성모 마리아 역할을 맡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호흡을 가다듬더니 방 한가운데에서 무릎을 꿇고 리허설에 들어갔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예수 잉태 소식을 듣고 마리아가 하느님께 응답하는 연극의 첫 장면이었다. 루시아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고 또렷하게 귀에 쏙 들어왔다. 루시아가 성모님 역을 맡게 된 게 절로 수긍이 갔다. 세실리아는 크리스마스 캐럴 합창으로 무대에 오르기로 되어 있었고 인호는 동방박사 세 사람이 나오는 장면에서 몰약을 예물로 드리는 박사 역할을 받았다. 인호는 세실리아와 같이 캐럴 합창을 하고 싶었는데 매사가 자신이 바라는 대로 움직이진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연극은 안 해도 좋으니 노래를 하고 싶다는 자신의 의사를 수녀님께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씀드렸다. 수녀님은 잠시 미소를 짓다가 너무나 쉽게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동방박사가 세 사람인데 요한이 빠지면 안 되지. 합창단은 한 사람 더 있어도 될 것 같은데........ 그 대신 합창 연습 부지런히 하는 거다, 자신 있지?”

“자신 있어옛! 수녀님, 고맙습니다!”

인호는 뜻이 이루어지는 기쁨에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어른들이 돌아올 때가 되어갈 즈음 세실리아가 먼저 졸음에 겨운 눈빛을 했다. 인호가 제 방으로 간다며 일어서려 하자 어느새 졸음이 달아난 표정으로 세실리아가 가지 말라고 말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시아는 달랐다.

“그래. 세실이 잠 오는 모양인데 요한이도 건너가 자라. 내일, 아니 이제 오늘이지, 연극도 하고 노래도 부를 건데 더 늦기 전에 자는 게 좋겠다.”

“언니, 아까 엄마가 가면서 같이 있으라 했는데 오빠도 같이 자면 안 돼?”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세실리아의 제안에 인호는 가슴이 콩닥거렸다.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인호를 바라보았다.

“혼자 자기 무서우면 여기 좀 누워 있든가. 이모 곧 오실 거야.”

‘혼자 자기 무서우면’이란 조건을 단 루시아의 말이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 말만 없었어도 인호는 은은한 향기가 감도는 방 한쪽에 잠시 누울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면서 두 자매에게 눈길을 나눠보냈다.

“누나가 뭘 모루네. 나는 맨날 혼자 자는 사람이야. 둘이 무서워할까봐 내가 같이 있어준 긴데. 그냥 가께, 세실이 잘 자. 누나도 잘 자고.”

‘오빠도 잘 자. 굿나잇!”

“응, 고마워. 우릴 지켜줘서. 누나라 불러준 것도 마음에 든다.”

두 자매가 문을 나서는 인호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바로 그때 대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인호는 쫓아가 대문을 열었다. 이모와 안나 아주머니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한 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이정식은 경숙의 집 앞까지 트럭을 몰고 왔다. 서울에서 화물을 싣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인호를 부산으로 데려가 신정 연휴를 함께 보냈으면 한다는 의사는 이미 경숙에게 전해져 있었다. 경숙 또한 새해를 인호와 맞이하고 싶었지만 그건 동생 내외를 생각하지 않은 욕심이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덕희는 경숙이 인호와 함께 오기를 원했지만 경숙은 주문 받은 한복 일감을 이유로 사양했다. 이정식은 경숙에게 줄 선물로 꿀을 한 병 들고 왔다.

“처형, 처형 덕분에 저희 식구 잘 지내고 있심더. 지가 하는 일도 잘되고 있구요, 요샌 양장점도 마니 바쁘다카네요.”

“이서방이 잘하이까 다 잘되는 기지요. 내외지간이 열심히 사는 기 보기 좋심더.”

갈 길이 바쁜 이정식은 안채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경숙이 건네주는 홍차를 한 잔 마시고 바로 일어섰다. 이정식이 인호를 트럭의 조수석에 태우자 경숙은 곶감을 담은 종이봉지를 인호에게 내밀었다.

“가서 준호랑 먹거래이.”

“이모, 두 밤만 자고 오께.”

인호가 가는 모습을 보려고 루시아와 세실리아도 대문 밖으로 나왔다.

“요한, 잘 갔다와.”

“요한 오빠! 빠이빠이.”

인호는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멀어지는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트럭이 큰길로 나와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아무 말 없이 운전하던 이정식이 못마땅한 기운이 서린 헛기침을 뱉더니 인호에게 물었다.

“아까 걔들이 니 보고 뭐라 카던데, 니 이름 바꾼 거 아이제?”

인호는 아버지가 요한이란 세례명을 두고 하는 말임을 바로 알아차렸다.

“내 이름 말고, 성당에서 부르는 본명이 따로 생겼어예. 요한이라고.”

“글나. 요한이라, 성당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이거제. 성당 댕길 만은 하고?“

“잘 댕기고 있어예. 성당에서 아부지, 엄마, 준호 생각함시로 기도도 하고 그란다 아입니꺼.”

“기도? 아이구, 우리 인호가 기도를 한다꼬? 그라이까 이 아부지 일이 술술 잘 풀리는갑다. 우리 가족 잘 살게 해달라꼬 인호가 기도해주는구나.”

이정식은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오른손을 인호의 왼 무릎에 얹어 잠시 도닥거렸다. 인호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물론 가족이 잘 살게 해달라는 마음도 깔려 있었지만 인호의 기도는 가족 모두 일찍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살 수 있도록 보살펴주시고 하느님 품으로 인도해달라는 것이었다. 낮이 짧은 시기라 해거름에 노을이 진 하늘은 어둠의 장막을 드리우고 있었다.

덕희는 저녁식사 준비를 해놓고 이정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니 이정식과 함께 올 큰아들 인호를 기다렸다. 생활이 안정되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인호를 어린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살도록 두는 것이 못내 안쓰러웠다. 하지만 더러 섭섭하기도 했는데 인호가 그곳이 좋아서 제 발로 간 것처럼 잘 지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후 일곱 시가 지나서야 밖에서 트럭이 멎는 소리가 들렸다. 덕희는 쏜살같이 나가 트럭에서 내려오는 인호를 두 팔을 벌려 안았다. 그 사이 키도 전보다 더 크고 묵직해진 것 같았다.

“엄마!”

“아이고, 그래. 내 새끼! 엄마 안 보고 싶더나?”

“보고 싶어도 참았지 뭐.”

“엄마도 인호 보고 싶은 거 마니 참았데이.”

그 사이 준호도 달려나왔다.

“형아! 어서 온나. 내 억수로 기다맀다 아이가.”

“그래! 나도 니하고 놀라꼬 빨리 오고 싶었데이.”

준호는 형이 건네주는 종이봉투를 받아들고 곶감인 걸 확인하며 좋아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들 앞에서 인호는 행복했다. 그리고 부산으로 오는 차 안에서 가졌던 생각, 자신이 대구로 가게 된 게 다 하느님의 인도였다는 데 대한 감사 기도를 올렸다. 하느님을 알게 되고 성탄절에 맞춰 받은 세례는 대구에 가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인호는 그로 인해 자신이 분명 특별해졌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는 가족들에게도 좋은 일이 될 거라는 자부심마저 갖게 했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인호는 이모와 하던 대로 성호를 긋고 식사 전 기도를 입속말로 올렸다. 식사 내내 인호에 관한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밥 먹을 때마다 기도하는 모양이지. 성당이 교육은 잘 시키구만.”

이정식의 말에 덕희가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입장에서 덧붙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잘 때까지 계속 기도라예. 인호 니도 그 많은 기도 다 외우나? 그 중에서 주기도문인가 하는 기 들어보이 괜찮더라. 엄마는 니가 하는 기도 한번 들어봤음 좋겠다.”

“그래, 나도 함 들어보자. 우리 아들이 기도 얼마나 잘 하는지.”

이때다 싶어 준호도 끼어들었다.

“형아, 나도 기도 가르쳐주봐라.”

“그래. 밥 다 묵고 나서 가르쳐주께.”

덕희가 저녁 설거지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던 이정식은 인호에게 기도할 것을 재촉했다.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 속에 무슨 문제점이 있는 건 아닌지 확인도 해볼 심산이었다. 이정식에겐 외국에서 들어온 종교가 우리 고유의 풍속과 마찰을 일으킨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만약 자신의 기준에서 어긋나는 기도 문구가 있다면 간과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그는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별도로 요한이라는 엉뚱한 이름을 붙여준 것부터 탐탁하지 않았다. 인호가 두 손을 모우고 눈을 감자 주변은 정적에 휩싸였다. 인호의 입에서 주기도문이 흘러나왔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그 나라가 임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눈을 잠시 감기도 하면서 아들을 바라보던 이정식은 기도가 끝나자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쳤다. 아버지를 하늘에서 찾는 첫 구절이 귀에 다소 거슬리긴 했지만 감정이 상할 정도는 아니었고, 꼭 집어서 흠잡을 데 없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듣고 있으니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마주앉아 경청하던 덕희 또한 웃으며 박수를 쳤고 준호도 덩달아 박수치느라 신이 났다. 인호는 예상하지 못한 박수 소리에 겸연쩍게 웃었다. 덕희가 먼저 인호를 칭찬했다.

“뉘 집 아들이고? 글자 하나 막히는 거 없이 우찌 그리 잘 외우노. 나도 니 이모가 하는 기도 자주 들어봤지만 무슨 소린지 반은 못 알아듣겠더마는 인호가 한께 고마 귀에 속속 들어온데이.”

이정식은 이왕 이렇게 된 자식을 보다 관대하게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정리하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다 좋은 말씀이다. 하늘에 계신 아부지 하느님도 인호를 보살피주시고, 땅에 있는 이 아부지도 내 자식들 딱 지키주고 있으이 우리 인호 걱정할 끼 하나 업따. 공부만 열심히 하믄 된데이. 준호도 마찬가지고, 알겠제!”

두 아들을 번갈아 바라보는 이정식의 눈빛이 흐뭇해졌다. 준호가 제 차례가 왔다고 생각하고 인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형아, 우리도 쪼매 있으믄 부자 될 끼데이. 아부지 돈 마니 벌거등. 인자 우리도 쭉 같이 살 게 될 끼다.”

이정식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알아서 척척 대신하는 준호가 대견스러운지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새해 아침이 밝았다. 이정식은 전날 싣고 온 화물을 부리기 위해 시간에 맞춰 부두로 나갔다. 새해 첫날이라 부두는 한적했다. 이정식은 다음날 서울로 싣고 갈 물량을 확인한 다음 곧장 집으로 왔다. 그는 온 가족이 남포동 시내로 나가 새해를 함께할 계획을 짜놓고 있었다. 갈 때는 전차를 타기로 했다. 전차역이 있는 공설운동장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인호는 지난해 겨울 친구들과 동전을 주우러 다니던 날들을 생각하며 혹시 그들을 만날 수 있을까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포동에서 점심을 들기 위해 중국음식점을 찾았다. 이정식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짜장면과 탕수육을 주문했다. 아이들이 식사 전 기도를 할 동안 어른들은 잠시 기다려주는 모습을 보였다. 준호는 이미 인호로부터 성호 긋는 법을 익혀 두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백화점 구경을 하면서 백화점 옥상과 연결된 용두산 공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원에는 사진사들이 사진 찍기를 권했다. 그러지 않아도 이정식은 가족사진을 갖길 원했다. 아직까지 네 사람이 다 함께 찍은 사진이 없었다. 이정식은 기념사진을 찍는 명소 중의 하나인 꽃시계가 있는 곳으로 가족을 이끌었다. 사진을 찍은 다음 공원에서 대청동 쪽으로 내려와 국제시장을 들렀다. 아이들에게 겨울 잠바 하나씩 사주기 위해서였다. 모처럼의 나들이는 즐거운 쇼핑으로 마무리하고 돌아오는 길엔 택시에 몸을 실었다.

그날 밤 시내 구경하느라 많이 피곤했는지 준호가 먼저 잠에 빠져들었다. 인호도 그 옆에 누웠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늘 자던 제 방이 아니라 그런지 잠자리가 편치 않았다. 세실리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마 후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인호는 이모와 손잡고 어디론가 가는 길이었다. 어느 외딴집이 보이고, 그곳에서 뜻밖에 세실리아가 나타났다. 인호가 반가워 이름을 부르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곧바로 세실리아가 있는 쪽으로 쫒아갔는데 눈 깜빡할 새 어디로 갔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돌아보니 이모도 보이지 않았다. 큰소리로 이모를 부르려 했지만 역시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두루 사방을 살펴보자 어느새 집도 사라지고 텅 빈 사막 같은 공간에 제 혼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인호는 잠결에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를 의식하고 꿈을 꾸었음을 깨달았다. 미닫이 문틈으로 덕희와 이정식이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마치 최면을 거는 듯 인호를 다시 깊은 잠 속으로 인도했다.

 

이광 시인

◇ 이광 시인 : ▷200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부산시조 작품상, 이호우 시조문학상 신인상, 나래시조문학상 수상 ▷시조집  《당신, 원본인가요》, 《소리가 강을 건넌다》, 《바람이 사람 같다》, 현대시조 100인선 《시장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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