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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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3 00:00 | 최종 수정 2017.0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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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닐스 보어의 개인 문장과 주역의 태극팔괘도.
빛은 입자일까, 아니면 파동일까? 답은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하다’이다. 전자와 양성자에게 꼭 같은 질문을 한다면? 역시 마찬가지다. 놀랍게도 이들도 입자이면서 파동이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생긴다. 입자와 파동은 대립적인 개념인데 어떻게 하나의 물질이 그 같은 대립적인 성질을 동시에 갖는다는 말인가?
그러나 우주는 우리의 상식 밖이다. 빛과 전자, 양성자 등 미시세계의 기본입자인 양자(quantum)은 입자성과 파동성이라는 두 가지 대립적이면서도 상보적인 속성을 갖는다. 이것이 바로 닐스 보어의 상보성 원리(complementarity principle)이며 양자역학의 물리적, 철학적 기둥이다. 보어는 대립적인 것은 상보적(Contraria Sunt Complementa)’이란 문장을 남겼다. 덴마크 사람인 그는 상보성 원리를 창안하기 이전인 1922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대가다.
그런데 상보성 원리는 어딘가 모르게 동양철학적인 늬앙스를 풍긴다. 대립적이면서도 상보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음과 양의 성질과 비슷하지 않은가? 닐스 보어는 가문(家門)의 문장(紋章)에까지 주역을 상징하는 태극도를 그려 넣었고, 노벨상 수상식장에 참석할 때에도 주역 팔괘도가 그려진 옷을 입고 참석했다고 한다. 어쩐지, 보어가 상보성 원리를 창안할 때 동양철학의 정수라는 주역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동양철학의 정수인 '주역(周易)'의 '易' 자는 도마뱀의 상형으로 알려져 있다. 글자 생김새가 도마뱀의 머리 부분과 다리 부분을 닮은 것다. 도마뱀은 하루에도 12번이나 몸의 빛깔을 바꾸기 때문에 '역(변화)'의 상징이 됐다. '역'은 세 가지 원리를 포함하고 있다. 한나라 시대의 학자 정현은 "이간(易簡)이 첫째요, 변역(變易)이 둘째요, 불역(不易)이 셋째다"라 했다. 이간은 변화의 원리가 단순해 따르기 쉽다는 뜻이며, 변역이란 이 우주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의미이다. 불역이란 이런 중에도 결코 변하지 않는 기본 원리가 있다는 것이다. '주역'은 결국 우주 삼라만상의 변화 원리를 기술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같은 우주의 변화 원리에 인간을 연결시킨 점은 흥미롭다. 하기야 우주가 아무리 광대한들 그 속에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일까. '주역'에 '천지와 그 덕을 합하고 일월과 그 밝음을 합하고 사시와 그 차례를 합하고 귀신과 그 길흉을 합하여 천지와 혼연일체가 되어 같이 흐른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우주와 인간이 하나가 되는 천인합일 사상이다. '장자'의 물아일여 사상도 여기서 비롯됐지 싶다. 결국 '주역'은 우주의 변화 원리가 인간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우주 운행 원리를 밝힌 뉴턴의 '프린키피아'에 의하면 사물의 현재 상태를 알면 과거와 미래의 상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주역'에 의하면 사물뿐 아니라 '나'에 대해서도 현재의 모습을 통해 과거와 미래까지 알 수 있다. 엄청난 '비서(秘書)' 아닌가. 동양의 점복(점을 치는 일)은 대부분 '주역의 해석'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점을 치는 방식은 달라도 그 풀이와 판단은 주역을 기초로 한다는 것이다. 설날 아침에 가족들이 둘러 앉아 운세를 볼 때 흔히 펼치는 토정비결도 주역의 음양설에 근거해 편집한 책이다.
새해를 맞아 점집들이 신년운세를 보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라고 한다. 점집뿐이랴, 요즘 젊은이들은 타로점도 많이 보고,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신년운세'를 치면 관련 사이트 수십 개가 쫙 뜰 정도다. 점신년운세를 보는 풍경은 옛날과 달라졌지만 그 마음은 비슷하지 싶다. 답답함 혹은 기대감이 아닐까. 신년운세를 본다는 것은 인과관계 중 올해의 결과를 미리 본다는 뜻이다. 혹 나쁘기라도 하면 낭패 아닐까? 실망할 필요는 없다. '주역'은 내가 바뀌면 그 인과관계 역시 변할 수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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