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광 장편소설】 「팽이의 시간」(14) - 제4장 끝이 보이는 곳에서의 출발

4. 끝이 보이는 곳에서의 출발

이광 승인 2023.06.19 09:53 | 최종 수정 2023.06.26 15:26 의견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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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년이 되어 인호는 특수반 일원이 되었다. 특수반은 담임이 이원체제로 체육선생과 교련선생이 짝을 이루었다. 조례는 체육선생이 맡고 종례는 교련선생이 맡았다. 체육선생은 별명이 메뚜기였고 교련선생은 꼴뚜기라 학생들은 뚜기 형제라 불렀다. 체육선생은 축구부 감독도 겸해 타 지방 경기에 선수들을 인솔하기도 했는데 그런 날은 교련선생이 조례까지 맡았다. 육군 대위로 예편한 교련선생은 별명처럼 긴 세모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민간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군에서 하던 식대로 구보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교련 시간엔 제식훈련은 간단히 하고 학생들에게 운동장 열 바퀴를 도는 구보를 시키며 그도 함께 뛰었다. 특수반 학생들은 담임이라 불평은 삼갔지만 일반반 학생들 사이에서 불만이 자주 튀어나왔다.

“아니, 저 뚜기는 교련선생이야? 체육선생이야?”

그 소리를 들은 특수반 반장인 배도혁이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누고? 우리 샘한테 불만 있어도 참아라. 구보가 보약이란 말 안 들어봤나?.”

배도혁은 동급생에 비해 두 살이나 나이가 많았다. 재수를 해서 고교 진학을 한데다 지난해 삼개월간의 무단결석으로 삼학년으로 오르지 못하고 특수반에 들어왔다. 그의 말에 의하면 하루빨리 인생의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어 해병대를 지원했는데 면접에서 떨어졌다고 했다. 해병대 꿈이 무산된 것은 바로 자신의 학생신분 때문이란 판단으로 자퇴를 감행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큰 병원에서 청소일을 하며 아들을 교육시키는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가 있었던 것이었다. 교련선생이 그를 반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그에게 3사관학교에 관한 정보를 주며 진로를 제시해주자 배도혁은 새로운 인생설계를 할 수 있었다.

특수반 학생 육십오 명중 삼분의 이 가량이 특기생이었다. 축구부, 농구부, 핸드볼부 등 체육 특기생이 주를 이루었고, 미술부와 밴드부 소속의 특기생도 있었다. 체육특기생들은 대부분 오전 수업만 했다. 그들은 주로 뒷자리에 배치되었는데 오후 수업시간이 되면 뒷자리는 거의 비었다. 시합을 앞두었을 땐 맹연습을 위해 오전부터 소집되는 날도 빈번했다.

인호의 짝은 육상 특기생인 노상원이었다. 상원은 중학교 때만해도 남달리 일찍 발달한 신체로 주목받던 유망주였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성장을 다했는지 보통의 체격조건에 머물렀고 육상 백 미터 자신의 기록을 더 이상 향상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영점일 초를 앞당기는 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에 하나라고 했다. 일 년을 노력하여 얻어낸 것이 영점일 초였다. 이학년부터 그는 근력 강화 훈련에 들어갔다. 단거리에서 투포환이나 투창으로 종목을 바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팔 길이만한 무거운 강철봉을 구해 신문지에 말아 들고 다녔다. 계속 들고 다니면 점점 가벼워질 거라고 했다. 인호가 들어보았더니 큰 아령보다 몇 갑절은 더 무거웠다. 인호는 그가 종목을 바꾸어 대성하길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독일어 첫 수업이 있는 화요일 오후였다. 독일어 담당은 인호가 일학년 수업시간에 릴케의 시집을 읽다가 들켰을 때 별말 없이 가벼운 꿀밤을 때린 선생이었다. 그는 인호를 바라보더니 저 녀석도 여기 왔네 하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그는 특수반 학생들에게는 특수한 교수법을 적용하려 했다. 그의 뜬금없는 질문은 학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독일어 포기한 사람? 손 들어봐. 일 년간 해봤으니 다들 알 거 아냐.”

학생들이 손을 들까 말까 눈치를 살피는 사이 그는 포기한 학생 수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독일어 포기한다고 섭섭해 않을 테니까 포기할 사람은 일찍 포기해라. 그렇다고 잠잘 생각은 마라. 점심 막 먹고 졸기 좋은 시간이지만 선생님 세워놓고 주무시면 내 체면은 말이 아니지. 한자를 쓰든지 영어단어를 외우든지 수학문제를 풀든지 알아서 하고, 가끔 멍하니 한눈 파는 것도 허용해주는데 주무시는 건 못 봐준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선생의 자유로운 수업 방침에 학생들은 일제히 “예”라고 대답했다.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고등학생인데 이히 리베 디히 정도는 알아야 안 되겠나. 칠판에 써놓을 테니 한 시간에 한 문장씩은 자기 것으로 만들어라. 나도 놀 순 없으니 수업은 진행한다. 단 한 명을 위해서라도 수업은 해야지. 진도는 일반반보다 천천히 나갈 테니 따라올 사람은 따라오고 뜻이 없는 사람은 오늘 이 시간부터 자기가 원하는 공부를 해라. 그리고 다른 과목이라도 모르는 게 있으면 손을 들어. 내가 아는 데까지 가르쳐줄 테니까.”

인호는 선생의 방침이 특수반의 실정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학년이 되면서 수업시간에 시집이나 소설책을 읽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제 2외국어인 독일어까지 챙기기 버거운 인호는 독일어 대신 영어 교과서를 꺼냈다. 그리고 영어사전을 뒤적이며 독일어 시간을 나름 알차게 보냈다.

새 가정교사가 정해졌다. 하석진이라고 하는 부산의 국립대학 법학과 이학년생이었다. 그는 집이 김해에 있어 입주 가정교사를 희망했는데 덕희 또한 원하는 바였다. 하석진은 지난해 입주했던 가정의 학생이 대학 진학을 한 이후 김해에서 먼 거리를 통학하고 있었다. 덕희는 그에게 이층 빈방을 내어주었다. 교습은 인호의 방에서 주말을 제외하고 하루 두 시간 정도 하기로 했다. 덕희는 그를 하군이라 부르며 학교에서 돌아온 인호에게 소개했다.

“인호야, 하군도 천주교 신자란다. 오늘부터 집에서 자기로 했으니 둘이 잘해봐라.”

그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과 둘이 잘해보란 말까지 남긴 엄마의 목소리가 인호에게 평소보다 더 살갑게 와 닿았다.

“인호, 반갑다. 어머님 말씀대로 둘이 잘해보자.”

하석진이 악수를 청하자 인호는 바로 그의 손을 잡았다.

“반갑습니다.”

“형으로 편안하게 대해주면 좋겠다.”

“네. 공부는 언제 시작할 건가요?”

“오늘부터 우선 저녁식사 전에 삼십 분이라도 하자. 그 삼십 분의 공부가 식사하는 동안 머릿속에서 소화가 되면 한 시간 공부한 효과가 있거든. 식후 삼십 분 정도는 휴식하는 게 좋겠고, 그 다음에 한 시간 반 정도 하는 걸로 하자. 도중에 잠깐 쉬기도 하고.”

석진이 웃는 얼굴로 말을 마치자 인호 역시 웃으면서 그의 의견에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았다. 첫날이라 식전 삼십 분은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대화의 시간이었다. 석진은 세례명이 안토니오였고, 가족 모두가 신자였다. 인호는 시를 쓰는 작가의 꿈을 가지곤 있으나 아직 꿈에 대한 확신은 서지 않는다고 했다. 석진은 법대생이라 당연히 사법고시를 목표로 했지만 마음속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재작년 있었던 판사들의 집단 사표는 그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책에서 배운 삼권분립은 허명에 불과했다. 현재의 유신체제 하에서 법조계 진출에 회의를 느낀 그는 아직 자신의 진로에 확고한 목표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부모가 간절히 바라는 법관의 길보다 법학자로서 학문을 택하려는 그의 고민을 인호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정식이 퇴근하여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그 역시 하석진의 첫인상을 좋게 보았는지 호쾌한 목소리로 그를 환대했다.

“반가와요, 하선생.”

“아버님, 그냥 하군이라 불러주십시오.”

“아니, 당연히 하선생이라고 불러야지.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는데 신뢰가 가는구만. 우리 인호 잘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건데 절 하군으로 불러주시면 훨씬 편하겠습니다.”

“정 그렇담 하선생. 아니, 하군. 나는 말이지, 인호가 상대로 가서 경영학을 배우면 좋겠는데...... 우리 인호 대학 들어갈 때까지 애 써주게나.”

“네, 근데 제가 입영연기 중인데 내년에는 영장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현역 입영인가?”

"그렇습니다.”

“그렇담 할 수 없지. 대한민국 남자라면 군대는 가야지. 그럼 그때까지라도 잘 맡아주게. 좋은 인연이 되었으면 하네.”

식사 후 잠시 갖는 휴식시간에 인호는 성당에 가는 문제를 석진과 의논했다. 인호가 받아들이기론 둘이 잘해보란 엄마의 말엔 석진과 동행이라면 성당 가는 것도 개의치 않겠다는 뜻이 깔린 듯했다. 석진은 토, 일요일 양일간 자유 시간을 보장받았다. 토요일 김해 집에 가는 경우 월요일 대학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이번 주일에는 집에서 가져올 것도 있어서 김해를 갔다 와야 하기에 다음 주부터 성당을 같이 가자고 했다. 인호는 자유 시간으로 보장받은 일요일 저녁을 기꺼이 함께하겠다는 석진이 고마웠다. 그는 걸어서 삼십분 거리에 성당이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석진은 삼십분이면 걸으면서 생각에 잠길 적당한 시간이라며 산책과 사색은 사람이 동시에 할 수 있는 바람직한 일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는 말을 끝맺을 때면 환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석진은 고교 수학 일학년 총정리 문제집으로 인호의 실력을 점검했다. 인호가 어느 정도 수준에 있는지 감이 오는 듯 석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은 물리와 화학 과목의 참고서 문제를 가지고 인호의 수준을 가늠했다. 석진은 수학과 달리 물리와 화학은 기초부터 다시 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학습지도를 받는 동안 인호는 석진의 설명에 이런 걸 여태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학교 조례시간이었다. 담임인 메뚜기 박찬동 선생이 중대 발표를 했다. 올해 시월 부산에서 열리는 전국체전에 인호의 학교가 개막식 주요행사인 마스게임을 맡았다는 것이었다. 그의 학교가 학생 수 등 여러 조건에 맞기도 했지만 학교 재단의 적극적인 의사 표명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모양이었다. 학생들은 재단의 뜻에 따라 마스게임 행사에 동원되어야 했는데 그 일이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우선은 흥미롭게 받아들였다. 마스게임 총감독을 맡은 박찬동 선생은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선생님은 마스게임 관련자료 수집차 일본으로 출장을 간다. 지금까지 볼 수 있었던 그 어떤 마스게임보다 규모 있고 훌륭한 마스게임을 펼치는 게 교장 선생님의 바람이고 내 목표다. 여러분들도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요인들 앞에서 마스게임을 보여준다는 사실 자체를 영광으로 생각해라.”

박찬동 선생이 일본으로 출장을 떠나고 며칠 후 소풍날이 왔다. 소풍은 현 교육당국의 지시로 그 명칭이 행군대회로 바뀌었다. 학생들은 교련복을 착용하고 집결하여 이열종대로 성지곡 수원지를 걸었다. 수원지의 물은 비 온 후 많이 불어나 산기슭 낮은 곳의 나무들이 물에 잠겨 있었다. 지난해 붕괴되었던 구덕산 저수지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규모가 큰 수원지였다. 높고 커다란 둑이 가진 웅장한 규모 앞에서 오래전 저 둑을 하나하나 쌓았을 이름 모를 사람들의 노고를 상상해보았다. 수원지를 둘러싼 주변의 숲이 우거져 다른 고등학교에서도 행군을 나왔는데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점심을 먹고 학급 대항 노래자랑이 있었다. 네 명이 한 조로 나와 교련 시간에 배운 군가를 합창한 반이 예상대로 일등이었고, 특수반 대표로 나간 배도혁은 남진의 ‘님과 함께’를 불러 학우들의 호응을 끌어냈다는 평가로 이등을 차지했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인 꼴뚜기 교련선생이 후한 점수를 준 것도 한 몫 한 것 같았다.

다음 주 일요일이었다. 김해에서 오는 길에 친구를 만나고 들어온 석진은 인호와 함께 저녁미사에 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미사참례를 하게 되는 인호의 표정은 밝았다. 덕희도 관대한 태도로 인호가 성당을 향하는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그녀는 일학년 때와 확연히 달라진 인호가 여간 신통한 게 아니었다. 아들을 성당에 못 가게 하는 것보다 보내주는 게 공부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니 문제될 게 없었다. 저녁 미사를 앞두고 일찍 성당에 도착한 인호는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했다. 그간 미사에 빠진 것과 부실한 기도 생활, 그리고 물리선생을 미워하며 그의 뒤통수에 혼잣말로 욕설을 퍼부었던 일 등을 고백했다. 성찬의 전례가 시작되자 주님과 일치를 갈구하는 인호의 영혼은 ‘구하라, 받을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씀이 제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체험했다. 일 년 만에 성체를 모시러 제단 앞으로 나가는 대열에 설 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자 다니엘 신부가 반겨주었다.

“오, 요한. 드디어 돌아왔군요. 부모님이 성당 나오는 걸 허락하신 건가요? 주님께서 요한의 기도를 들어주신 겁니다.”

성당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석진은 오늘 낮에 만난 그의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 친구는 석진의 고교 동창으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그 친구의 이름은 동생 준호와 같은 성준호였다. 국립대 행정학과 학생으로 학교 내 독서회 운동에 적극 간여하고 있었고 그러한 모임을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석진 또한 부산지역 대학 독서회의 주축으로 신입생들 사이에서 회원 대상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들은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를 구독했고 진보 지식인들의 글을 읽었다. 광복 이후 잘못된 역사관의 정립과 참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청년들이 앞장서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감으로 무장하면서 아직은 수면 위에 떠오르지 않은 채 내부의 역량을 모으고 있었다.

성당을 함께 다녀온 시간은 두 사람의 유대를 더욱 단단하게 묶어주었다. 석진은 인호에게 자기 방으로 놀러오라고 했고 인호는 그날 밤 바로 석진의 방문을 두드렸다. 예전 이모가 와서 하룻밤 묵었던 곳으로 인호가 가끔 들르곤 하던 방이었다. 인호의 방보다 더 넓고 이층 베란다로 나가는 문도 있었다. 베란다에서 정원과 담 너머 거리를 바라보는 것이 제 방에서 창을 통해 보는 것보다 시야가 훨씬 넓어 그는 가끔 그곳에서 사색에 잠기곤 했다. 석진은 책상에 앉아서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인호를 맞았다.

“형, 책 읽는데 방해한 거 아니에요?”

“천만에. 안 그래도 인호 올까 싶어서 기다렸지.”

석진은 웃으면서 의자에서 일어나 몇 걸음 옮겨 벽에 기대앉았다. 석진이 침대를 원치 않아 방안의 가구라곤 책상뿐이었다. 옷과 침구를 넣어두는 벽장이 한 쪽 벽에 붙어 있어 단출하다기보다 설렁한 느낌이 드는 방이었다. 인호는 석진이 보던 책에 눈길을 주었다.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이었다. 성당에서 돌아오면서 나눈 대화 속의 독서회가 보는 책 중 하나 같았다.

“인호도 여기 기대앉지.”

인호는 책에서 눈을 떼며 그 옆으로 갔다.

“형, 나도 저 책 읽어봐도 되요?”

인호가 호기심을 표하자 석진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긍정도 부정도 아닌 웃음을 머금었다.

“물론 읽어도 되지만 괜히 머리만 복잡해질걸. 대학 들어가면 얼마든지 볼 수 있으니 그때까지 미루는 게 좋겠는데.”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형이 하는 독서회에 관심이 가네요.”

“독서회 얘기 일단 꺼내놨으니 다음에 종종 들려줄 기회가 있을 거야. 오늘은 다른 이야기를 하자. 아버님께선 널 상대로 보냈으면 하시던데 인호 네 생각은 어때?”

“형, 우리 베란다로 나가서 이야기해요.”

“그럴까.”

인호는 벽에 기대앉는 것보다 바깥공기를 접하며 대화를 즐기고 싶었다. 둘은 베란다로 나갔다. 마당에서 코리가 그들을 발견하고 꼬리를 흔들었다. 인호도 손을 흔들어 코리의 인사에 응해주었다. 밤하늘엔 별들이 자기들의 인사도 받아달라며 반짝이고 있었다. 예전 세실리아와 함께 평상에서 별을 보던 밤이 생각났다. 인호가 먼저 베란다 난간에 손을 짚고 서자 석진이 그 옆으로 다가섰다. 둘은 자연스럽게 밤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형, 같이 별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건 행복한 거예요.”

“그래, 정말 그런 거 같네. 인호 말을 듣자마자 내가 바로 행복해지는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가끔 혼자서 별을 바라보긴 했어도 누구랑 둘이 나란히 서서 별을 본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아. 그건 그렇고, 아까 하던 얘긴데 아버지 말씀대로 대학을 상대로 갈 뜻이 있는지 궁금하구나.”

“구체적으로 생각 안 해봤어요. 아직 진로에 대해 고민 자체를 하지 않은 거죠.”

“이젠 고민할 때가 됐다고 봐. 우리 만난 첫날 시인이 되고 싶단 말을 들었는데 그렇다면 국문학과나 문예창작과가 맞을 텐데. 아버님이 반대하시는 건가?”

“말씀 드린 적은 없는데 그런 얘길 꺼내면 반대하실 게 뻔해요. 지금까진 진로 선택을 미루어 왔지만 결정을 해야 할 때가 왔단 말이죠? 현재 내 실력으론 상대 경영학과 쪽은 어림없을 거에요.”

“그거야 시간이 있으니까 앞으로 열심히 하기에 달렸지. 자기가 원하는 진로가 확실히 정해지면 집중력도 더 높아질 테고. 건데 현실은 자기가 원하는 진로보다는 성적에 맞춰 전공학과를 선택하는 것 같아. 그러니까 적성이 아니고 성적에 따라 진로가 정해진다 해야 되나?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지.”

“내 경우는 진로보다 성적 향상이 더 시급하겠지만 경영학과가 적성에 맞을지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시를 쓰기 위해 꼭 국문학과나 문예창작과를 택해야 하는지도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봐야겠어요. 결정은 차차 내리기로 하죠. 형은 대학에서 사귀는 여자 친구 있죠?”

갑자기 인호가 화제를 바꾸자 석진은 의외의 질문에 짤막한 답과 웃음을 던졌다.

“없어.”

인호는 의외의 답변이라는 듯 석진을 바라보았다.

“왜, 실망했니?”

“대학 가면 미팅도 하고, 축제 땐 파트너도 있어야 되고, 여자 친구 사귈 기회가 많지 않는가요?”

“기회야 많지만 나처럼 기회를 잡지 못한 친구들도 꽤나 있을걸. 볼수록 호감이 가는 여학생을 만나긴 했는데 아주 멋진 선배와 사귀는 걸 알고 조용히 물러났지. 인호는 대학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미팅인 모양이구나.”

“내가 그렇게 보여요? 나는 누가 미팅을 주선하겠다면 거절할 말까지 준비돼 있는데요.”

“오, 인호! 무슨 말로 거절하려고?”

“임자 있는 몸이라고요.”

“아니, 도대체 누군데 벌써부터 인호의 마음을 꼼짝 못하게 사로잡았지?”

“후훗, 내가 대구 있을 때 한집에 살던 동생 같은 친구에요. 세실이라고. 세례명이 세실리아예요.”

“세실리아, 세실이....... 어떤 친구인지 궁금하네.”

“지금은 사진이 없지만 다음에 만나면 사진 한 장 받아 올 생각이니까 그때 보여줄게요.”

“그래, 세실리아도 인호를 무척 좋아하는가 보네?”

“우린 서로 첫사랑이죠.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나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나 자신과 약속하고 또 그 약속을 내 마음속에서 계속 되새기고 있어요.”

“대단하구나. 자신과 약속하고, 그 약속을 위해 자신을 계속 확인하고...... 그런 게 아름다운 삶이지. 인호가 나보다 훨씬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네.”

“형도 그런 약속 하나 가지세요.”

“나도 내 삶에 약속한 게 있긴 있지. 인호와 세실리아가 아름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은 거. 궁극적으론 나를 위한 것이지만.”

석진은 마치 꼭 찾아야 하는 별이 있는 것처럼 밤하늘을 살피기 시작했다. 인호 또한 석진의 시선이 방해를 받지 않도록 조용히 밤하늘을 산책했다. 함께 먼별을 바라보는 시간은 두 사람 사이를 부쩍 가깝게 밀착시켜주었다.

인호는 석진과의 대화를 마치고 제 방으로 돌아와 사색에 잠겼다. 지난해 단짝 태영한테도 그랬듯이 마음이 통하는 상대에게 세실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나면 부듯한 충만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인호는 이제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하는 시점이 왔음을 자각했다. 그것은 장래를 함께할 세실리아를 위해서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였다. 기업의 사업계획을 짜고 실적을 검토하는 일은 아무래도 자신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사범대학 쪽으로 마음이 쏠리기도 했다. 학생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교사라는 직업은 사명감도 따라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사명감이 자신에게 있는지 신중히 생각해보기로 했다.

인호는 미래를 준비한다는 게 참으로 중요하다는 인식을 새롭게 가졌다. 아버지는 미래를 잘 준비하여 현재 성공가도를 달리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자 아버지가 이룬 세속적 성취보다 훨씬 소중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고개를 들고 일어섰다. 영원한 생명이 진정한 미래이지만, 실제적으론 현실의 연장선상에 있는 미래가 보다 자주 그를 지배했다. 아버지의 성공이 가져다 준 안락한 삶에 이미 맛들인 인호는 현실과 영생이라는 종교적 경계에서 오락가락하는 자신의 양면과 부딪혀야 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닌 균형의 문제로 받아들이면서 인호는 현실에 보다 더 치우치고 있었다.

월요일 학교에 가니 박찬동 선생이 일본 출장에서 돌아와 있었다. 운동장에서 전교생 조례를 할 때 학교장은 마스게임에 관한 공식발표를 했다. 시월에 개최되는 전국 체전 개막식에 우리학교가 마스게임으로 참여하게 되었으며 이는 학교를 빛낼 역사적 행사임을 선포했다. 마스게임 플랜이 확정되는 사월 말부터 본격적인 연습에 돌입할 것이니 학생들은 단결하여 학교의 영예를 드높여줄 것을 당부했다. 또한 학생 스스로 이 역사적 행사를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길 바란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전체 조례를 마치고 반별로 세부 사항이 전달되었다. 마스게임 연습은 하루 세 시간씩 오후에 진행되며 대신 여름방학기간 동안에는 오전은 마스게임을 하고 오후에 보충수업이 있다는 것이었다. 방학이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엔 수업 않고 운동장에 나갈 생각에 입이 벌어지던 친구들도 “우”하며 불만의 소리를 내질렀다. 담임선생이 교편으로 교탁을 탁 쳤다.

“조용, 조용! 아까 교장 선생님 말씀 못 들었어! 재학 중에 이런 기회를 갖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모르지? 일생일대의 멋진 경험이 될 거니까 방학 한 번 반납할 가치는 충분히 있는 거다. 그리고 너희 담임인 내가 이번 마스게임 총 책임자 아니냐. 우리 반에서 적극적으로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보여줬으면 한다.”

마스게임에 동원되는 인원은 대입을 준비하는 삼학년들과 체육 특기생을 제외한 일, 이학년 전원이었다. 단 장애가 있거나 아주 허약한 학생들도 제외되었다. 사월 말을 조금 앞당겨 마스게임 연습이 시작되었다. 매일 오후 운동장에 천이백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체육복을 입고 집결했다. 박찬동 선생이 운동장 단상에 오르고, 각 학년 체육선생과 교련선생들은 학생들의 기강을 잡기 위해 각자 맡은 위치에서 학생들 주변을 오갔다. 마스게임 훈련은 기본체조 동작을 숙지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자주 해온 국민체조와는 동작이 달라 학생들 대부분이 바로 따라하지 못했다. 운동장에 누워 등허리에 양팔을 받치고 엉덩이와 다리를 일자로 꼿꼿이 세우는 동작은 처음 시도해보는 것이었다. 마스게임에서 제외된 일부 학생들은 학교 시설과 교정 청소에 투입되었다. 그들은 함께 훈련에 들지 못해 겸연쩍은 얼굴로 화단 주변을 청소했다. 반면 그들을 부러워하는 소리가 훈련대열 속에서 새어나오기도 했다. 같은 자세를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하는 연습이 슬슬 지겨워질 때쯤 하루의 훈련이 끝났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집에 오면 고등학교 수업에 비해 강의 시간이 적은 하석진이 먼저 와 있을 때가 많았다. 저녁식사 전 삼십 분의 수업은 그날 학교에서 배운 것 중에서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을 주로 다루었다. 삼십 분은 곧잘 사오십 분이 되기도 했지만 아래층에서 식사를 알리는 소리가 들리면 풀던 문제도 덮어두고 내려갔다. 그날 저녁은 이정식이 회사일로 손님을 만나 늦는다는 전화가 황기사로부터 걸려와 있었다. 인호가 듣기로 이정식의 회사는 본격적인 컨테이너 화물운송 시대를 맞으며 제2의 도약을 위한 준비에 여념 없었다. 덕희 또한 부동산에서 집장사 위주로 방향을 전환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인호가 석진과 함께 거실로 내려오니 정순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 있었다. 남해댁이 이틀 동안 집은 비운 사이 정순이 주방일을 거들어준 게 고마워 덕희가 부른 것이었다. 돌을 앞둔 금비는 정순에게 업혀 있었고, 기철은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에 빠져 있었다. 그 옆에는 준호가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에 이어폰을 꽂고 영어회화 테이프를 듣고 있었다. 생선 굽는 냄새가 진동하더니 볼락구이가 푸짐하게 상에 올랐다. 오랜만에 고향 남해를 다녀온 남해댁이 가져온 것이었다. 남해댁은 얼마 전부터 착용한 보청기에 적응이 되어 텔레비전 볼륨을 그리 크게 높이지 않아도 청취가 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그녀는 텔레비전의 일일연속극에 빠져 살았다. 극중 여주인공이 서럽게 우는 장면엔 덩달아서 눈자위가 흥건해지곤 했다.

저녁수업을 끝내고 석진은 인호에게 독서회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대학에서 가톨릭학생회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었는데 가톨릭학생회 회원을 중심으로 새로운 독서회를 조직한다는 것이었다. 뜻을 같이하는 회원들과 첫 회합을 오는 금요일에 가지기로 해서 그날 저녁 수업은 토요일에 대신하기로 했다. 회합이 활성화되면 타 대학의 가톨릭학생회와 연계하여 독서회 조직을 확대해나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인호도 대학에 들어가 가톨릭학생회에서 자연스레 독서회를 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루하루가 목월의 시 나그네의 명구절처럼 구름에 달 가듯이 지나갔다. 금요일이었다. 가톨릭학생회 회원들과 회합을 하고 밤이 늦어 귀가한 석진은 인호의 방문을 두드렸다. 코리가 짖는 소리에 그가 온 줄 알고 있던 인호는 석진을 반갑게 맞았다.

“오늘 재미있었나 보죠?”

인호가 묻자 석진은 “그런 대로”라고 대꾸하며 웃어주었지만 그리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좀 앉았다 갈까?”

“좋아요.”

석진은 그가 수업할 때 앉던 의자를 인호의 책상에서 평소보다 거리를 두고 앉았다. 술을 거나하게 마신 탓에 냄새가 인호에게 끼칠까 싶어서였다.

“오늘 모임에 다섯 명쯤은 나오리라 기대하고 갔는데....... 단 두 명이 나오더군. 늦게라도 올지 몰라 기다렸는데 한 사람만 집에 일이 생겨 못 온다는 연락이 있었고, 결국 세 명이 회합을 했어. 한 명은 기존 독서회를 함께하던 친구라 새로 온 회원은 한 사람뿐인 셈이지. 그 친구가 모임 결성은 뒤로 미루고 오늘은 셋이서 술이나 먹고 끝내자고 해서 술을 좀 했다. 술이 들어가니 그 친구도 속마음을 털어놓더라. 자신도 활동할 뜻이 반반이라며 경직된 사회 분위기 탓에 생각 있는 학생들도 움츠리고 있다고 말이야. 하지만 방관하는 건 아니고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는 거지. 시간을 갖고 동지를 규합해보자는 결의만 다지고 헤어졌어.”

“형, 대학생들이 모여 책을 읽는다고 이 사회에 변화가 오겠어요?”

“이 사회가 변화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부터 변화하자는 거지. 우리가 지금껏 당연시하며 교육받아 온 이념이란 게 과연 참다운 것인가, 그것이 올바른 세상을 이끄는 길잡이가 될 수 있는가를 반성하면서 다양한 독서를 통해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거야. 앞으로 이 정권은 지금의 체제를 더욱 강화하려 들 것이고, 반면 새로운 눈을 뜨게 되는 학생들도 그만큼 늘어날 거라고 봐. 현 정권이 이대로 간다면 이 땅엔 제 2의 4.19가 일어나게 될 거야. 안타깝지만 4.19처럼, 그래도 현실에 덜 얽매이는 학생들이 나설 수밖에 없는 그런 날 말이야.”

 

학생들이 어느 정도 마스게임 체조에 능숙해지자 오와 열의 변주로 여러 가지 모양을 연출하는 마스게임 연기 훈련에 들어갔다. 순서에 따라 각자 맡은 지점에서 특정 동작을 취할 때마다 전체적으로 하나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자신이 어떤 형상의 한 부분이라는 걸 짐작만 할 뿐 짜인 각본대로 위치를 옮기기 바쁠 따름이었다. 한 형상이 끝나면 다음 형상을 위해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해진 제 위치를 찾아 움직여야 했다. 그런 가운데 한두 명 정도는 우왕좌왕하기 일쑤여서 “정신 차려!”란 소리를 수없이 들어야 했다.

마침내 마스게임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인간 피라미드 조가 편성되었다. 각 조마다 체격을 고려한 자기 자리가 정해졌다. 인호의 자리는 맨 밑, 그러니까 피라미드를 받치는 기초 역할이었다. 맨 밑의 학생들이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무릎을 꿇으면 그 위를 오르는 학생이 밑에 있는 두 학생의 상반신에 힘을 분산시켜 같은 자세를 취했다. 그렇게 한 층씩 단을 쌓아올리면 맨 꼭대기에 오른 학생이 일어서서 기를 들어 흔든 다음 일제히 무너지는 것이었다. 서로가 한 몸처럼 움직이지 않으면 부상을 당할 우려가 있어 안전을 외치며 통제하는 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끊이질 않았다.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일학년 학생 하나가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렇게 연일 계속되는 훈련에 다들 서서히 적응되어 가고 있었다.

월요일 전교 조례 시간이면 으레 학교장은 마스게임의 의의를 언급하며 훈련에 임하는 학생들을 격려했다. 이 행사에 학교의 명예가 걸려 있으며 우리 모두의 영광이란 말을 거듭 강조했다. 학교장에 이어 단상에 오른 마스게임 총감독 박찬동 선생은 학생들의 보다 적극적인 훈련 자세를 촉구하며 일사불란한 행동을 주문했다. 앞으로 동작의 정확도에 초점을 맞춘 연습에 집중한 다음 모든 과정을 거듭 반복하는 숙달훈련이 계속된다는 것이었다.

마스게임 연습이 삼 개월째 접어들었을 때 학기말고사가 치러졌다. 인호는 그동안 석진의 지도로 저녁시간 공부를 부지런히 했고 학교 수업시간에도 충실하여 시험을 무난히 치를 수 있었다. 1학기 종업식이 있는 날 조례시간이었다. 박찬동 선생은 인호를 자리에서 일어서게 했다. 모두가 주목하는 가운데 박선생은 뜻밖의 발언을 했고 인호를 오늘의 주인공으로 치켜세웠다.

“교무실에서 인호의 이번 성적이 화제다. 다른 반이었다면 커닝을 의심할 정도로 한 학기 만에 괄목할 만한 성적 향상이 있었다. 단연 우리 반 일등이지. 일등이 누구 답안지를 베끼겠어? 자, 우리 모두 박수로 인호를 축하해주자.”

교실이 떠나갈 듯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박선생은 인호를 자리에 앉게 한 다음 말을 계속 이었다.

“작년엔 우리 반 일등이나 일반반 꼴찌나 피장파장이었다만 인호는 달랐다. 전교 석차가 상위권에 가깝다. 정말 놀라운 성적이야. 인호는 다음 학기엔 일반반으로 복귀한다. 반 친구 하나 떠나는 거 섭섭하겠지만 더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 올리라고 격려하면서 보내주도록 하자.”

조례가 끝날 때까지 인호는 그간의 노력이 거둔 성취를 확인하는 기쁨에 푹 빠져 있었다. 짝꿍 노상원이 기쁨을 함께해주었다.

“축하한다. 진짜 변신 수준이구나. 나도 변신을 위해 이 무거운 쇳덩이를 들고 다닌다만 그동안 니 머릿속도 많이 무거웠겠다.”

반장 배도혁도 다가와 인호의 어깨를 툭 쳤다.

“공부가 잘 안되거든 언제든지 돌아온나. 가만 보이 니는 특수반 체질인갑다. 여기서 한 학기만 더 하면 훨씬 좋은 성적으로 특별반 직행까지 노릴 수 있는 건데 말이야. 흐흐.”

여름방학은 일주일간 주어졌다. 그 이후론 계속 등교를 해야 했다. 오후에 했던 마스게임 훈련은 더위 관계로 오전에 하고, 오후에는 훈련 때문에 한 학기 동안 밀린 수업을 보충하는 걸로 되어 있었다. 학교의 명예와 학생 개개인의 영광이란 명분 아래 희생이 강요되었다. 교사들도 내색은 안하지만 감당해야 할 부분이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결국 조직과 대의를 존중하는 정신으로 여름방학 반납에 따른 불만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고 오히려 일주일간의 짧은 휴가를 소중하게 받아들였다.

성적표를 받아 집으로 돌아가는 인호의 발걸음이 상쾌했다. 이번 성적은 그동안 부모에게 끼친 실망에 대한 보상이 될 것 같았다. 일주일의 짧은 방학이지만 하루쯤 대구에 다녀오는 일은 쉽게 허락해 줄 것으로 보였다. 덕희는 인호의 성적표를 보면서 아들을 믿고 기다려준 보람을 만끽했다. 시름은 싹 가시고 아들을 위해 뭔가 해낸 것처럼 성취감도 가졌다. 준호는 일학년 때 줄곧 이등을 유지하던 성적이 살짝 떨어졌다. 순간의 착각으로 답을 바꾸어 적는 실수를 하는 바람에 빚어진 일이었다. 그는 실수에 연연해하진 않았다. 도리어 그 실수만 아니었어도 이번엔 일등도 가능했다는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영어 점수는 만점을 받아 그의 자신감이 흔들리지 않도록 힘을 실어주었다. 그는 펜팔 협회에 가입하여 미국의 여학생과 편지 교환을 하고 있었다. ‘도나’라는 이름을 가진 그 또래의 여중생으로 몇 시간째 영어사전을 끼고 답장을 쓰는 등 펜팔에 열성을 기울였다. 얼마 후 학교에서 돌아온 석진도 인호의 성적 향상을 크게 기뻐했다. 덕희가 석진의 수고를 치하하자 그는 공을 인호에게 넘겼다.

“저야 크게 한 일이 없습니다. 인호가 공부하려는 의지가 분명해서 이런 좋은 결과가 나온 겁니다.”

이정식이 귀가하여 함께 식사하는 시간 또한 즐거웠다. 이정식은 인호의 이번 성적에 앓던 이가 쑥 빠진 기분이라며 호탕한 웃음을 아낌없이 터뜨렸다. 그리고 이번 주말의 여름휴가 계획을 식탁에서 펼쳐보였다. 회사의 트럭 기사 중 마산의 외곽인 덕동이라는 한적한 어촌에 본가를 둔 사람이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덕동 앞바다는 산으로 둘러싸인 만으로 수면이 호수처럼 잔잔한 곳이었다. 홍합 양식장이 있어 양식장 주인이 낚시꾼들을 위해 보트를 빌려주는데 큰 발동선도 빌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발동선을 하루 대절하면 한려수도를 유람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본가엔 나이든 부모님만 계시고 방 두 개가 늘 비어 있다고 했다.

“자, 이번 주말에 이박삼일간 여름휴가를 떠난다. 너희들이 크면 더 이상 아버지 따라 여행하는 거 원치 않을 테니, 이번 가족여행은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게 아버지가 멋지게 준비하겠다. 하군도 같이 가는 걸로 하세.”

이정식이 석진을 바라보자 그는 난색을 표했다.

“저는 학교 서클 행사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빠지기 곤란한 상황입니다.”

“그런가. 이번에 하군이 애를 많이 썼는데. 같이 가서 싱싱한 회도 먹고 재미있게 놀다오면 좋을 텐데 말이야.”

가족 여름휴가가 결정되어 인호는 대구엔 휴가를 다녀온 다음날 가기로 마음먹었다. 짧은 여름방학 기간을 바쁘게 보내는 셈이 되었다.

덕동이란 곳은 이야기 들은 대로 바다가 호수나 다름없는 잔잔한 수면을 하고 있었고 빙 둘러싼 산이 큰 바다를 다 가려주어 호수처럼 보이기도 했다. 황기사도 휴가를 맞았기에 이정식이 직접 승용차를 몰았다. 숙박할 집 앞에 주차를 하고 트럭 기사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 다음 이정식은 보트를 타고 줄낚시를 즐겼다. 양식장 주변에 몰린 고기들이 이정식의 낚시 바늘에 연달아 걸려들었다. 가지메기였다. 인호와 준호가 다른 보트 위에서 서툰 노질을 익힐 동안 이정식이 잡은 고기가 망에 가득할 정도가 되었다. 양산을 쓰고 주변을 돌아보던 덕희는 숙박을 할 집에서 손님을 위해 저녁을 준비한다는 걸 알고 손을 보태려 했지만 한사코 만류하는 바람에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낯선 곳에서 맞는 혼자만의 시간이 어색했으나 어느새 최근 계획 중인 집장사와 관련된 일로 머릿속이 꽉 차기 시작했다.

이튿날 대절한 배를 타고 한려수도를 유람하던 중 이정식은 휴가일정을 하루 더 늘이기로 했다. 모처럼의 가족여행에 기분전환 이상의 만족을 느낀 그는 회사에서 정한 휴가기간을 다 채우고 가리라 마음을 바꾸었다. 배를 하루 더 대절하기로 했다. 통영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돌아가는 길에 거제도를 둘러보는 것으로 계획이 수정되었다. 한려수도의 풍광에 매료되어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인호는 세실리아를 만날 생각이 더 간절해지기만 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 인호는 대구로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오후 다섯 시경이라 웬만하면 이모가 집에 있을 시간인데 혹시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이 되었다. 계속 통화를 시도했으나 전화가 연결된 건 저녁시간이 지나서였다. 전화를 받는 사람은 루시아였다. 그녀가 반가웠지만 이모가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갑자기 불안해졌다. 이모가 오늘 안나 아주머니와 성당에서 마련한 성지순례를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안심이 되었다. 서울의 명동성당과 절두산 성지를 순례하고 다음날 배론 공소를 둘러보고 온다는 것이었다. 세실리아도 방학이라 성지순례에 함께 떠났다고 했고, 자신은 좀 전에 은행에서 퇴근했는데 전화벨이 계속 울리더라는 것이었다. 인호는 어쩔 수 없이 대구행을 다음으로 미루어야 했다.

인호는 석진과의 저녁시간 공부를 꾸준히 해나갔다. 석진은 인호가 상대적으로 약한 수학과 과학 과목에 치중하여 학습지도를 했고, 인문계열 과목에 비해 빨리 싫증을 느끼는 인호의 성향을 알고 진도를 천천히 나가면서 틈틈이 대학생활 에피소드 등으로 환기를 시켜주곤 했다. 그는 잠시 미루었던 사법고시 준비도 다시 시작했는데 법관이 되길 원하는 부모의 뜻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인호는 방학 중에도 학교에 나갔기에 그 역시 아침부터 대학 도서관에 나가 공부를 하다가 인호가 귀가하는 시간에 맞추어 돌아왔다.

한여름 햇볕이 내리쬐는 운동장에서 하는 마스게임 연습은 고역이었다. 땀을 많이 흘린 나머지 탈수증상을 호소하는 학생들에게 학교는 천일염이 담긴 그릇을 내어놓고 소금 섭취를 권했다. 타박상 환자가 발생하고, 땀에다 흙먼지 범벅이 되면서 결막염 환자도 늘어났다. 연습이 끝나면 땀에 젖은 얼굴을 씻기 위해 세면장으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눈이 벌겋게 충혈된 학생들이 여러 명 나오자 훈련이 중단되고 며칠간 보충수업만 계속되었다. 교실 복도를 지나다 보면 안대를 찬 학생 한두 명은 예사로 볼 수 있었다. 훈련은 태풍이 불어와 이틀 더 쉰 다음 다시 강행되었다.

일요일이었다. 전날 김해 집에 가서 자고 온 석진이 저녁미사 시간이 되기 전에 돌아왔다. 함께 미사를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성당에 갈 때도 그랬지만 미사를 마치고 오는 길에 석진은 자주 뒤를 돌아보았다. 이전엔 하지 않던 행동이라 인호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형, 왜 그래요?”

“응, 혹시 누가 따라오나 싶어서.”

“저 뒤에 오는 사람들 우리처럼 성당 갔다 오는 신자들이에요.”

“그렇지? 신경 안 쓰려 해도 자꾸 뒤가 봐지네.”

“무슨 일이 있는가 보네. 혹시 누가 형 잡으러 와요?”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

집에 들어오자마자 인호는 석진을 따라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둘은 벽에 기대앉았다. 인호는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석진을 향해 고개를 돌려놓고 기다렸다. 석진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어제 집에 가니까 어머니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말씀하시더라. 우리 집을 낯선 사람이 기웃거리다 갔다고. 동네 사람들한테 나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보고 갔다는 거야.”

“아니, 왜요?”

“실은 며칠 전에 성준호란 친구가 잡혀갔어.”

“서울 있는 친구잖아요? 무슨 죄목으로요?”

“불온서적을 읽고 퍼뜨렸다는 거지.”

“정말 말도 안 된다. 그런 일로 학생들을 잡아간다는 게. 그럼 당분간 집에 있으면서 사태를 지켜봐야겠네요. 형이 우리 집에 있다는 걸 어찌 알겠어요.”

“경찰이 친구 방안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전국 독서회 조직 명단을 확보한 것 같아. 하지만 나는 숨어서 피할 생각은 없어. 다음 주가 개학인데 붙잡히지 않으려고 학교에 가지 않을 순 없잖아.”

석진의 어조는 담담했지만 얼굴에 감도는 긴장감은 숨기지 못했다. 인호는 석진에게 이런 일이 닥칠 줄 상상도 않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서야 탄압이란 행위가 우리 가까이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며칠 후 인호가 학교에서 마스게임 연습과 보충수업을 끝내고 왔을 땐 석진은 이미 붙잡혀가고 없었다. 그날 석진은 학교 도서관에 갔다가 오후 이른 시간에 돌아와 있었다. 얼마 후 사복을 입은 경찰관 두 사람이 초인종을 눌렀다. 덕희는 외출 중이었고 집을 보고 있던 남해댁은 손님인 줄 알고 문을 열어주었다. 그들이 석진을 끌어내고 그의 방에서 몇 가지 서적을 압수해 가는 장면을 남해댁은 큰 눈을 부릅뜨고 증언했다.

“앗따, 그 형사들 할일이 그리 없능가 착한 석진이 학생을 와 데꼬 가노말이다. 내가 막 따짔더이 조사할 끼 있다카데. 뭔 조사 한단 말이고 캤더이 책이 뭐시 어떴고 함시로 내 보고 모르믄 가만 있어라 카더라. 세상에, 책 읽는다꼬 잡아가는 기 어딨노! 내가 문 열어준 기 후회막급이다카이. 그래도 착한 석진이 학생이 내 보고 괘안타꼬 걱정마라 카긴 카던데.”

석진의 연행 사실에 대해 이정식은 친분이 있는 시경 교통과 간부를 통해 알아보았다. 그의 말로는 머리에 나쁜 물든 학생 버릇 좀 고치는 일이니 염려할 것 없다는 것이었다. 석진과의 관계를 묻는 말에 아들의 가정교사라 했더니 아들도 나쁜 물이 들기 전에 조치하라는 말을 남긴 모양이었다. 이정식과 덕희가 나누는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인호가 한 마디 했다.

“석진이 형한테 문제가 있다면 그건 이 사회가 보다 정의로운 세상이 되길 원한다는 거죠. 이 나라에 링컨이 말한 것처럼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서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에요.”

“어, 이 놈. 벌써 물든 거 아냐?”

이정식이 정색을 하자 인호는 한 마디 더 붙였다.

“링컨의 말은 학교에서 다 배우는 거에요. 유신정권이 학교에서 배운 대로 행하지 않는 게 문제잖아요.”

순간 이정식이 안광을 번득이며 인호를 노려보았다.

“뭐? 니가 뭘 안다고 유신정권을 들먹여! 이 놈 정말 큰일 날 소릴 하고 있네. 앞으로 유신정권이니 하는 말 어디서든 함부로 내뱉지 마! 이 나라가 이리 발전하는 게 다 대통령께서 힘차게 밀어붙였기 때문이야!”

옆에서 덕희가 이정식의 흥분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진정하세요. 인호도 지가 따르던 하군이 잡혀간 게 화가 난 거지 다른 뜻이 있겠어요? 나중에라도 하군이 오면 내가 알아서 돌려보낼게요.”

 

이학기가 시작되었다. 특수반에서 일반반으로 재배치된 인호는 맨 뒷줄 비어 있는 책상에 짝도 없이 앉아야 했다. 반가운 건 일학년 때 단짝 태영과 한반이란 사실이었다. 태영은 여전히 바둑책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그동안 바둑 실력이 늘어 4급 수준이라며 자랑했다. 한편 그는 진학 목표를 한의대에 두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인호도 그 즈음에는 대구에 있는 대학 관련 정보를 모아놓았고 그곳의 국립대학 국문학과 쪽으로 마음이 가고 있었다.

방학 동안의 맹연습으로 학생들은 이제 마스게임의 모든 동작들에 숙달되었다. 거대한 기계의 한 부속처럼 각자 맡은 동작을 착착 진행시켜 나갔다. 마스게임 시간에는 인호는 함께 손발을 맞추던 특수반 조로 돌아갔다. 부상자가 나오곤 했던 인간 피라미드도 다들 능숙하게 쌓아올리고 무너졌다. 학생들은 마스게임을 영광으로 생각하란 말을 하도 들어서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영광스러운 그 날을 기다리며 연습에 임했다. 인호의 경우 훈련 초기에는 지난해의 무릎 통증이 재발하는 듯했으나 꾸준히 해온 체조 덕분인지 증세가 말끔히 사라진 것 같았다.

토요일 방과 후 인호는 오랜만에 코리를 데리고 산책에 나섰다. 유엔묘지와 바다가 보이는 야산에 올랐다. 석진의 안부가 궁금했다. 그와 함께 생활하는 동안 인호는 학습에도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현실을 바라보는 시야도 한층 넓어졌음을 느꼈다. 높은 산을 오르면 넓은 바다가 보이듯 인호는 앞으로 더 올라가야 할 높은 산이 있고 드넓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십분 깨닫고 있었다.

인호가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으로 들어서는 길목 맞은편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석진의 목소리였다. 반가움에 무슨 말을 꺼낼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의 초췌한 얼굴을 보자 인호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그 사이 많은 고초를 겪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니, 형. 방금까지 형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턱 나타나다니. 그동안 어찌 지냈어요?”

석진은 대답 대신 그에게 미소를 보였으나 평소의 그 환한 표정은 아니었다. 인호는 석진과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석진이 제 방을 향해 빠른 걸음을 옮기며 혼잣말 하듯이 뇌까렸다.

“짐 가지고 갈게. 어머님 안 계신가 보네. 인사 못 드리고 가야겠다.”

석진은 남덕희의 부재가 오히려 부담을 덜어주는지 아쉬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인호가 보다 못해 어조를 높였다.

“형. 무슨 소리에요? 좀 있으면 엄마도 올 거고, 저녁식사는 하고......”

석진이 곧바로 인호의 말을 끊었다.

“아니다. 와서 짐 가지고 바로 갔다고 말씀 드려. 그동안 잘 대해주셔서 감사하단 말도 전해주고.”

석진은 제 방에서 벽장 속의 옷가지를 가방에 챙겨 넣고, 책상과 서랍 속을 정리했다. 인호는 시르죽은 그의 용모를 살피며 옆에 잠자코 서 있었다. 그때 남해댁이 노크도 없이 들어왔다. 갑자기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 듯 석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쟁반에 주스를 담고 온 남해댁을 보더니 그는 안도의 짧은 숨을 내쉬었다. 인호는 아무래도 이전과는 너무 딴판인 그의 모습이 염려스러웠다.

“석진이 학생. 얼굴이 마니 상해뿟네. 우쨌든 이래 나와서 다행이데이.”

남해댁의 눈에도 석진이 온전해 보이지 않은지 두어 번 더 그를 뜯어보았다. 석진은 오렌지주스 잔을 받아들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남해댁이 나간 후 석진은 옆에 서 있는 인호를 바라보며 조금씩 안정을 찾고 있었다. 잠시 후 마치 난처한 입장에서 방금 벗어난 사람처럼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예전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되살리며 그가 입을 열었다.

“오늘 학교에 휴학계 내고 왔다. 곧 입영 영장이 나올 거야. 입대할 때까지 집에서 법전이나 파볼 생각이다. 인호 너는 이제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실력이 되니까 열심히만 하면 돼.”

“꼭 이렇게 후다닥 가야 해요?”

“우리가 영영 헤어지는 건 아니잖니. 다시 만날 날이 올 거야. 내가 군엘 갔다 오면 인호도 대학생이 되어 있겠네. 자, 우리 그 날을 생각하며 악수!”

비로소 얼굴이 밝아진 석진의 손을 인호는 꼭 쥐어주었다. 그의 손은 긴장을 한 탓인지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인호는 그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을 겪었을 지도 모른다. 인호는 그가 하루 속히 회복하여 본래의 여유롭고 평온한 모습으로 돌아오길 빌었다.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석진과의 생활은 그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함께하는 동안 성당을 다시 다니게 되었고 그의 말처럼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실력도 갖추게 되었다. 인호는 그와의 인연이 앞으로 계속 이어지길 원했다. 떠나는 석진의 손을 놓아주며 인호는 마음의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석진의 마음 또한 그 손을 잡아주었으리라 믿었다.

 

전국 체전 개막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육 개월 간의 긴 마스게임 훈련도 이제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개막식 입장과 마스게임 예행연습을 위해 학생들은 공설운동장으로 향했다. 학교에서는 마스게임 총감독 박찬동 선생을 위시하여 여러 명의 선생을 파견했다. 주최 측에서 학생들을 마스게임 선수라고 불렀다. 마스게임 선수들은 공설운동장 7호문 앞에서 대기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날의 예행연습은 시민에게 공개하기로 홍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 경호 등 보안 강화를 위한 상부의 지시로 시민 공개 방침이 갑자기 철회되었다. 개막식 예행연습이라는 멋진 구경거리를 위해 아침 일찍 공설운동장을 찾은 시민들이 그냥 돌아갈 리 만무했다. 타 시도 선수와 임원들은 철통같은 경비 태세를 갖춘 정문으로 버스를 이용해 들어갔다. 7호문이 열려 부산 대표 출전 선수들이 입장하는 동안 마스게임 선수들은 스크럼을 짜서 시민들을 봉쇄하는 경찰을 도와야 했다. 그 때 한 사람이 7호문과 좀 떨어진 곳의 전봇대를 타고 운동장 담을 넘으려고 했다. 이를 본 경찰이 재빠르게 방망이로 강타하여 그를 바닥으로 넘어뜨렸다. 경찰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반항을 하지 못하게 그의 어깨 위를 무작하게 한 번 더 내리쳤다. 경찰의 방망이에 쓰러진 사람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자 뒤편에서 분노에 찬 시민들의 거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 봐라, 사람 잡는다. 시민 공개 한다고 선전 한참 해놓고 이게 뭐하는 짓이고!”

“이거 원. 경찰이 사람 개 잡듯 패는 걸 가만히 보고 있어야 하나?”

“진짜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온데이. 내가 이런 꼴 볼라고 동래 온천장에서 여까지 왔단 말이가.”

스크럼을 짜고 있는 인호의 바로 앞에 선 경찰은 시민들의 항의에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역시 자신의 동료가 대응하는 폭력적인 방식에 내심 반대하는 것 같았다.

부산 선수들이 모두 입장하고 마스게임 선수들 입장 차례였다. 스크럼이 풀어지는 순간을 틈타 시민 일부가 7호문으로 뛰어들었다.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그들을 저지하려고 경찰병력이 나서는 것과 동시에 입구로 진입하려는 시민들이 마스게임 선수들 사이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마스게임 선수들과 시민들이 섞이며 7호문 입구는 북새통이었다. 그 와중에 난입하는 시민들을 제압하려는 경찰의 강경한 태도는 인호를 경악케 했다. 그들은 시민들의 머리를 향해 방망이를 내리치며 남자의 그곳을 걷어찼다. 급소를 맞은 사람은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사람들에 떠밀리어 입구로 들어서자 말자 인호는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입구 바로 앞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뒤에서 득달같이 밀려드는 사람들 바람에 한번 넘어지면 일어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인호의 등 위를 사람들이 밟고 지나갔고 그들도 넘어지며 아수라장이 되었다. 여러 사람이 넘어져 통행이 잠시 멈춘 틈에 인호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벽에 바싹 붙어 일어서자 살았다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 앞으로 넘어진 사람들이 다시 우르르 몰려드는 사람들에 밟혀 비명을 내질렀다. 인호는 그들이 일어설 시간을 주기 위해 벽 쪽에서 팔을 뻗어 있는 힘을 다해 밀려오는 사람들을 저지시켰다.

“제발, 제발요! 이러다 사람 죽어요!”

인호의 절규에도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사람들이 경찰을 피해 몰려들어왔다. 인호의 맞은편 쪽으로 더 몰리는 것 같았다. 그 아래쪽에는 여러 사람이 넘어진 채 바닥에 깔려 있었다. 신음과 비명이 뒤엉긴 속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춰요, 멈춰! 사람 깔려 있는 거 안 보이요! 양옆에서 좀 막아줘요!”

인호가 벽에 바짝 몸을 밀착시킨 채 아래를 보니 마스게임 같은 조인 특수반 반장 배도혁이 사람들이 여럿 쓰러져 있는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내려오는 사람들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쓰러진 학생들과 시민들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저지 덕분에 쓰러진 사람들이 빠져나올 수 있었고, 경찰의 강력한 진압으로 사태는 얼마 후 평정되었다. 여기저기 부상당한 시민들 수가 적지 않았다. 쓰러지면서 여러 사람에게 밟혀 다친 사람들도 제법 있었지만 진압 과정에서 많은 부상을 당한 것 같았다, 경찰의 곤봉에 머리가 깨진 사람은 한 구석에 맥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잡혀갈까봐 곤봉에 맞고 피를 흘리며 도망간 사람도 더러 있는 것 같았다.

인호는 한숨을 내쉬며 마음속으로 주님을 찾았다. 그때 미처 일어나지 못했더라면 부상을 면치 못했으리라는 생각에 몸서리가 났다. 주님께 감사를 드리면서도 한편으론 좀 전의 광경에 대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무자비하게 곤봉을 휘두르는 경찰의 모습은 배신감 이상의 충격을 안겼다. 무질서한 난입에 가담한 시민들 또한 불미스러웠지만 경찰의 강경 진압이 유발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사망자가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학생들 피해도 크진 않았다. 찰과상에다 눈두덩이 벌겋게 부은 친구, 코피가 터진 친구, 벗겨진 한 쪽 운동화를 못 찾은 친구, 인호처럼 상의 뒷부분에 발자국이 찍힌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 앞으로 총감독 박찬동 선생이 나타났다.

“세상에 어째 이런 일이....... 다들 괜찮아? 이 신발 한 짝은 누구 거야? 혹 오늘 예행연습 못 할 정도로 다친 사람 있나?”

부상자 발생을 줄이는 데 몸을 아끼지 않았던 배도혁이 나섰다.

“그 정도로 다친 사람 없슴니더. 육 개월씩이나 고생해놓고 여까지 와서 빠진다면 말도 안 되지예.”

“그래, 그럼 천만다행이다. 이런 불상사를 너희들 앞에 보이게 해서 나도 낯이 안 선다. 내일이면 드디어 유종의 미를 거둔다. 잘 참아 왔다. 자, 모두들 운동장으로 들어가자.”

개막식 입장 예행연습이 시작되었다. 각 시도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순서에 따라 입장하여 정해진 위치를 확인하고 퇴장하는 동안 본부석 맞은 편 관중석에선 카드섹션이 펼쳐졌다. 카드섹션은 여고생들이 동원되었는데 그들도 이 날이 오기까지 수많은 연습을 반복했을 것이었다. 스피커에서 행진곡이 울려 나왔다. 마스게임 선수들의 차례였다. 그 동안 땀 흘린 노력이 헛되지 않아 모든 과정을 차질 없이 마칠 수 있었다. 본부석에서 큰 박수를 보내왔다. 부산시장과 교육감, 경찰청장, 체육계 인사들이 기립하여 박수를 친 다음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들의 뒤를 따르는 교장선생의 얼굴도 보였다. 학생들에게 열렬히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이 멀리서 봐도 무척 고무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예행연습이 끝나고 학생들은 정문을 통해 운동장을 나왔다. 정문 앞엔 관계자 이외의 접근을 불허하는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고, 운동장 주변으로 경찰 병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신변 안전에 만전을 기하는 것이지만 과연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개막식 당일은 보다 많은 인원이 투입되어 질서 유지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개막식 관람권을 가진 일반인들은 일일이 신분확인 절차를 거쳐 입장했다. 식전 행사인 마스게임은 전날 예행연습 때와는 달리 선수단이 입장하기 전에 시작되었다. 예행연습 때보다 더한 긴장 속에서 한 치 오차도 없는 연기를 펼치자 수차례 감탄의 함성이 쏟아졌다. 십오 분간을 위한 육 개월의 장정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끝이 났다. 인호는 가슴이 벅찼다. 그동안 같이 땀 흘려온 친구들과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뜨거운 동지애를 느꼈다. 대열을 이루어 퇴장하는 사이 인호는 본부석 중앙에 앉은 대통령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다는 자부심은 가질 수 있었지만 대통령 앞에서 행한 마스게임이 그동안 세뇌 받아온 대로 영광스러운 감격을 선사하진 않았다. 조직의 일원이라기보다 전체 구조 속의 한 점 위치에 불과했다는 역할 인식에 잠시 허탈감이 들기도 했다. 전날의 불상사로 인한 마음의 상처도 아물지 않고 있었다.

 

석유 파동이 일어났다. 중동 전쟁 발발 이후 아랍 산유국들은 석유를 무기화하여 감산과 가격인상 정책을 밀어붙였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는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산업현장과 실생활에 곧장 영향을 미쳤다. 전력은 제한적으로 공급되었고, 한 집 한 등 켜기 운동이 전개되었다. 공장은 조업을 단축했고 물가가 치솟았다. 버스도 운행횟수를 줄여 인호는 통학시간 콩나물시루 같은 만원버스 속에서 시달려야 했다. 두 발이 다 버스 바닥에 온전히 닿지 않을 만큼 승객들로 가득 찼다. 이정식의 운송회사 또한 화물량 감소와 유가 인상으로 수익률이 떨어졌다. 직영 주유소가 도움이 되었지만 원할한 유류 수급을 위해 그가 직접 나서서 정유회사 담당자와 전화기를 사이에 두고 입씨름을 벌여야 했다. 한편 덕희는 부동산에서 집장사 쪽으로 방향을 잡아 짭짤한 재미를 보았다. 대연동 집을 지은 건축업자의 도움을 받고 벌인 일이 경험이 쌓이자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날이 추워지면서 교육당국은 예년보다 삼주 앞당겨 조기 겨울방학을 실시했다. 석유 파동에 따른 대책의 일환이었다. 그 무렵 서울과 지방의 일부 대학에서 민주체제 회복과 구속 학생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산발적으로 발생하자 이의 확산을 막고자 조기 방학을 서둘렀다는 이야기도 공공연히 나돌았다. 인호는 추운 날씨에 신병 훈련을 받고 있을 하석진이 떠올랐다. 석진은 한 달여 전 논산훈련소로 입소한다는 사실을 전화로 알려왔다. 목소리에 생기가 감돌아 체포 이후의 후유증에서 벗어난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그는 내년 휴가에 찾아오겠다고 약속했고, 인호는 무사히 돌아올 그 날을 기다리겠다고 응원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가 태영의 사촌형처럼 군에서 모진 곤욕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빌었다.

인호의 학교도 기말고사는 일주일 후 치르기로 하고 먼저 방학에 들어갔다. 인호는 이번 시험을 잘 치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대구에 가서 하루 묵고 올 작정이었다. 덕희는 인호의 계획에 반대하지 않았다. 방학 첫날 아침부터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기는 그렇고 해서 인호는 코리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야산을 올랐다. 바다 앞에 서 있는 철강 공장의 굴뚝에서 잿빛 연기가 솟아올랐다. 공장은 노후 선박을 해체하여 화장하는 곳이기도 했다. 사람이 죽어 흙으로 돌아가듯 배는 수명이 다하면 다시 쇠붙이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인호는 오랜만에 보게 될 세실리아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설렜다. 자신의 미래와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켜나가는 삶은 아름답다고 했던 하석진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인호에게 있어 세실리아는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해줄 미래를 약속하는 존재였다. 인호는 이번에 세실리아를 만나면 사랑한다는 말을 꼭 들려주겠다는 다짐을 재차 했다. 물론 그녀로부터 사랑한다는 말도 듣고 싶었다.

월요일에 치르는 시험을 앞두고 주말 토요일은 온 종일 정전이었다. 대연동 일부 지역에 국한된 정전 사태였다. 인호는 책상 위에 촛불을 켜고 앉았다. 촛불을 이용해 공부하는 것은 처음엔 오히려 집중력을 높여주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갑갑증이 나 견디기 어려웠다. 어린 시절 구덕산 저수지 아래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곳에서 살 땐 촛불과 호롱불이 당연한 것이었는데 밝은 전깃불에 익숙해진 지금 격세지감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편리해진 만큼 의존해야 하는 것들도 많아져 있었다. 전깃불은 일요일 저녁 무렵에야 돌아왔다. 남해댁이 ‘와’ 하며 제일 먼저 기뻐했다. 옆집에서도 전기를 반기는 함성이 담을 넘어왔다. 이 불이 언제 다시 가버릴지 모른다는 불안한 안도감 속에서 인호는 내일 있을 시험에 대비한 총정리를 서둘렀다.

기말고사를 치른 이튿날 인호는 점심을 먹고 나서 바로 대구로 갈 준비를 했다. 덕희는 경숙에게 전할 수표가 든 봉투를 인호에게 맡겼다.

“잘 전해 드려. 요즘 물가도 치솟고 다들 허리띠 꽉 졸라매고 있는데 네 이모 일도 많이 줄었을 거다. 엄마가 저번에 집 한 채 팔고 남은 돈 좀 넣었다. 조심해서 갔다 오너라.”

인호가 지켜본 적은 없지만 들리는 바로는 엄마의 수완이 보통 수준을 넘어섰다고 했다. 택지를 고르는 안목도 남다른데다가 어떻게 하면 집이 더 태가 나는지 현장 기술자들이 감탄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여성의 섬세함이 건물 곳곳에 반영되어 집을 보러온 주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가 지은 집은 내놓자말자 팔린다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인호는 수성동 버스정류장에서 내렸다. 눈에는 선하지만 자주 찾아가지 않아 조금은 서먹해진 거리였다. 그는 이 길을 매일같이 걸을 그 날이 다시 올 거라는 사실을 주변에 알리기라도 할 모양으로 길가의 나무와 담장과 상점들의 간판에 골고루 눈길을 던졌다. 과일가게에서 사과를 한 봉지 샀다. 드디어 하늘색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철대문이 눈에 들어왔다. 인호는 초인종을 연달아 두 번 눌렀다. 바깥채 창문이 열리더니 고개를 내미는 얼굴이 있었다. 세실리아였다.

“오빠!”

“세실아, 안녕!”

“요한 오빠 왔어요!”

세실리아는 안채를 향해 인호의 출현을 알리며 대문으로 뛰쳐나왔다. 문이 열리고 세실리아와 마주한 순간 인호는 손에 든 사과 봉지만 아니었다면 두 팔로 그녀를 꼭 껴안고 싶었다. 대신 상체를 살짝 세실리아 앞으로 내밀며 그녀가 안아주길 기대했다. 이를 눈치 채지 못했는지 세실리아는 그가 쥔 사과 봉지만 받아주었다.

“이모 아까부터 오빠 기다리고 계셔.”

그때 안채에서 경숙과 안나가 나와 인호를 반겼다.

“어서 오이라.”

“아이쿠. 요한이 인제 어른 다 됐네!”

“이모, 안나 아주머니. 잘 계셨죠?”

인호는 경숙과 안나를 바라보았다. 그간 미루어오다 늘어난 일을 처리하듯 오랫동안 보지 못한 얼굴들을 번갈아가며 확인했다. 두 사람 다 안색이 좋아 보였다. 안나가 말했다.

“요한이 온다고 이제 막 만두 준비하던 참이다. 이모는 만두속 장만하실 거고 나는 만두피 만들 밀가루 반죽할 건데 요한이도 손 씻고 아줌마 좀 도와다오. 우리 집 남자 역할이 오랜만에 왔으니 덕을 좀 봐야지. 호호호.”

인호는 부산과는 결이 다른 가족적인 분위기에 금세 젖어들었다. 반죽을 치대는 일이나 계란에 식용유를 붓고 거품기로 저어 마요네즈를 만들 때도 인호의 손이 동원되었다. 세실리아도 와서 경숙을 거들어 두부를 으깨고 쇠고기를 잘게 다졌다. 루시아가 은행에서 퇴근해 왔고 오랜만에 다섯 식구의 저녁상이 차려졌다. 만둣국과 군만두, 김치와 샐러드로 단순하면서도 푸짐한 상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치자 경숙이 루시아와 세실리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요한이가 사과를 사왔네. 오랜만에 요한이 방에서 같이 사과 깎아 묵고 놀다 가거래이.”

오랫동안 비워진 인호의 방은 갑작스레 주인이 돌아오자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아랫목은 이미 데워져 방안은 훈기가 감돌았다. 예전에 인호가 읽었던 책들이 반갑게 그를 맞았다. 한동안 방안에서 흐름을 멈추었던 시간들이 깨어나 역류를 시작했다. 셋이 함께 공부하던 시간이 인호의 눈앞에 그림처럼 그려지고 있었다. 루시아가 사과를 깎아 접시에 먹기 좋게 담아놓았다. 인호는 루시아에게 전할 쪽지를 그에게 부탁하던 정태수라는 학생이 기억났다. 대학생이 되어 루시아에게 나타났을 법도 한데 그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사과 한 조각을 집어먹으며 인호가 그에 대해 물었다.

“태순가 하는 사람 대학교 대구로 왔어?”

“아, 태수. 걘 공부 머리는 없는가 봐. 대구에는 그 친구 받아줄 대학 없을걸.”

인호의 물음에 루시아가 남의 얘기처럼 대꾸했다. 세실리아가 뒷말을 이었다.

“그 오빠 재수한다면서 찾아왔는데 언니가 조용히 돌려보냈대. 요한 오빠는 대구로 오는 거 문제없지? 오빤 대구 오고도 남을 실력일 거야.”

“남을 정도 실력은 아니고. 적당히 하고 있어. 너무 잘해버리면 서울 가라고 하실 거니까.”

“갈 수만 있다면 서울로 가야지.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잖아.”

루시아의 말에 인호는 세실리아는 어떤 생각이 있는지 궁금했다.

“세실아. 내가 만약 대학 서울로 가면 니도 서울 올래?”

인호의 말을 먼저 루시아가 받았다.

“우리 세실이도 서울 갈 실력이야 되지. 하지만 우리 형편으론 서울 유학 어려워. 엄마 한복 바느질 수입이 한계가 있는데다 일도 요새는 줄어들었고. 물론 내 봉급을 쪼개 넣으면 안될 건 없지..... 세실이가 꼭 가겠다고 한다면 언니인 내가 밀어줘야지, 뭐.”

‘아냐, 언니. 나는 서울 안 갈 거야. 대구에서 장학금 받을 수 있는 델 알아볼 거야.”

대학 등록금 등 학비를 걱정해야 하는 세실리아에 비해 그런 고민은 전혀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인호를 괜히 미안하게 했다. 인호는 화제를 돌려 마스게임 연습에서 개막식 행사까지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를 했다. 예행연습을 위해 운동장에 진입하던 중 시민들이 밀려와 입구 계단에서 인호가 쓰러진 사고는 세실리아로 하여금 두 손을 모으게 했다. 인간 피라미드에 대해 설명하자 세실리아는 머릿속으로 상상을 하며 입을 살짝 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방에서 안나가 딸들에게 가자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인호는 내일 오후 세실리아와 영화 보러 갈 약속을 했고, 루시아는 둘이 볼 만한 영화를 추천해주었다. 그날 밤 인호는 잠들기 전 기도를 바치며 이모와 안나 아주머니의 일감이 줄어들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다음날 점심식사를 마치고 인호는 세실리아와 시내로 나갔다. 오랜만에 갖는 둘만의 시간이 너무 소중하여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만큼 시간도 천천히 흘러가주길 바라며 걸었다. 평일이라 영화관 매표소에는 사람들이 붐비지 않았다. 헤밍웨이 원작의 ‘무기여 잘 있거라’가 상영되고 있었다. 루시아가 골라준 영화였다. 사랑을 위해 전쟁터를 버린 주인공이 끝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게 결말이었다. 여주인공이 죽음에 다다랐을 때 인호는 세실리아의 손을 꼭 잡았다. 사랑엔 해피엔딩은 없다는 작가의 허무주의적 연애관이 인호를 무너뜨리진 못했다. 어둠이 덮여 있던 영화관을 나와 백주의 거리에서 그는 진정한 사랑은 기필코 해피엔딩을 이룰 것이라 생각했다. 훗날 사랑하는 사람들 중 하나가 먼저 세상을 떠나더라도 마지막 날까지 서로 사랑했다면 그건 해피엔딩이 아니겠는가. 사별의 아픔 속에서도 함께 행복했던 사랑의 추억은 홀로 남은 사람을 끝까지 지켜줄 거라 그는 믿었다.

따뜻한 저녁밥 한 끼 더 먹이고 보내려는 경숙의 뜻이 있어 인호는 세실리아와 시내에 더 머무를 수 없었다. 세실리아에게 뭐든지 주고 싶은 마음이 인호를 조급하게 했다. 세실리아는 무엇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평소 잘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인호가 자꾸 물어보아도 갖고 싶은 게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인호는 세실리아가 노점상의 갖가지 악세사리에 눈길을 주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는 노점 앞을 지나기 전에 세실리아를 붙잡아 세웠다.

“자. 여기서 마음에 드는 거 다 골라봐. 요즘 책을 안 사봐서 용돈이 많이 남아. 어서 골라, 응!”

세실리아는 난처한 얼굴을 하며 노점에 펼쳐진 여러 종류의 악세사리를 살폈다. 망설이다가 겨우 하나 고른 것이 노란 꽃잎 모양의 머리핀이었다. 하나 더 고르라는 인호의 성화에도 세실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인호는 세실리아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뭐든지 해주고 싶었다. 이미 그는 그녀에게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놓고 있는데도 마치 욕심을 부리듯 자꾸만 뭔가 주고 싶은 것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이모 집으로 들어서는 어귀에서 인호는 발길을 멈추었다. 바로 옆에서 걸음을 맞추어오던 세실리아도 멈춰 섰다. 음악이 흐르는 근사한 곳에서 멋있게 사랑을 고백하는 제 모습을 상상하곤 했던 그였지만 장소는 따지지 않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오늘을 넘기고 싶지 않았다.

“세실아.”

“응?”

인호가 뜸을 들이는 사이 세실리아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무슨 말이 나올지 기다렸다. 인호의 얼굴엔 좀 전까지 머금었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잠시 머물렀다.

“세실아, 사랑한다.”

인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번에는 세실리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달아났다. 그녀는 잠시 넋 나간 표정을 가다듬어야 했다.

“오빠한테 그 말 들으니 이상해지네.”

“이상할 게 뭐 있는데? 내가 니 사랑하는 게 이상하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갑작스러워서.......”

“오늘 처음 하는 말이지만 마음속으로는 수백 번도 더 했어. 세실이 니도 이실직고해라. 오빠 사랑하제?”

처음 하는 고백에 짐시 긴장했던 인호는 여유를 되찾으며 세실리아를 다그쳤다.

“그건 오빠 마음대로 생각해.”

“나도 니 목소리로 사랑한다는 말 듣고 싶다.”

“다음에, 다음에 할게.”

“아니. 지금 당장 해줘. 못 듣고 가면 억울할 것 같다.”

“그럼 말이야....... 좋아, 오빠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할게.”

세실리아가 두 손을 둥글게 모아 자신의 입을 가렸다. 인호는 오른쪽 귀를 그녀의 입가로 가져갔다. 그녀는 두 손을 그대로 모운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하지만 또렷하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보였다.

“오빠. 많이많이 사랑해.”

둘은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인호는 세실리아가 제 마음을 담아준 그의 오른쪽 귓속을 잠시라도 봉해 두고 싶어 침묵에 들어갔다. 축복을 듬뿍 받은 기분으로 대문 앞까지 왔다. 먼저 퇴근한 루시아가 문을 열어주었다. 감나무 앞에서 인호는 세실리아에게 전부터 갖길 원했던 그녀의 사진을 부탁했다. 그녀는 최근에 찍은 사진이 없다며 인호의 눈치를 살피더니 결국 제 방에 들어가 사진을 한 장 들고 나왔다.

“오빠, 이거뿐이야. 사진이 별로 맘에 안 들지만......”

세실리아가 교복을 입고 찍은 중학교 졸업 앨범용 흑백사진이었다. 인호가 부산에서 늘 그리곤 했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그는 사진을 지갑 속에 고이 끼워 넣었다.

 

이광 시인

◇ 이광 시인 : ▷200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부산시조 작품상, 이호우 시조문학상 신인상, 나래시조문학상 수상 ▷시조집  《당신, 원본인가요》, 《소리가 강을 건넌다》, 《바람이 사람 같다》, 현대시조 100인선 《시장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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