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광 장편소설】 「팽이의 시간」(6) - 제2장 유년, 그 꿈 같은 날들

2. 유년, 그 꿈 같은 날들

이광 승인 2023.04.21 13:55 | 최종 수정 2023.06.26 15:22 의견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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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왔다. 인호는 5학년이 되었다. 봄볕이 머무르는 감나무 가지에 새순이 돋아나 있었다. 경숙이 간식거리로 감자를 쪄 안나네를 안채로 불렀다. 경숙과 안나는 대청에 앉았고 인호는 세실리아와 마루턱에 걸터앉아 감자를 먹었다. 루시아는 일류로 첫손꼽는 여중 입학시험에 장학금을 받는 성적으로 합격했고, 중학생이 된 후 하교가 조금 늦어졌다. 루시아가 공부를 잘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경숙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의견을 안나에게 피력했다. 

“루시아가 공부를 잘하이 세실리아도 언니 본받아 공부 잘하겠네. 안나, 애들이 다 같이 공부하도록 해주믄 어떠까? 인호 방에서 셋이 같이 공부하면서 루시아가 동생들 공부도 돌봐주믄 좋을 낀데.”  

“좋은 생각이네요. 루시아가 곧잘 세실리아를 가르쳐주는 것 같더라고요. 시키지 않아도 지가 알아서 공부도 하고 동생도 챙기고 있으니 그거 하나는 걱정 안 해요.”

안나는 경숙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큰딸 칭찬도 놓치지 않았다. 인호는 세실리아와 제 방에서 같이 공부하게 된다는 사실에 손뼉을 치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세실리아를 바라보니 그녀도 생글생글하며 어른들의 결정에 만족하고 있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날부터 저녁식사 전후로 아이들이 같이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경숙은 인호의 앉은뱅이책상은 루시아가 쓰게 하고, 방 가운데 큰상을 펴서 인호와 세실리아가 마주앉아 공부하도록 배치했다.

루시아가 학교를 마치고 왔다. 인호가 보기에 중학생이 된 루시아는 전에 비해 키도 훌쩍 컸지만 훨씬 똑똑해진 것 같았다. 국민학교 때완 달리 교복을 입은 모습은 저보다는 좀 더 위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호는 루시아를 깍듯이 누나라고 불렀다. 전에도 상황을 보아가며 선심 쓰듯 누나란 호칭을 쓰긴 했는데 이젠 누나라 부르는 게 마음이 편했다. 셋 모두 인호의 방에 모여 앉았다. 안나로부터 동생들 공부를 도와주라는 뜻을 받은 루시아는 우선 인호와 세실리아에게 학교 숙제부터 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제 공부에 열중하면서도 가끔 곁눈으로 동생들을 살폈다. 숙제를 하다가 장난기가 발동한 인호는 큰상 밑으로 발을 뻗어 세실리아의 무릎을 툭 건드렸다. 세실리아는 인호를 바라보며 웃음을 참느라 손가락으로 입술을 꾹 누르고 있었다. 인호가 루시아의 눈치를 보느라 발을 일단 거두자 이번에는 세실리아의 발이 장난을 걸어왔다. 그러자 인호는 상 밑으로 재빠르게 손을 넣어 세실리아의 발바닥을 간질였다. 세실리아가 참지 못하고 키득거리자 루시아는 연필 쥔 손을 치켜들고 엄포를 놓았다.

“숙제 다 했어? 자꾸 장난치면 밖으로 쫓아낸다!”

세실리아가 먼저 자세를 고치고 숙제를 계속했다. 인호도 장난기는 눌러놓고 남은 숙제에 집중했다. 얼마 후 세실리아가 숙제를 마치고 연필을 놓으며 ‘끝’이란 소리를 들릴까말까 한 입모양으로 전해주었다. 인호는 조금 남았다는 뜻으로 손을 들어 엄지와 검지 사이를 살짝 띄워 보였다. 그리고 눈싸움을 하자고 세실리아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또래들이 자주 하는 눈싸움이라 세실리아도 빙그레 웃으며 바로 응했다. 서로 상대를 향해 똑바로 쳐다보고 누가 오래 견디는지 겨루어서 먼저 눈을 깜빡이는 쪽이 지는 것이었다. 승패를 떠나 세실리아의 눈빛 속에 자연스럽게 머물 수 있다는 게 참 좋았다. 일 대 일로 승부가 가려지지 않았는데 루시아가 그들 곁으로 왔다. 숙제를 다 했는지 묻는 말에 세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인호는 곱셈 문제 몇 개 남은 것을 마저 해야만 했다. 루시아는 숙제를 검사한 다음 틀린 부분을 지적하고 왜 잘못되었으며 어떻게 해야 바른 답을 구하는지 알려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제대로 숙지했는지 확인하는 과정까지 교사와 다름없는 역할을 수행했다. 경숙이 함께 공부한 첫날의 소감을 묻자 루시아는 생각을 잠시 간추리더니 똑 부러지게 말했다.

“요한이 산수가 좀 약한 거 같아요. 문제집 사놓은 거 손도 안 댔던데 그거만 다 풀어도 실력이 늘 거예요. 제가 알아서 시킬게요.”

루시아의 말투가 믿음직스러워 경숙은 흡족한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날 인호는 루시아가 표시해둔 데까지 산수 문제집을 풀어야 했다. 숙제가 더 생겼다는 사실이 짜증스럽진 않았다.

 

주일학교에서 어린이날을 맞아 수성못으로 소풍을 갔다. 풀밭 같은 하늘에는 양떼구름이 모여 있었고, 그 아래 한 부분을 솔개가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저학년 어린이들은 청백으로 팀을 나누어 엄마들과 릴레이 달리기 시합을 가졌고 비석치기 같은 놀이를 했다. 4학년 이상은 닭싸움을 했는데 인호는 첫 상대가 워낙 강자라 초반에 무너졌다. 그는 세실리아 앞에서 개선장군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잠시 후 세실리아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는 패자를 응원하는 소리 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닭싸움을 마치고 보물찾기가 시작되었다. 주일학교 교사 몇이 산문에서 봉수대가 있는 데까지 상품이 적힌 색종이 쪽지를 군데군데 숨겨두었다. 그들은 보물을 찾아나서는 학생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시간은 충분히 줄 테니까 샅샅이 찾아 봐. 보물 있을 만한 데는 표가 나.”
“육학년 남학생들은 봉수대까지 쭉 올라간 다음 내려오면서 찾기다.” 
“길이 나 있는 주변에서 찾아. 안으로 너무 들어가진 말고.”

인호는 닭싸움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반드시 보물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발 빠르게 움직였다. 예전 동전을 주우러 다녔을 때의 눈빛을 되살려 바위틈이나 길섶의 풀잎 사이를 톺아나갔다. 여기저기서 보물 쪽지를 찾아낸 아이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인호가 중턱 부근에 다다랐을 때 청미래덩굴 밑동 옆으로 큰 돌멩이가 드러누워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돌멩이를 들추어내자 노란색종이로 접은 쪽지가 나타났다. 쪽지를 펴보니 ‘연필 한 다스’라고 적힌 굵은 글씨가 반겨주었다. 인호는 속으로 함성을 지른 다음 세실리아를 찾았다. 보물을 보여주면 세실리아가 환하게 웃을 모습이 그려졌다. 아래로 내려가니 좌우를 번갈아보며 한 걸음씩 올라오고 있는 세실리아가 보였다. 인호는 반원을 그리며 빙 돌아서 세실리아의 뒤쪽으로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서려는 세실리아의 등 뒤에서 인호는 양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렸다.

“요한 오빠?”

눈을 가린 손의 임자를 바로 알아차린 세실리아는 인호의 손을 떼어내려던 팔을 내려 그의 넓적다리를 살짝 꼬집는 시늉을 했다. 

“오빤 보물 찾았나 보네.”

인호는 정체가 금방 탄로 난 게 싱겁긴 했지만 기분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찾았께? 못 찾았께? 알아맞차 봐.” 

세실리아는 인호의 표정에서 보물을 찾았음을 확신했지만 대답 대신 그를 요리조리 살피며 부러 머뭇거렸다. 인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보물 쪽지를 내밀었다.

“쨘!”
“와! 찾았네. 오빠 신났겠다! ”
“연필 한 다스데이. 니 가지라.”
“아니, 왜? 오빠 거를.”
“첨부터 니 줄라꼬 찾은 기다. 받아.”

세실리아는 쪽지를 받아 쥐고 감사의 표시로 보조개가 피어나는 미소를 만들어주었다.

“오빠는 참 착하다. 나도 보물 찾아서 오빠한테 선물 하면 좋겠다.”

둘은 계속 보물찾기에 나섰다. 시간이 지나 보물을 찾았다고 잔뜩 신이 난 외침도 잠잠해졌다. 아무래도 육학년들이 수확을 많이 거둔 것 같았다. 보물찾기를 마치자 참가한 학생들 모두에게 공책 한 권씩 돌아갔고 쪽지에 적힌 상품도 전달되었다.

점심은 주일학교 어머니회에서 김밥으로 준비했다. 김밥을 나누어주는 어머니회 일행 속에 안나 아주머니가 보였다. 인호는 그 속에 이모가 없다는 사실을 그냥 무심히 넘길 수 없었다. 애초에 경숙이 주일학교 어머니회 활동 여부를 인호에게 떠본 적이 있었다. 그 때 답변을 얼버무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엄마와 다름없는 이모였지만 엄마는 아닌 건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이모는 어머니회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번 소풍에 같이 가잔 말을 했더라면 이모도 함께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그 말을 하지 못한 것이 마음을 몹시 무겁게 했다. 
 집에 돌아오니 빨랫줄에 빨래가 널려 있었다. 대부분 인호가 벗어둔 옷가지들이었다. 경숙은 안방에서 만두를 빚고 있었다.

“소풍 재밌더나?”
“응, 근데 이모는 심심했겠네.”
“아니, 이모는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바빴데이. 지금은 또 요래 만두 만들고 있다 아이가. 어린이날 만두 파티 할라꼬 말이다.”
“만두, 맛있겠데이. 세실리아 식구도 부르겠네?”
“하모. 다들 마니 묵고 오늘도 같이 공부하거래이.”

인호는 점심때 김밥을 먹으면서 이모에게 얘기해주려 했던 말을 꺼냈다.

“인자 이모도 주일학교 어머니회 나온나.”
“와, 누가 뭐라카더나?”
“가마이 생각하이까 그기 좋을 꺼 같아서...... 이모는 안 좋나?”
“조치, 조타말고. 우쨌든 우리 요한이가 나오라카는데 앞으로 어머니회 꼭꼭 나가꾸마.”

경숙은 만두를 빚던 손이 아니었다면 인호의 어깨를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인호에게서 자신을 배려하는 마음이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만두 파티를 하려고 다들 모이기 전 세실리아가 인호 방문을 두드렸다. 그녀의 손엔 연필이 두 자루 쥐어져 있었다. 연필심이 쓰기 좋게 잘 깎인 새 연필이었다. 

“이거 오늘 오빠가 준 쪽지로 받은 연필이야. 더 필요하면 말해. 내가 또 깎아 줄게.”

인호는 세실리아가 내미는 연필을 받아들고 사소한 것이라도 서로 나누면 마음속에서 뭉클한 기쁨이 가득 차오른다는 걸 알았다. 맛있는 만두를 배불리 먹었을 때처럼 바로 그러한 마음의 포만감이 일상에서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 그는 잘 배우고 있었다.

 

이광 시인

◇ 이광 시인 : ▷200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부산시조 작품상, 이호우 시조문학상 신인상, 나래시조문학상 수상 ▷시조집  《당신, 원본인가요》, 《소리가 강을 건넌다》, 《바람이 사람 같다》, 현대시조 100인선 《시장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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