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의 신 : 손석희에서 '르몽드'까지
서평자 : 강준만(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미국 위스컨신대 신문방송학 박사)
“40년 넘게 저널리스트 생활을 하고 있지만, 젊었을 때 배운 게 지금은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었다. 끊임없이 기술적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저널리스트가 되고자 한다면 모든 게 항상 변할 것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192p.)
왜 대학은 탐사저널리즘을 구경만 하나?
나는 이 책의 존재를 서평 의뢰를 받기 전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언론의 소개가 그만큼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개할 만한 가치가 없었나 보다”라는 생각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서서히 작은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아니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왜 소개를 안한 거지? 내가 느낀 재미는 전공자의 편향성일 수 있으니 ‘의미’로 바꾸기로 하자. 문화부 서평 담당 기자들의 취향은 지나칠 정도로 학술적이어서 ‘의미’를 외면하지 않는 편인데, 왜 이 중요한 의미를 놓친 거지? 자기들, 즉 동업자들의 이야기라고 무시한 건가? 아니면 이 책이 역설하는 ‘독립언론’의 가치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 건가? 그것도 아니면 기자들이 게을러서 그런 건가? 화를 거두고 차분하게 이야기해보자.
이 책은 독립언론 <시사IN>이 지난 2년간 기자들을 해외로 파견하고 국제적인 저널리즘 콘퍼런스를 개최해 언론의 위기, 독립언론의 가치, 탐사저널리즘의 필요성에 대해 고민한 결과물이다. ‘저널리즘의 신’이라는 제목은 저널리즘의 신뢰(信), 저널리즘의 신화(神), 저널리즘의 신산함(辛)에 대한 이야기라는 뜻에서 나온 거지만, 등장 인물들은 정말 ‘저널리즘의 신’으로 부르고 싶을 정도로 우리가 꿈에 그리던 저널리즘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어 감동적이다.
“기자라고 하면 강할 것 같죠?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똑같습니다....저의 예를 들어볼게요. 제가 어떤 지역에서 뭘 사려고 시장에 갔더니 그 앞에서 제 참수식을 열고 있더라고요. 어느 날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여든 넘은 이모님이 전화를 걸어오셨어요. 오늘 한인타운에서 네 화형식 하는 걸 봤다면서요. 그러니 ‘너는 왜 못 버티느냐’라고 할 일이 아니에요. 기자들은 괴물이 아니니까요.” 손석희의 말이다. 그가 이끈 jtbc는 사실상 200일 동안 세월호 참사를 탐사보도함으로써 한국 언론계에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지만, 전반적으로 기성언론은 탐사보도를 잘 하지 않는다. 기사의 높은 제조원가 때문이다. 기자들의 입장에서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는 이유도 있다. 한국 탐사보도의 아이콘이 된 <시사IN> 대표기자 주진우는 2012년경 30건의 소송에 휘말려야 했고, 신변의 위협을 너무 크게 느껴 미리 유서를 써놓고 다녀야만 했을 정도다.
그런 비용과 위험에서 자유롭고, 쾌적한 연구실 공간에서 언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언론학자의 처지에서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기에, 일본의 독립언론 <와세다 크로니클>의 사례가 눈에 크게 들어온 건지도 모르겠다. <와세다 크로니클>은 와세다대학을 베이스캠프 삼아 ‘와세다 탐사저널리즘 프로젝트’를 시도한 것을 계기로 탄생했다. 일본의 기성언론이 탐사보도를 하지 않고 기껏 한다는 게 강한 권력은 피해 가면서 살인사건 같은 사회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으니, 대학이라는 장을 활용해 새로운 저널리즘운동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언론이 일본언론에게 배울 건 거의 없다곤 하지만, 대학과의 협업만큼은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한국의 대학은 팔짱 끼고 탐사저널리즘을 구경만 하고 있다. 그렇게 된 데엔 언론의 책임이 크다. 전반적인 지식과 교양을 평가하고 사실상 명문대 학벌을 중시하는 기자 선발 시스템은 대학이 언론인을 교수로 영입하고 탐사보도를 위해 발벗고 나서야 할 동기를 원천적으로 말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의외로 심각한 문제다. 막강한 인적 자원을 갖고 있는 대학이 ‘언론비판’의 역할에만 머무름으로써 사실상 ‘기레기’라는 모멸적 표현의 확산에 기여하는 결과만 초래하고 있으니 말이다.
독립언론의 젖줄이라 할 후원도 당사자가 직접 호소하기보다는 대학이 나설 때에 훨씬 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게 아닐까? 진실탐사그룹 <셜록> 대표기자 박상규의 다음과 같은 호소를 대학이 대신 해주면 안되겠느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뭘까요? ‘좋은 기사는 통한다’라고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아마추어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왓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왓슨’은 <셜록>을 유료로 후원하는 회원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나는 기자들이 출판시장에 눈독을 좀 들이면 좋겠다. “기자 중 유일하게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사람이 저일 겁니다.” 주진우의 말이다. 뻐기려는 개그 코드로 한 말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평소 “기자들이여, 제발 베스트셀러 좀 많이 내라!”는 주장을 해온 나로서는 이 말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다. 서양의 베스트셀러 저자들 중엔 기자들이 많다. 한국은? 거의 없다. 베스트셀러를 써보겠다는 열망을 가진 기자들보다는 기자직을 이용해 정관계에 진출하겠다는 야심을 가진 기자들의 수가 훨씬 더 많다. 기자들이 출판시장을 공략하는 건 전문성을 키우는 좋은 수단일 뿐만 아니라 출판을 독립언론의 일환으로 이용하는 언론개혁이다. 언론개혁을 원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사서 읽지 않는다면 그건 위선이 아닐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금주의 서평은 국회도서관의 승인을 받아 전재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www.nanet.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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