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인 태양 중심 지동설(태양 중심설 혹은 지동설)은 케플러와 갈릴레이를 거쳐 뉴턴에 이르러 근대과학의 정립이라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에서 곧바로 케플러로 건너뛰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사고의 도약이 그 사이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티코 브라헤의 “별은 우주 공간에 떠 있다”는 놀라운 통찰입니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코페르니쿠스까지 2000여년 동안 행성과 별은 투명한 수정천구에 붙어 있다고 여겼습니다. ‘천체가 우주 공간에 떠 있다.’는 개념이 나오지 않았다면 행성들의 타원 궤도에 관한 케플러 법칙은 탄생할 수 없었고,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도 발견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티코 브라헤(Tycho Brahe, 1546~1601)는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남쪽 끝에 있는 크누스트루프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은 스웨덴에 속하지만 그 당시에는 덴마크의 일부였던 곳입니다. 티코는 덴마크의 귀족이었습니다. 덴마크의 프레데릭 2세는 그에게 천문작업을 위해 연금을 지급하고 코펜하겐 해협의 흐벤Hven 섬을 주었습니다. 그는 여기에 천문대 우라니보르그(1576)와 스테르네보르그(1581)를 짓고 많은 조수들과 함께 천체를 관측하고 관측 자료를 정리했습니다.
초신성과 혜성 관측 ... 영원불멸 천상계와 수정천구 관념 깨뜨려
티코가 프레데릭 2세의 후원을 받을 만큼 천문학자로서 명성을 얻는 데는 1572년 11월 11일 저녁에 시작된 극적인 천체 현상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티코는 귀가 길에서 별들의 파노라마에 빠져들었습니다. 카시오페아 별자리에서 뭔가 이상하고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별자리에는 여느 때 보이지 않던 별 하나가 생겨나더니 다섯 개의 다른 별보다 더 밝게 빛나는 게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용어로 초신성(super nova)이 폭발했던 것입니다.
티코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습니다. 왜일까요? 당시에는 천상계가 완전하고 영원불멸하며 고귀한 세계라는 우주관이 널리 퍼졌을 때입니다. 또 별들은 수정천구에 붙어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별자리는 영원히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이어야 했습니다. 완전하고 영원불멸한 것은 변하면 안 되는 것이죠. 그런데 별자리에 새로운 별이 나타나 엄청나게 밝게 빛났던 것입니다. 티코는 물론 동시대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그 별은 초기에는 낮에도 보일 정도로 밝았습니다. 차츰 밝기는 줄어들었으나 18개월 동안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기간 내내 이동하지도 않았습니다. 정말로 새로운 별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 새로운 별에 대한 환상적인 이야기들이 차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티코는 이 관측을 토대로 1573년 소책자 『새로운 별 De Nova Stella』을 발표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천문학 용어인 신성(nova)는 여기서 비롯됐습니다. 티코는 신성의 점성술적 중요성을 언급하는 한편 기원전 125년 경에 히파르쿠스가 천상에서 보았다는 천체(초신성)와 비교했습니다.
『새로운 별』에 담긴 핵심적 사실은 그 새로운 천체가 별(태양계의 행성이 아니라 항성)이라는 것입니다. 티코의 면밀한 관측에 의하면 그 천체는 고정된 별(항성)들 사이에 있었고, 요모조모 따져 봐도 행성이나 소행성은 아니며 길게 꼬리를 가진 혜성은 더더구나 아닌 것은 분명했던 것입니다. 많은 천문학자들이 그 새로운 천체를 관측했지만 티코의 관측이 가장 정확했고, 가장 믿을 만했습니다. 티코의 관측 자료는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뮐러의 것보다 50배 정확했다고 합니다.
초신성의 시차 관측 못해 ... "지구는 태양을 돌지 않는다"고 착각
티코는 그 별의 시차(parallax)를 측정해보았습니다.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공전한다면 궤도 상의 한 지점과 6개월 후의 지점에서 보는 별의 겉보기 위치는 달라야 합니다. 그러나 시차 변화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그 이유는 별이 당시 생각보다 훨씬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티코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 즉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주장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티코는 1577년 밝은 혜성을 발견하고 관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혜성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분석한 결과 혜성은 행성들 사이를, 그것도 행성들의 궤도를 가로질러 여행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1572년 카시오페아 별자리의 그 초신성처럼, 이 혜성도 영원불멸의 천상계라는 오랜 관념을 깨뜨리는 중요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행성 궤도를 가로지르는 혜성의 존재는 수정천구 개념에 직격탄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초신성과 혜성 관측에 고무된 티코는 대표작 『새로운 천문학 입문』을 1587년 펴냈습니다. 그가 자신의 우주 모형을 펼쳐 보인 것은 바로 이 책에서였습니다. 티코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 체계를 수정한 독특한 우주 모형을 만들었습니다. 티코의 우주 체계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에서 후퇴한 것도, 단순히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로의 회귀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체계는 태양 중심 모형과 지구 중심 체계를 조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태양은 우주의 중심인 지구를 돌고, 다른 행성들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체계입니다.
티코의 우주 체계에서 태양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다섯 행성의 궤도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데, 수성 금성의 궤도 반지름은 지구-태양 궤도 반지름보다 작고, 화성 목성 토성의 궤도 반지름은 지구-태양 궤도 반지름보다 크다고 설정되었습니다. 그래서 티코의 우주 모형은 태양을 원점으로 돌고 있는 화성 목성 토성의 궤도 안에 지구가 들어 있는 모양이 됩니다. 이 체계에서는 주전원과 동시심, 수정천구가 제거되었고, 태양의 움직임이 행성들의 움직임과 뒤섞이는 이유를 설명해주었습니다.
티코의 우주 모형은 현상을 잘 설명했지만 일관된 체계로는 미흡했습니다. 티코는 뛰어난 관측자였지만 우주 모형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과 철학을 세우지 못한 전근대적인 과학자로 평가됩니다.
그러나 티코의 우주 모형은 천문학에서 새로운 지평을 연 중요한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늘의 별들이 수정천구(속이 빈 큰 수정구슬)의 표면에 붙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주 공간에 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개념은 당시 사람들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티코의 이 같은 주장은 세밀한 관측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티코의 ‘천체는 우주 공간에 떠 있다.’는 개념이 나오지 않았다면 케플러의 행성궤도운동 법칙과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결코 발견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티코는 프레데릭 2세의 사망으로 후원자를 잃자 1597년 흐벤 섬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1599년 프라하로 가서 황제 루돌프 2세의 후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600년 독일의 젊은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와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고, 그를 조수로 채용합니다.
티코는 케플러를 만난 지 불과 1년 만인 1601년 사망합니다. 티코의 엄청난 관측 자료는 케플러에게 넘겨졌습니다. 근대천문학의 진정한 출발점이 된 케플러의 성취는 티코의 정밀하고 방대한 관측 자료에 힘입은 것입니다.
<'우주관 오디세이' 저자·인저리타임 편집위원장>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