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 교수의 감성물리 (33) 볼츠만 두뇌

김광석 승인 2022.05.15 11:08 | 최종 수정 2022.05.16 10:42 의견 0

통계역학은 엔트로피를 ‘경우의 수’와 연결 짓는다. 그러므로 고립된 시스템의 엔트로피 값은 그대로 유지되거나 증가하기만 할 뿐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는 열역학 제2법칙을 통계적 관점에서 이해해 보면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단지 다른 사건들에 비해 경우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교실 뒤 구석자리에서 누군가 방귀를 뀌면 방귀 가스를 구성하는 분자들이 교실 공간 전체로 퍼져 나가 결국에는 맨 앞줄에 있는 학생도 그 냄새를 맡게 된다. 하지만 이미 교실 가득 퍼진 방귀 분자들이 영화 필름을 거꾸로 돌리듯 다시 처음의 발생 장소로 집결하는 일을 경험한 적은 없다. 전자의 사건이 후자의 사건보다 경우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교실 구석의 좁은 공간에만 붉은 공이 있는 풍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경우의 수보다 전 공간에 흩어지는 경우의 수가 압도적으로 크다.
교실 구석의 좁은 공간에만 붉은 공이 있는 풍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경우의 수보다 전 공간에 흩어지는 경우의 수가 압도적으로 크다.

교실을 채운 공기 분자와 냄새를 유발하는 방귀 가스 분자를 각각 작고 가벼운 흰 공과, 붉은 공이라고 상상해 보자. 이들은 역마살을 지닌 방랑객처럼 빈 공간을 끊임없이 움직이며 어디론가 가려 한다. 흰 공이 상대적으로 많지만, 교실 구석에서 막 생겨난 붉은 공들은 가보지 않은 교실 속 다른 공간으로 탐험을 시작할 것이다. 만약 시간과 공간 해상도가 모두 뛰어난 카메라가 있어 매 순간마다 흰 공과 붉은 공들이 배치된 풍경을 계속해서 찍는다고 상상해 보자. 엄청나게 많이 확보한 사진들을 자세히 비교해 보면, 처음 방귀가 만들어지는 순간 붉은 공들이 구석에 몰려 있는 풍경에 비해 교실 안에 골고루 퍼져 있는 풍경의 사진을 더많이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동일한 풍경으로 보이지만 여러 개의 흰 공과 붉은 공들이 교실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각자의 위치를 바꾸며 다양한 ‘경우의 수’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교실 구석의 좁은공간에만 붉은 공이 있는 풍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경우의 수는 교실 전 공간에 흩어져 있는 경우의 수보다 압도적으로 적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차이는 공들 수의 규모가 클수록 더욱 급격하게 벌어진다.

이를테면 엄청나게 많은 원숭이를 자판 앞에 앉혀두고 타이핑을 시키면 알파벳들의 무작위 조합이 만들어지지만, 운 좋게 ‘햄릿’ 같은 걸작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원숭이들이 우연히 ‘햄릿’을 만들어 낼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열역학 제2법칙을 통계적으로 해석해도 압도적으로 많은 ‘경우의 수’를 지닌 풍경으로 변해간다는 일종의 ‘방향성’을 부여할 수 있다.

엔트로피 값이 큰 풍경으로 향하는 우주의 방향성을 다르게 표현하면 정렬된 상태에서 비정렬된 상태로 나아가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방귀 냄새 분자들이 발생지 근처에서만 얌전하게 정렬된 상태로만 있지 않고, 교실 안의 여기저기 흩어진 비정렬된 풍경으로 바뀌는 일종의 방향성이 있는 것이다. 비정렬된 풍경이 압도적으로 많은 경우의 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며칠 전 방 안을 깨끗하게 정리 정돈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방의 풍경이 자꾸만 엉망으로 어지럽혀지며 비정렬된 풍경으로 변해가는 것은 열역학 제2법칙이라는 우주의 심오한 원리에 의한 피할 수 없는 결과인 것이다.

분자들이 교실 안에 골고루 퍼져 있는 모습이 가장 경우의 수가 많기는 하지만, 매 순간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간혹 분자들이 듬성듬성 분포하거나 몰려있는 비균질적인 풍경이 나타나는 경우도 존재한다. 통계역학에서도 평형상태는 최대 엔트로피를 유지하지만, 실시간으로 그 변화를 지켜보면 최대값에서 조금 줄어들었다가 금세 최대로 복귀하는 일종의 노이즈 같은 ‘요동(fluctuation)’ 현상을 볼 수 있다.
분자들이 교실 안에 골고루 퍼져 있는 모습이 가장 경우의 수가 많기는 하지만, 매 순간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간혹 분자들이 듬성듬성 분포하거나 몰려있는 비균질적인 풍경이 나타나는 경우도 존재한다. 통계역학에서도 평형상태는 최대 엔트로피를 유지하지만, 실시간으로 그 변화를 지켜보면 최대값에서 조금 줄어들었다가 금세 최대로 복귀하는 일종의 노이즈 같은 ‘요동(fluctuation)’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교실 같은 거대한 우주 속 요소들은 모두 교실 안으로 흩어져 가는 분자들처럼 우주의 끝자락까지 골고루 퍼져나가 궁극의 비정렬된 상태인 최대 엔트로피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나의 몸은 왜 생명을 유지하며 수십 년을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일까? 죽음 이 후 살이 썩어, 분해되어, 흙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오히려 열역학 제2법칙에 맞는 것이다. 분자, 세포, 조직, 근육, 살, 피부, 뼈들이 내 몸에 엉겨 붙은 채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보다는 그들이 드넓은 우주 공간으로 흩어지는 것이 더 엔트로피를 크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생명을 유지하며 존재하는 것은 교실 안의 방귀 분자가 전체 공간으로 퍼지지 않고 한곳에 몰려있는 것과 같은 상황인 셈이다. 압도적으로 큰 경우의 수와 엔트로피를 지닌 우주 속 먼지로 흩어지는 사건과 비교했을 때, 너무도 희박한 경우의 수를 지닌 그 사건이 나의 삶인 것이다. 거대한 우주적 관점에서 나의 생명은 수많은 원숭이가 우연히 만들어 낸 ‘햄릿’ 같은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 산과 바다, 지구라는 행성, 태양계의 행성, 태양계와 은하계가 크고 작은 덩어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 역시 궁극의 비정렬 상태로 나아가려는 우주의 방향성에 반하는 모습이다.

현실적 관점에서 엔트로피가 커지는 방향의 사건이 거의 유력하게 일어난다는 방식으로 열역학 제2법칙을 인정했지만, 엄밀히 말해 갑자기 엔트로피가 다시 작아지는 사건들이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하기는(improbable)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불가능(impossible)하지도 않다. 현실적 관점에서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래도 기적을 기대하듯 자꾸만 상상력을 자극시킨다. 세상의 역사를 살펴보거나 개인이 살아가는 과정을 돌이켜 봐도 마치 안개나 숲의 가지들처럼 빼곡하고 복잡한 궤적을 남기며 무수한 우연들이 무심하게 지나가는 것 같지만, 분명 ‘회귀’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특별한 순간과의 조우가 있다.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합리화일지는 몰라도 분명 처음 경험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오래전에 이미 경험한 것 같이 익숙한 기시감이 들거나 지금 일어나는 일을 무의식이 미리 예상하고 있던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놀랍게도 물리 이론 중에도 충분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반드시 초기 상태와 가까운 상태로 회귀한다는 푸앵카레의 재귀정리(Poincaré recurrence theorem)가 있다. 즉, 교실 구석에서 발생한 방귀 분자는 교실 전체로 골고루 퍼져 나가는 것이 가장 유력하지만, 다시 처음으로 회귀하는 일이 언젠가는 일어난다는 것이다. 물론 회귀가 일어나는 그 ‘언젠가’는 기약할 수 없다. 종교나 신화에서 사용하는 ‘억겁’이나 ‘Aeon’이라는 단어처럼 그 회귀의 시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해도 될 만큼 긴 시간일지도 모른다. 설령, 그 회귀의 순간을 마주한다 하더라도 회귀의 순간은 ‘찰나’처럼 너무도 짧아 허무하게도 못 보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살아있는 이 시간이 어쩌면 그 기약할 수 없는 회귀의 순간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커다란 우주를 ‘교실’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교실 공간에 방귀 분자가 골고루 퍼진 것처럼 그 거대한 우주가 이미 궁극의 비정렬 상태 혹은 최대 엔트로피의 평형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분명 방귀 분자들이 교실 안에 골고루 퍼져 있는 모습이 가장 경우의 수가 많기는 하지만, 매 순간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간혹 분자들이 듬성듬성 분포하거나 몰려있는 비균질적인 풍경이 나타나는 경우도 존재한다. 통계역학에서도 평형상태는 최대 엔트로피를 유지하지만, 실시간으로 그 변화를 지켜보면 최대값에서 조금 줄어들었다가 금세 최대로 복귀하는 일종의 노이즈 같은 ‘요동(fluctuation)’ 현상을 볼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관측하는 우주와 은하계, 태양계와 지구, 산과 바다, 수많은 생명체 같은 모든 존재는 이 궁극의 최대 엔트로피 평형상태를 유지하는 거대 우주 속에서 일어난 작은 “요동”의 결과일지 모른다. ‘우리 우주’는 교실이라는 ‘거대 우주’ 속에서 분자들이 엉겨 붙는 아주 작은 ‘요동’에 의해 일어난 것인지 모른다.

통계역학적으로 우주, 은하, 지구, 산, 나무, 나는 최대 엔트로피를 유지하는 거대 우주의 평형상태에서 요동으로 생겨난다. 엔트로피 변화가 작은 요동이 더 빈번하므로 우주가 생기는 것보다 뇌만 생기는 것이 더 빈번하게 일어날 확률을 지닌다.
통계역학적으로 우주, 은하, 지구, 산, 나무, 나는 최대 엔트로피를 유지하는 거대 우주의 평형상태에서 요동으로 생겨난다. 엔트로피 변화가 작은 요동이 더 빈번하므로 우주가 생기는 것보다 뇌만 생기는 것이 더 빈번하게 일어날 확률을 지닌다.

물론 현재의 우리 과학 지식은 우주가 작은 점에서 빵(Bang)하고 터져 팽창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즉, 과거에는 엔트로피가 아주 작았고, 점점 커져가는 중이라고 믿고 있다. 생명이 생기는 과정도 우주의 근원 입자가 뭉쳐져 분자와 물질을 이루고, 태양과 지구를 만들고, 특별한 조건에서 원시 생명체가 만들어져 점진적인 진화의 과정을 거쳐 지금의 우리가 만들어졌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우주를 먼지보다 더 작은 존재로 간주하는 ‘거대 우주’를 가정한다면, 평형상태에 있는 그 ‘거대 우주’의 최대 엔트로피가 아주 조금 줄어드는 ‘요동’으로도 충분히 ‘우리 우주’ 정도는 생겼다 사라질 수도 있다. 어쩌면 팽창해가는 우리 우주의 138억 년이라는 시간은 ‘거대 우주’의 큰 시간 스케일에서는 찰나처럼 짧은 ‘요동’의 과정에 해당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즉, ‘거대 우주’의 최대 엔트로피에서 우연히 줄어들었다가 다시 최대값으로 복귀해 가는 그 짧은 과정에 138억 년이 흘렀는지 모른다.

황당하고 어이없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황당한 논리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자. 통계역학은 교실 공간이라는 거시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미시 스케일 속 분자들의 개별적 운동에 대한 인과적 예측을 포기했다. 대신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 결과를 우연과 확률로 표현한다. 분자들의 개별적 운동에 대한 인과적 예측이 우연과 확률 속에 묻혀 버린 것이다. 그래서 통계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성의 바다에서 거품처럼 우연히 생겨난다. 하지만 통계역학은 그 우연을 기반으로 거시세계를 아주 훌륭하게 설명한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 우주가 ‘거대 우주’의 시간 스케일에서 ‘요동’ 같은 찰나이며, 거대 공간 스케일에서도 먼지보다 작은 존재라면, 우리 우주를 구성하는 존재들 역시 개별적 인과과정을 우연과 확률 속에 묻어 버릴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인과론적 과정을 무시하고 우연한 ‘요동’의 결과로 존재의 이유를 설명할 경우, 아주 기묘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즉, 태양이 먼저 만들어진 다음에 지구가 형태를 갖추었다는 인과론적 과정을 우연과 확률 속에 묻어 버리면 태양계 없이 지구가 우연히 ‘요동’의 결과로 생겨날 수 있다. 지구 없이 나무가 우연히 ‘요동’의 결과로 생겨날 수 있다. 사과 나무 없이 사과가 우연히 ‘요동’의 결과로 생겨날 수 있다. 원시생명체로부터의 진화 과정 없이 인간이 우연히 ‘요동’의 결과로 생겨날 수 있다.

실제 통계역학 이론에서 최대 엔트로피를 유지하는 평형상태에서 엔트로피가 잠시 줄어드는 ‘요동’은 그 골짜기의 깊이가 얕을수록 더 자주 일어난다고 잘 알려져 있다. 쉽게 말해, 엔트로피가 덜 낮아지는 ‘요동’이 더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러므로 ‘요동’의 깊이가 더 얕은 사건이 더 빈번하게 일어난다. 따라서 깊은 골짜기의 요동(즉, 엔트로피가 상대적으로 더 낮은)으로 태양계가 생기는 것보다, 얕은 골짜기의 요동으로 인한 지구의 우연한 생성이 더욱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렇다면 지구가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보다 산 하나만 생기는 것이 더욱 빈번하다. 산 하나가 우연히 생기는 것보다 살아있는 인간 한 명이 갑자기 출현하는 것이 더욱 자주 일어난다. 즉, 태양도 없고, 지구도 없고, 산도 없고, 텅 빈 우주공간에 나 혼자, 갑자기 출현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흔한 일이다. 그렇다면 내 몸에 팔, 다리와 몸통이 다 붙어 있는 채로 내가 우연히 출현하는 것보다 나를 인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물질 덩어리인 뇌 하나만 달랑 출현하는 것이 더욱 흔하게 일어난다. 즉, 텅빈 우주에 존재를 인지하는 뇌 하나만 출현하는 것이 가장 빈번한 사건이다.

어쩌면 악마는 진짜 진리를 인간에게 알려 주기 싫어서 두뇌만 남은 우리에게 조작된 가상현실을 인지하게 만들어 잘못된 추론을 하도록 조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경험하고 인지하는 이 모든 삶의 순간이 조작된 꿈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쩌면 악마는 진짜 진리를 인간에게 알려 주기 싫어서 두뇌만 남은 우리에게 조작된 가상현실을 인지해 잘못된 추론을 유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경험하고 인지하는 이 모든 삶의 순간이 조작된 꿈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좀 더 극단으로 가보자. 동일한 논리로 추론해 보면, 관측 존재의 대상이 생겨나는 것보다 가상 현실같은 기억과 데이터의 형태로 정보만 뇌 속에 저장되는 것이 더욱 빈번하게 일어난다. 태양이 만들어지는 것보다, 태양에 대한 이미지와 정보를 요약한 데이터가 만들어지는 ‘요동’이 더욱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러므로 평형상태의 최대 엔트로피를 유지하고 있는 ‘거대 우주’에서는 실체가 있는 ‘우리 우주’가 생겨나는 가능성보다 대상을 인지할 최소한의 덩어리인 뇌가 그 대상의 데이터 정보만 저장한 채로 허공에 떠 있을 가능성이 더욱 유력한 것이다. 지금껏 우리가 관측한 모든 우주와 나의 삶은, 텅 빈 우주공간에서 뇌 하나 달랑 남은 채 꿈을 꾸고 있는 가상현실 같을 가능성이 가장 유력한 셈이다. 138억 년이라는 우주의 나이조차 ‘요동’으로 간주되는 평형상태의 ‘거대 우주’의 긴 시간 스케일에서, 우리의 삶은 어쩌면 최소한의 물리적 인지구조에서 일어나고 있는 한순간의 꿈인 것이다. 10여 년전 물리학자들은 이 황당한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했고 ‘볼츠만 두뇌’라는 이름으로 대중적으로도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만약 텅 빈 우주공간에 고독하게 존재하는 ‘볼츠만 두뇌’가 지니고 있는 기억과 정보조차 모두 악마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면? 이를테면 우주에서 실제 생겨날 법한 가상현실을 저장시켜 줘야 하는데, 진짜 진리와 다른 내용을 우리의 뇌 속에 주입한 것이다. 그것도 아주 교묘하게 조작되어 진리처럼 보이도록 말이다. 악마는 우주의 진짜 진리를 인간에게 보여주기 싫었던 것이다. 약 400여 년 전 데카르트도 비슷한 고민을 했다. ‘볼츠만 두뇌’가 조작된 가상현실을 인지하는 모습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도 악마가 의도적으로 우리의 경험적 관찰과 사유에 끼어들어 잘못된 추론을 하도록 조작하고 있다면 어떨까? 이 화두는 인간이 과연 제대로 된 지식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비록 악마에게 속고 있지만 속고 있는 자신의 존재 자체는 부정할 수는 없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유명한 명제는 이렇게 탄생했다. 즉, 인지하는 관측 대상은 악마에 의해 조작된 가상 현실같은 것일지 몰라도, 최소한 속고 있는 관측자 자신이라는 존재는 사실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데카르트가 말하는 ‘나’는 좀 모호하다. 중세시대의 영향으로 그는 세상을 ‘정신’과 ‘물질’이 섞여 있는 이원론적 세계로 이해했다. 즉, ‘물질’은 공간을 점유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고, 육체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물질로 구성된 육체의 감각이 ‘송과선’이라는 독특한 기관을 통해 ‘정신’에 전달된다고 주장했다. 반면 ‘물질’과 구분되는 ‘정신’의 속성은 ‘사유하는 것’이므로 육체 없는 사유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물질의 감각 신호가 ‘송과선’을 통해 사유하는 ‘정신’과 연결될 수 있다면 ‘송과선’과 ‘정신’ 역시 물질적 속성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예를 들어, 광케이블이나 와이파이를 통해 데이터가 컴퓨터에 전달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아마도 데카르트가 의도한 ‘정신’은 컴퓨터가 데이터를 읽거나 연산하는 ‘인지과정’ 자체에 해당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지과정’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추상적인 것이지만 그 ‘인지과정’에는 아날로그 전파신호를 컴퓨터가 인지할 수 있는 디지털 신호로 변환하는 물질적 장치와 그 디지털화된 정보를 처리하기 위한 중앙처리장치(CPU)나 주기억장치(RAM/ROM)라는 물질적 하드웨어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유선 LAN 케이블이나 무선 와이파이를 통해 컴퓨터로 주입되는 것을 인간의 육체적 감각에 비유하면 ‘볼츠만 두뇌’는 정보의 외부유입 없이 이미 방대한 용량의 정보를 하드드라이브나 캐시메모리에 품고 있는 상황이라 볼 수 있다.

실재하는 대상은 없고 삶이 가상현실 같은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컴퓨터가 만들어 낸 ‘사과 이미지’가 실물을 카메라로 찍어 데이터화한 것인지, 아니면 기능 좋은 포토샵 소프트웨어로 만든 것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과 같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는 ‘사과’라는 것이 현실 세상에 정말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이런 류의 질문은 데카르트뿐 아니라 다양한 서양 철학자들을 거쳐 지금도 여전히 논의되고 있으며, 기원전 중국 장자의 ‘나비 꿈’이나 고대 힌두교 경전에도 등장한다. 심지어 현대에 와서는 우주론이나 양자역학의 새로운 해석에도 유사한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 이 회의주의적 질문에 대한 반론은 철학과 물리학의 관점에서 모두 가능하다. 물리학적으로 따지고 들자면 진공 상태의 차가운 우주공간에서 고도로 복잡한 세포와 신경조직이 그 구조를 유지하며 작동하는 것 자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거대 우주’의 무한한 가능성은 우리가 여지껏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최소한의 물리적 형태를 유지하며 생존하는 ‘볼츠만 두뇌’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재할 수 없게 만든다. 통계적 추론의 결과인 ‘볼츠만 두뇌’를 오히려 통계의 특성을 이용해 반박하는 방법도 가능하다. 설령, ‘볼츠만 두뇌’라는 물리적 구조가 우주공간에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더라도 그것을 인지하는 과정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과정은 많은 가능성 중에서 일관성을 위해 소수의 특정 가능성으로 추려가는 과정이다. 수학 문제를 푸는 과정이 그렇고, 모든 사유의 과정이 그렇게 경우의 수를 줄여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볼츠만 두뇌’가 ‘우연’이라는 ‘요동’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설령 세상에 대한 엄청난 데이터를 지니고 있더라도 논리적인 사고를 진행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볼츠만 두뇌’의 사유는 정신병자들의 아무말 대잔치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분명 우리는 수학문제를 풀기 위해 엔트로피가 줄어드는 사유 과정을 경험하고 있다.

이 순간 경험하는 우리 삶의 실체는 클라우드 데이터로부터 수조 속 뇌에 주입되고 있는 가상현실이 아닐까? (그림출처:위키피디아)
이 순간 경험하는 우리 삶의 실체는 클라우드 데이터로부터 수조 속 뇌에 주입되고 있는 가상현실이 아닐까? [그림출처 = 위키피디아]

현대 철학자들도 ‘볼츠만 두뇌’와 유사한 개념의 ‘수조 속 뇌’라는 표현을 사용해 동일한 논의를 하고 있다. 즉, 당신은 사실 예전부터 몸은 없고, 뇌만 달랑 남겨진 상태로 장기 보관용 수조 속에 담겨 있었다. 대신 정교한 회로에 의해 뇌의 신경조직들이 외부 컴퓨터와 연결되어 가상현실을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조 속 뇌’를 반박하는 가장 편한 방법은 법정의 규정처럼 입증 책임을 회의주의자의 몫으로 넘기는 것이다. 즉, 수조 속의 뇌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수조 속의 뇌라는 것을 입증하라는 것이다. 결국 후자를 입증하지 못할 것이므로 우리는 괜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힐러리 퍼트넘(Hilary Putnam)이라는 현대 철학자는 우리가 ‘수조 속 뇌’가 아닌 이유를 언어학적 의미론에서 찾았다. 그는 만약 당신이 실재하는 현실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태어날 때부터 가상 현실만 경험했다면, 현실 경험을 한 우리가 공감하는 것 같은 수조의 ‘안’과 ‘밖’이라는 개념을 지니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번도 가상현실 밖을 벗어난 적 없는 이에게 안과 밖은 그저 다른 패턴의 이미지일 뿐이다. 이를테면 2차원에 사는 개미는 바닥에 투사된 그림자와 이미지를 통해 3차원을 경험한다. 만약 개미가 우리와 말이 통한다면 우리는 3차원에 대해 다양한 설명을 해줄 수 있지만, 개미는 결코 3차원에 대해 직관적인 공감 같은 것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평생 가상현실을 체험한 수조 속 뇌는 ‘수조 속 뇌’라는 것의 의미를 우리와 공감할 수 없다. 따라서 ‘수조 속 뇌’라는 단어의 의미를 공감하는 우리는 ‘수조 속 뇌’나 ‘볼츠만 뇌’가 아닌 셈이다.

그러나 이 주장도 한계를 지닌다. 예를 들어, 당신은 실재의 세상에서 잘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안과 밖의 의미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한 미친 과학자가 당신이 잠든 사이 당신의 뇌만 분리해 정교하게 조작된 컴퓨터에 연결해 두었다. 잠에서 깬 당신은 지난 일상과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하며 아침을 맞이하고 집을 나와 집 밖의 풍경을 감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미친 과학자가 수조 속에 담긴 당신의 뇌에 주입하는 가상현실일 뿐이다. 당신은 어젯밤 그가 당신에게 한 짓을 전혀 알지 못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떤가? 자신의 손과 볼을 쓰다듬거나 꼬집으며 “이렇게 진짜가 있잖아!”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컴퓨터가 만들어 낸 가상현실일지도 모른다. 기술이 더욱 정교해진 미래에는 어쩌면 일상 속에서조차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질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물질 없이 정보와 사실로만 이루어졌다고 섣불리 단정지을 수는 없다. 우리는 정보를 주입하고 인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물질적 기계와 전기, 빛 신호와 같은 물리적 정보의 전달 과정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물리학은 결코 물질로 구성된 우주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을 포기하는 이론은 더 이상 물리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리학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실재하는 물질세상을 인정하지 않는 관념론(Idealism)적 철학이나 세상의 모든 것을 정신적인 것으로 환원하려는 유심론(Mentalism)적 종교와 구분된다.

나는 그런 몸뚱이가 아니라네
이 몸 또한 온전히 내 것은 아니기에
나는 보통의 살아있는 존재도 아니라네
나는 ‘의식consciousness’이라네
그저 살아가기 위한 나의 갈증이었네
나를 속박했던 그것은

<아쉬타바크라의 노래> 중에서

 

김광석 교수

◇김광석 교수 : ▷부산대학교 나노과학기술대학 광메카트로닉스공학과 교수, 나노물리학자 ▷양자점, 양자링 같은 인공나노구조물이나 나노소재에서 일어나는 양자광학적 초고속현상을 주로 연구하고 생체조직의 광영상기술도 개발한다. ▷10여 년간 과학영재 고등학생 대상의 다양한 실험프로젝트를 운영 중이며 국제신문 <과학에세이> 칼럼 필진으로도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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