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끓는 청춘 시절에는 다들 집을 떠나 어디든 가고 싶다. 아득한 지평선이나 험준한 산맥을 마주할수록 떠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고, 한곳에 오래 머물기보다 어디든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고 싶은 가슴 속 바람을 지닌 이들도 있다. 동네 어르신들은 그런 것을 역마살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오래전 인류의 조상들도 막연한 설렘 하나로 사막을 건너고, 험준한 산맥을 넘었을 것이다. 어쩌면 역마살은 그 옛날 아프리카를 출발해 지구 곳곳을 누빈 수만 년 여정의 기억들이 몸속 어딘가에 각인되어 생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들뢰즈(Gilles Deleuze)같은 철학자들은 새로운 장소를 찾아나서는 유목민들의 이런 방랑 기질의 정신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지만, 유목민들의 현실은 노마디즘nomadism의 가치에 대해 생각할 경황도 없이 그저 매 순간을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양을 치는 아벨이 농사짓는 카인에게 죽임을 당한 것처럼, 그들은 정주민들의 탐욕에 이용당하거나 야만스러운 자들로 차별을 당했다. 이러한 일종의 암시 때문인지 새로운 곳을 향하고 싶은 방랑의 본능만큼 우리에게는 정착의 본능도 함께 존재하는 것 같다. 누군가는 잠시 머물다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나지만, 일부는 그곳에서 뿌리를 내린다. 터전을 잡은 곳에서 가족과 마을이 생기고 오랜 시간 반복된 익숙한 일상을 통해 그들만의 습관과 역사가 생기는 것이다.
자유전자는 입자이기도 하지만 양자역학적으로 파동의 형태로 표현된다. 전자들도 유목민들처럼 고체 속에서 원자들로 만들어진 에너지의 지형을 지나 삶의 터전을 이동하며 확장해 간다. 그러나 간헐적으로 원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없거나 다른 종류의 원자가 불순물로 대체되어 있는 경우에는, 전자의 행보에 교란과 산란이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바둑알처럼 원자로 정렬된 고체 격자의 규칙성의 정도가 줄어들며 무작위적 비정렬성(disorder)이 두드러지면, 전자 파동은 특정 영역에서 ‘국소화localization’되기 시작한다. 고체 내에서 일어나는 전자의 이러한 국소화 현상을 설명한 공로로 미국의 물리학자 필립 앤더슨(Philip Warren Anderson)은 1977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마치 유목민들이 뜻밖의 장애와 생존 요소의 결핍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옮겨 다니다 결국 어딘가에 정착하는 것처럼, 고체 속 세상의 어디로든 퍼져 가려는 역마살을 지닌 전자도 불순물(impurity)과 결핍(defect)에 의해 산들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의 풍경처럼 정착하는 것이다.
정착도 처음에는 이질적인 곳에서 이루어진다. 유목생활을 접고 특정 장소에 ‘정착’하는 과정에 환경적 요인들이 작용하는 것처럼 전자파동함수가 특정 영역에 국소화되는 정도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에너지 풍경(energy landscape)을 알아야 한다. 이를테면 산으로 둘러싸인 중심에 자리 잡은 작은 산촌 마을의 풍경처럼 전자는 에너지의 산으로 둘러싸인 풍경 속에서 국소화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정착’의 풍경 속에는 생존의 물리적 요소와 함께 그들이 택한 정서적 가치도 공존하는 것 같다.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배산임수’의 풍수는 생존의 경험에서 터득한 물리적 가치와 하늘, 땅, 물이 지닌 정서적 가치가 혼재되어 있다. 그리고 그 가치는 오랜 숙성의 과정을 통해서만 만들어진다.
‘정착’은 공간적 고립이라는 부정적 느낌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익숙함’이라는 안정적 정서를 제공한다. ‘익숙함’은 ‘여유’를 낳고, ‘숙성’은 그 ‘여유’에서 비로소 발효된다. 젊었을 때 나는 새로운 직장을 구할 때마다 다음에 일할 나라와 도시를 선정하는 고민을 미리 해야 했다. 계절이 바뀌면 천막을 걷고 짐을 꾸려 새로운 초원으로 이동하는 유목민들의 삶처럼 살아온 곳에 대한 미련보다 새로운 곳에 대한 설렘이 더 큰 마음의 동력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는 것이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짐을 꾸리는 동안은 결국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인종과 국적과는 다른 ‘정착’의 문제였다.
매일매일 같은 장소를 마주하며 반복하는 익숙한 일상에는 분명 ‘여유’가 있다. 집을 나서 사무실에 도착하는 길가의 풍경이 똑같고 우연히 만나는 이들이 익숙하다. 점심을 먹기 위해 고른 식당 음식이 익숙하고 눈인사하는 주인의 표정이 익숙하다. 계절에 따라 세월에 따라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뼈대가 되는 풍경은 똑같다. 2003년 가을부터 지금까지 똑같은 직장에서 근무를 했으니 제법 오래된 셈이다. 근무하고 몇 년이 지난 후에는 간혹 유목민의 역마살이 고개를 들기도 했지만, 어느새 나는 그 똑같음에 대한 지루함조차 익숙해져 버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모든 익숙한 것들이 갑자기 낯설어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 지금까지 매일 보던 똑같은 것들이었지만, 익숙한 풍경을 이십 년 가까이 바라보는 동안 그것들은 지금까지 감추어 왔던 새로운 심상을 이제서야 드러낸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장소에 천막을 치고 바라보던 유목민의 시선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아마도 시인들이 익숙한 것들에서 찾아내는 새로운 심상이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익숙한 일상의 여유 속에서 낯설게 반짝이는 보석을 발견하는 것은 분명 유목민의 삶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부분인 것 같다. 문화와 전통의 가치가 이런 ‘정착’의 ‘여유’와 ‘숙성’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반복적인 ‘일상’은 오랜 시간을 두고 완성하는 뜨개질이나 세월의 손때를 묻혀 광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닮은 것 같다.어제는 정년 퇴임을 하고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시골마을에서 노년을 보내고 계신 고등학교 선생님을 찾아 뵀다. 자식들 모두를 각자의 삶의 터전으로 보낸 후, 당신께서는 작은 마을에서 생의 마지막 정착을 하셨다. 느즈막하게 아침을 드신 후 매일 산책하시는 산길을 함께 걸었다. 선생님은 보물상자를 보여 주는 아이처럼 당신만의 숲속 옹달샘도 알려주셨다. 두 손으로 물 한 모금을 마신 후, 지난 세월을 회상하셨다.
“선생님 외롭지 않으세요?”
“고마 내는 여가 좋아서 죽을 때까지 살란다.”
“......”
<끝>
※그동안 김광석 교수의 감성물리를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김광석 교수 : ▷부산대학교 나노과학기술대학 광메카트로닉스공학과 교수, 나노물리학자 ▷양자점, 양자링 같은 인공나노구조물이나 나노소재에서 일어나는 양자광학적 초고속현상을 주로 연구하고 생체조직의 광영상기술도 개발한다. ▷10여 년간 과학영재 고등학생 대상의 다양한 실험프로젝트를 운영 중이며 국제신문 <과학에세이> 칼럼 필진으로도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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