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68) 제2부 농사꾼 기출씨 - 제5장 아아, 6·25 ④모진 생명 열찬이 탄생

이득수 승인 2022.03.07 21:01 | 최종 수정 2022.03.10 21:20 의견 0

5. 아아, 6·25 ④모진 생명 열찬이 탄생

그렇게 포원과 설움으로 얼룩진 봄이 지나고 바야흐로 감꽃이 피고 보리를 베고 감자를 캐고 모내기를 하는 초여름이 왔다. 온 마을의 아낙들이 모를 심다 새참을 먹는 논두렁의 진흙탕 속에 핀 연분홍빛 모미싹(메꽃)의 새뜻한 꽃송이처럼 신통한 소문이 하나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지난겨울 신불산너머로 빨갱이에게 짐꾼으로 잡혀가 그 깊은 금강골의 눈밭을 헤치고 혼자 살아온 명촌가손 기출씨도 대단하지만 기출씨가 빨갱이 가족으로 몰려 몇 달이나 도망 다닌 동안 그렇게 모질게 순경들에게 매를 맞으면서도 끝끝내 남편의 행방을 대지 않아 이빨이 흔들리고 어깨가 내려앉고 허리를 못 쓰는데다 온몸에 이열이 든 명촌댁이 그 와중에 들어선 아이를 배가 남산만큼 부르도록 아무 탈 없이 길러 곧 해산을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많이 맞고도 아이를 놓치지 않는 것을 보면 명촌댁이 참 대단한 강골이라는 이야기는 이내 생명이란 참으로 끈질긴 것이라 제가 살아날 운명이라면 어떤 난관이 있어도 기어이 태어난다는 이야기로 발전했다. 

이어 이야기는 똥줄이 범 줄보다 무섭다는 노름꾼의 문자로 번져 그 명촌댁의 뱃속에 든 아이가 그 범 줄보다도 더 무서운 아이다, 굉장히 깐지고 야무진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발전하더니 비단 그 아이뿐 아니라 눈밭에서 살아온 명촌가손 기출씨를 비롯한 집안 전체가 늘 사람이 좋고 순해 단 한 번도 남에게 해코지를 한 일이 없는 죽은 서촌댁의 뒷배라고, 모두가 조상을 잘 모신 효자 명촌가손 덕분이라고도 했다.

 

장날이 되자 기출씨는 한창 모내기철이지만 농사일을 접고 장으로 나왔다. 성냥, 비누, 호롱불기름 석유도 사야 되지만 무엇보다 아내 명촌댁의 오늘내일이면 또 아이를 낳을 것 같아서였다.

같은 마을의 소 이까리장사 이조 이상은 밧줄을 가득 지고 당시기장사 황영감은 예쁘게 물들인 댓가지로 짠 반지고리와 함지를 지고 갈퀴장사 출강김손은 대나무갈퀴와 소쿠리를 잔뜩 지고 남천내 뚝다리를 건너고 아무 장사도 않는 사람들은 쌀이나 닭, 하다못해 열무 같은 채소라도 이고 나섰지만 기출이씨 달랑 맨손이었다. 

그런 기출씨를 보고 마을사람들은 그 참 재주도 좋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하루장 사이 5일간을 대나무 반지고리나 갈퀴를 만들고 부지런히 열무를 기르고 다듬어 장거리를 만들어야 푼돈이라도 만들어 성냥과 비누와 석유를 사오지만 기출씨는 달랑 맨손으로 나가 닭 몇 마리를 사고팔아 그런 가용품은 물론 거나하게 술까지 마시고 비록 물은 좀 갔지만 파장의 생선까지 한 아름 사들고 오기 때문이었다. 

“야, 이 사람들아! 농군들이 이 바쁜 모숭기철에 농사는 안 짓고 장에는 다 무신 일이고?”

하얀 두루마기까지 잘 차려입은 일촌노인이 징검다리를 건너느라 숨이 차서 지팡이를 짚은 채 한참이나 헐떡거리며 장에 가는 사람들을 차례로 훑어보고 있었다.

“아재, 장에 가능교?”
“오냐.”

엉겁결에 인사를 하고 황급히 장터거리로 향하는 집안조카를 보고 일촌어른이 끌끌 혀를 찼다.

“남이 장에 가니 자기는 거름 지고 장에 간다카디마는 일도 없이 장에는 말라꼬 날마다 가는 기고? 쯧쯧쯧.”

못마땅한 듯 지팡이에 담뱃대를 탕 두드렸다. 그러나 이내 자신도 그들과 진배없다는 것을 깨닫고 싱긋 웃으며 다리를 건넜다. 그저 아무 낙도 없이 꿍꿍 일만 하는 사람들이 닷새 만에 장에 나가 세상구경을 하고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고 들어오는 것이 유일한 낙임을, 그렇게 하루장 사이 닷새가 지나가는 것을, 서커스나 원숭이를 끌고 오는 약장수 같은 제법 신통한 구경거리가 아닌 뭐 새로운 물건이 나온다든지 하다 못 해 멱살을 쥐고 싸우는 사람만 생겨도 그렇게 재미날 수가 없다는 것을.

모내기철이라고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것도 아니고 월사금을 내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그날은 이상할 정도로 머리에 닭을 이고 장에 오는 사람이 드물어 도무지 장사가 되지 않았다. 겨우 닭 세 마리를 사 점심때쯤 부산장꾼에게 도매로 넘기고 우선 장국밥에 막걸리부터 한 잔 마시다 어쩌면 오늘 아내 명촌댁이 몸을 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면 우선 건어물 전에 들러 미역이라도 한 곽을 사고 미역국에 넣을 광어도 제법 큰 놈을 한 마리 사야할 것이었다. 그러나 수중의 돈을 세어보니 농사꾼이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절대로 먹지 않고  깊숙이 숨겨두는 씨 나락처럼 다음 장날 장사할 밑천 몇 푼을 제쳐두면 미역 한 곽 살 돈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거기에다 마침 보리양식도 달랑달랑하는 판이라 오늘 장사가 잘 되면 다문 반말이라도 팔아갈 요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도 여럿을 낳아봐서 알지만 비록 늘 양식이 간당거리는 살림이지만 제 태어나는 날 의식이 풍성한 놈이 있고 첫밥 끓일 양식이 떨어질 경우도 있어 나름대로 다 제 타고난 먹을 복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지만 전쟁이듬해라 그런지 이번 놈의 먹을 복이 유독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기가 찬 기출씨는 우선 막걸리부터 한 잔 더 마셨다. 그리고는 고기 전으로 가서 써도 되는 돈을 세어보니 영 몇 푼 되지 않았다. 고심하던 그는 장터입구 난전에 파는 물이 가서 비늘이 다 떨어지고 눈이 흐릿한 갈치 한 무더기를 거저다 싶을 정도의 헐값으로 사서 새끼줄로 야무지게 묶었다. 아이를 오늘 꼭 낳는다는 보장도 없으니 우선은 다른 아이들이라도 먹을 생선을 산 것이었다. 하도 식구가 여럿이라 그까짓 물이 좀 날린 것이야 아무 문제가 안 되어 그저 다들 잘도 먹을 것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닭 전에 가서 장사를 좀 더 할까 머뭇거리는데

“아부지, 아부지!”

열여섯 살의 순찬이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와?”
“엄마가 알라 낳다. 아들이다!”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1남 4녀에 큰집의 귀찬이까지 합해 여섯이나 되는 딸들을 보고 맨날 ‘이 노무 가시나들. 이 노무 엔아들.’이 귀에 못이 박힐 판이라 둘째 아들이 태어난 것을 누구보다 아버지가 기뻐할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 가자!”

기분이 좋아진 기출씨가 마른 미역을 순찬이에게 넘겨주더니 

“아나. 순찬아, 강냉이박상이라도 좀 사 가자.”

빨간 지폐 한 장을 건네주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사실 기출이가 아들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얼마전 죽은 도분이까지 죽은 아이 둘을 포함해 딸 여섯에 겨우 아들 하나를 낳다보니 삼신할머니가 정해주는 일을 자기가 어쩔 수는 없지만 참으로 야속하다는 생각을 줄곧 해오던 참이었다. 다행히 외아들인 일찬이가 머리가 좋아 3학년이 된 지금까지 단 한번도 1등을 놓치지 않아 이건 뭐 개천에 용이 난 것이 아니라 남천내갱빈에 용이 났다는 소리를 수없이 듣기도 해서 외아들이지만 남의 열 아들이 부럽지 않기도 했다. 다행히 그 일찬이는 얼굴도 희고 이목구비도 반듯하며 손끝도 야무져 나중에 학교선생이나 면장쯤은 충분히 하고도 남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 아들이 있고 자신의 나이가 이미 쉰에 가까운 마흔아홉이나 되어도 그가 은근히 아들을 바라는 이유가 달리 있었다. 나중에 공부 잘 하는 장남 일찬이가 출세해서 되어 집을 떠나면 작은아들이 있어 농사를 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비록 넉넉한 농토는 아니더라도 논배미 하나하나가 모두 죽기 살기로 고생해서 마련한 목숨 줄과 같아 살아생전 절대로 팔수도 없지만 죽어서라도 남의 손에 넘어간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이었다.

 

집에 도착한 기출씨가 손에 갈치를 든 채 빼꼼히 문을 열고

“욕 받제?”

명촌댁에게 아이 여덟을 낳을 동안 단 한 번도 하지 않던 치사를 던지며

“보자아-”

고추라도 만져보려고 다가가다 갑자기

“이크!”

기겁을 하고 물러서 한참이나 넋을 놓고 아이를 바라보더니

“안 되겠다. 거름 밭에 갖다 내삐리라!” 

빽 고함을 질렀다. 태열을 심하게 해서 머리는 물론 얼굴과 어깨, 등짝까지 부스럼을 둘러쓰고 벌건 얼굴에 눈도 잘 찾기 힘든 갓난애가 도무지 사람 같지가 않았다. 아니 사람이 될 것 같지가 않은 것이었다. 아이 여덟을 낳아도 이런 아이는 처음이었다.

“순찬이 니는 뭐 하노? 퍼떡 안 갖다 내삐리고!”

또 다시 고함을 빽 지르자 여덟 살 금찬이와 다섯 살 덕찬이가 앙 울음을 터뜨리고 산모 명촌댁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아부지, 안 되지요. 그라면 죄 받지요.”

방금 아이라도 집어던질 기세의 기출씨를 순찬이가 막아섰다.

“에이, 지게미. 재수가 없으려니까...”

투덜대면서 문을 나간 기출씨가 아이 대신 들고 있던 갈치를 거름더미에 확 던지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골목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휘적휘적 논길을 걸어 뚝다리를 건너갔다. 아마도 다시 닭 장사를 하기보다는 주막집에서 종일 막걸리를 마시고 술이 취해 온갖 타령을 흥얼거리고 남천내를 건너올 모양이었다.

“금찬아, 퍼뜩 솥에 불 안 때고 뭐 하노?”

갑자기 순찬이가 고함을 빽 지르자 여덟 살 금찬이가 조갑지처럼 작은 손을 꼬물거리며 조심조심 성냥불을 켜 보릿대에 물을 붙였다. 또래 아이들 출강댁 군자나 말랑댁 광자보다 보다 키도 손도 작았지만 만사에 야무치고 집을 보거나 동생 덕찬이를 거두는 등 집안일을 돕는데 벌써 단단히 한 몫을 하는 것이었다.

“금찬아, 불붙었으면 퍼뜩 거름 밭에 칼치 주어 오너라.”

순찬이가 시키는 대로 금찬이는 지체 없이 후다닥 튀어나갔다. 또래 아이들보다 키도 작고 손도 작았지만 조그만 얼굴에 눈만 반들반들한 그 아이는 매사에 똑 부러지고 말과 행동이 모두 야물었다. 

“다 잘 씩꺼면 되는 기다. 아아는 이렇게 씩꺼서 따듬는 거  란다.”

능숙하게 세수를 시키고 아이의 귀를 펴주던 순찬이가 

“새이야, 고기를 얼른 씩꺼라. 내 금방 나가서 미역을 찾아 빨구마.”

시집간 무동에서 쫓기다시피 돌아온 언니 갑찬씨에게 말했다. 그렇게 분위기가 잡히는데

“됐다. 알라 눈떴다!”

다섯 살 덕찬이가 커다랗게 소리쳤다.

ⓒ서상균

아이가 눈을 떴다는 말에 갑찬이, 금찬이가 잽싸게 방에 가 들여다보았지만 순찬이는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아무리 쌀독을 긁어도 보리쌀 두어 줌 외에는 단 한 톨의 쌀도 없고 미역도 없었다. 여자가 해산을 하면 잘 먹고 산후조리를 잘 해야 몸이 야물지 그렇지 못하면 몸이 부실해지는 것은 물론 그런 상태로 함부로 무논에 들어가 모를 심거나 몸을 차게하면 큰 병이 된다는 것을 여러 번 보고들은 순찬이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아버지가 준 빨간 지폐로 적으나마 쌀 반 되라도 쌀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쳐다보니 철없는 덕찬이가 강냉이박상이 담긴 바가지에 코를 박고 한 창 먹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아이를 낳고 아직 물 한 모금을 넘기지 못 한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 방에 들어온 순찬이가 맥을 놓고 널브러진 명촌댁을 가만히 들여다보는데 아이를 낳느라 용을 써서 그런지 아이를, 그것도 모처럼 낳은 아들을 갖다버리라는 기출씨의 말에 섧어서 그런지 얼굴이 온통 땀인지 눈물인지도 모를 물기에 젖고 눈두덩이 푸석푸석 했다.

“엄마-”

순찬이가 다가가 앉으며 손을 잡는데 슬며시 눈을 뜬 명촌댁이

“야야, 쌀이 없제. 너거 아부지 보고 오늘 집에 올 때 보리쌀이라도 좀 팔아오라 캤는데 빈 걸로 온 모양이제. 할 수 없다. 니 지금 진장 밭에 가서 열무를 좀 뽑아 다듬어서 언양 장에 가서 팔면 돈이 몇 푼 될 끼다. 그라면 고기는 못 사도 조개나 며루치라도 좀 사오너라. 그라고 열무 뽑으러 갈 때 감자도 좀 캐서 금찬이, 덕찬이 좀 삶아 믹이라.”
 말하자

“새야, 니는 엄마하고 덕찬이 단디 지키고 있거라. 금찬아, 니는 내하고 같이 가고.”

소쿠리를 찾아든 순찬이가 종종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막상 밭에 도착하자 생각하던 것 보다 열무가 아직 덜 자라 몇 단이 되지 않았다. 아직 하지가 멀어 감자도 방금 한창 알이 드는 판이라 아까운 생각이 들어 우선 급한 고비를 넘길 만큼만 캐어 담고 새빗도랑에 와서 감자와 열무를 깨끗이 씻었다. 겨우 다섯 단의 열무를 팔아야 몇 푼이 되지도 않을 것 같아 늘 양식이 달막거리는 큰 집 대신 살림이 넉넉한 옆집 상천댁이나 앞집 접동댁에 가서 쌀 몇 되를 꿀려다가 자존심이 상해 그만 두었다. 그리고는 바로 열무를 이고 장터로 향하는데 갑찬이가 대문밖을 내다보는지라

“새이야, 니는 집에서 감자를 삶아서 엄마도 좀 주고 너거도 묵어라. 그라고 집에 뭔 일 있으면 금찬이 시키서 내 한테 연락해라. 내 채소전에 있으꾸마.”

하고는 재빨리 골목을 벗어나 허겁지겁 남천내의 뚝다리를 건넜다. 한 푼이라도 더 받아야 하지만 물건도 변변찮고 마음도 급해 헐렁헐렁 팔아버리고 돈을 세어보니 쌀 한 되 팔기에도 부족할 것 같았다. 

수중에 돈을 들여다보며 곰곰 생각하던 순찬이가 다시 반티를 이고 중학교 앞 미나리꽝으로 향했다. 수중에 돈을 몽땅 털어주고 미나리 아홉 단을 산 순찬이는 이번에는 아까 열무를 팔았던 자리에 앉아 미나리를 펼쳐놓았다. 이제 열여섯, 겨우 처녀티가 날까말까 한 당찬 순찬이를 보며 사람들이 허허 웃거나 욕본다고 치사를 하며 한두 단씩 팔아주어 금방 미나리가 동이 났다. 용기백배한 열여섯의 어린 처녀는 이번에는 미나리 스무 단을 받아다 또 금방 팔았다. 이렇게 세 번을 왕복하니 어느 듯 해가 기울고 있었다. 

수중의 돈을 세어보던 순찬이가 그 제서야 활짝 웃더니 어물전에 가서 커다란 광어 한 마리와 바로 옆의 건어물상에서 미역 한 곽을 사고 시계 전에 가서 이제 막 전을 걷는 다부쟁이 평동댁이에게서 쌀 서 되를 팔았다. 신명이 나서 남천내 뚝다리를 건너오는데 아버지 기출씨가 그 새 술을 더 마셨는지 벌건 얼굴로 물가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물속을 바라보며 무슨 사설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부지, 집에 갑시더.”
“그래. 니 먼저 가거라. 그런데 이기 다 웬 기고? 뭐로 가주고 고기고 미역이고 쌀로 샀노?”
“아부지, 내가 마 재주를 좀 부맀다 아잉교.”

기출씨가 좀체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순찬이는 급한 마음에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우물가에는 아직 얇은 햇빛이 남아 고기와 미역을 씻고 다듬은 순찬이가 깜깜한 부엌에 미역국을 끓이고 밥을 하느라 불을 지피자 그림자가 펄럭펄럭 했다. 밥이 뜸이 드는 구수한 냄새에 다섯 살 덕찬이가 침을 꼴깍거리자 상을 차리던 순찬이는 어머니의 밥그릇 옆에 덕찬이의 국과 밥도 조금 퍼서 놓았다. 

“니가 무신 돈으로 이래 광애까지 사왔노?”

아직도 얼굴에 눈물자국이 얼룩덜룩한 명촌댁이 순찬이의 부축을 받고 일어나 눈물을 주르르 흘리더니 이내 숨도 쉬지 않고 사정없이 미역국에 만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산모가 제대로 먹지 못 해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싶어 순찬이가 다시 국과 밥을 퍼 주고 꼴깍거리는 금찬이와 자기 몫의 국을 퍼고 양푼이에 밥을 담아 상을 차리는데 벌써 젖이 돌았는지 명촌댁이 갓난애를 안고 젖을 물리기 시작했다. 이어

“순찬아, 갑찬아, 금찬아, 덕찬아, 야 이노무 가시나들아!”

삽짝에서 술이 남천장이 된 기출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두 딸이 잔뜩 겁을 먹고 밥숟가락을 멈추는데 

“괜찮다. 어서 묵고 상 치아뿌라!”

순찬이가 마루로 내려서며

“아부지 오셨능교? 어서 저녁 잡수소.”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 상을 차리는데 다리가 휘청했다. 여태껏 밥 한술을 넘기지 않은 것이었다.
   

아직도 신불산의 빨치산들이 간간히 마을을 급습하고 소와 쌀을 뺏어가기는 했지만 이제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 정도는 아니었다. 차츰 공비출몰 횟수도 줄고 장날의 인파도 늘고 분위기도 차분해졌다.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2021년 4월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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