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르퓌에서 스페인 산티아고, 포르투갈 리스본까지 82일간 2000㎞의 대장정의 서경과 서사를 담은 산티아고 순례기 『순례, 세상을 걷다』(인타임)가 3쇄를 찍었다. 지역 출판계의 작지만 신선한 충격이다.
『순례, 세상을 걷다』는 2019년 4월 20일 초쇄 2000부를 발행한 이후 5월 31일 2쇄 1000부를 찍은 이후 12월 초 3쇄 1000부를 발간했다. 책이 잘 팔리지 않는 시대에, 그것도 신생 지역출판사의 서적이 6개월 만에 3000부를 매진하고 3쇄를 찍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는 산티아고 순례라는 인기 소재에 힘입은 바 크지만 이에 못지 않게 (비록 비전문작가의 글이지만) 간결하고 정제된 문체와 풍부한 표현력, 그리고 세련되고 깔끔한 편집과 디자인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라는 게 출판사 측의 분석이다. 출간 직후 언론의 연이은 서평도 히트를 일찌감치 예감케 했다.
저자 오동호 서울대 행정대학원 객원교수(좋은정책연구원장)를 만나 『순례, 세상을 걷다』 출판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3쇄 발간을 축하합니다. 소감은?
금년 4월에 발간한 책이 3쇄까지 이어졌으니 솔직히 기분이 좋고 즐겁습니다. 저에게 책 발간은 ‘새 생명 탄생과 같은 경이로운 일’이었습니다. 저의 고뇌와 사유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글, 직접 찍은 순례길 사진 하나하나가 다 저의 분신이죠. 책 발간 후 저자 특강도 무려 60여 회나 했으니 가히 금년은 『순례, 세상을 걷다』와 함께 보낸 한해라고 하겠습니다.
책과 강연에 쏟아진 칭찬과 격려, 부족함에 대한 질타와 비판은 모두 저의 몫입니다. 책을 쓰고 발간하면서, 또 특강을 하면서 제가 배운 것이 더 많았죠. 하여튼, 올 한해는 『순례, 세상을 걷다』와 함께해 행복했습니다.
책을 발간한 도서출판 ‘인타임’에도 고마움을 느낍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지방출판문화 발전을 위해 애쓰는 모습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어떤 점이 독자들에게 어필했다고 생각되나요? 독자나 주변 사람들에게 들은 평가가 있다면?
많이 부족한데도 독자들이 공감해줘서 감사하죠. 사실 타인과 공감하기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순례, 세상을 걷다』는 단순히 재미있는 책이 아니라 약간의 성찰과 인내를 요하는 '순례기'인데도 읽어주시고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봐준 독자들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순례, 세상을 걷다』는, 소재는 ‘산티아고 순례길’이지만 내용은 삶에 대한 성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 ‘세상을 걷는 길’에 대한 이야기죠. “청춘은 늘 불안(不安)하고 시대는 언제나 불온(不穩)하다”고 흔히 말하죠. 그래서 불확실한 미래로 고뇌하고 방황하는 청춘들에게는 희망을 얘기한 것이죠. 또 우울과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네 중장년들에게는 삶에 대한 휴식과 전환, 인생 2막을 위한 준비, 이를 위한 도전과 열정을 얘기했습니다. 이러한 묵직하지만 피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 같이 고민하고 공감해준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문장이 간결해 읽기가 쉬웠고, 또 많은 분들이 책 속의 순례 사진들이 좋다고 했습니다. 전문 작가가 아닌데도 좋게 봐주시고 많은 격려와 관심을 보내주셔서 저에게는 큰 힘이 됐습니다.
▶저자로서 내용이나 여정 중에서 가장 인상 깊고 다시 가고 싶은 곳은?
책 내용 중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프롤로그에 있는,
“드디어 길을 나선다.
나에게 있어 이 길은 무엇일까. 왜, 나는 머나먼 이국의 순례길을 걷는 걸까.”
라는 부분과
“.....순례 대장정을 마친 순례자에게 다시 물어 본다. 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느냐고, 무엇을 찾아 나섰냐고. ... 조금 손에 잡힐 듯도 하지만, 아직 해답을 온전히 알지는 못한다. 어쩌면 생애 마지막까지 붙들고 가야 할 화두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순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라고 한 에필로그입니다. 먼 길을 나서는 자의 고뇌와 길을 끝낸 자의 기분을 진솔하게 표현해봤습니다.
돌이켜보면, 2000km의 순례길 하나하나가 다 그립죠. 꼭 제가 살아온 인생의 길인 것 같아요. 그 중에서도 프랑스 ‘르퓌 순례길(Camino de Le Puy)'의 출발지인 르퓌 앙벌레(Le Puy En Velay)를 잊지 못하죠. 순례도시의 장엄함과 빨간 지붕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유려함도 있지만, 순례 대장정을 나서는 한 순례자의 설렘과 가슴앓이, 미지의 길과 세상에 대한 도전과 두려움... 뭐 이런 복잡한 심사가 고스란히 간직된 곳이죠.
르퓌에서 생장까지 이어지는 중남부 프랑스 고원지대 대자연의 아름다운 풍광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제 책을 읽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분들이 보내준 사진을 보면 감회가 새롭습니다. 오몽 오브락 고원지대, 콩크, 에스탱, 콩돔과 같은 순례길의 풍경과 천년의 순례역사·문화가 살아숨쉬는 마을들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저자 초청강연 중 청중들로부터 자주 들은 질문은 무엇이며, 가장 기억에 남는 특강은 어떤 것인가요?
젊은 청중들은 미지의 세계를 갈 때의 호기심, 열정, 도전 정신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중장년들은 자신도 순례길을 떠나고 싶은데 어떤 마음 자세와 준비를 해야 하는지, 왜 외로운 순례길을 혼자 걸어야 하는지, 걷고 나서 무엇이 달라졌는지 등에 대해 질문을 많이 합니다.
저자 초청특강은 어느곳 할 것 없이 기억이 생생하죠.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원장 정양호)의 젊은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커뮤니케이션 데이’ 강연은 젊은이들의 열정과 모험심을 자극했는지 꽤 호응을 받았고, 대구보건대학교(총장 남성희)의 ‘웰니스문화산업 최고위과정’에서는 첫 강사로 저를 초청하는 모험을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반응이 좋았던 분위기가 특별히 기억에 남습니다.
기억나는 질문이라면,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의 ‘고위정책과정’ 특강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이 정부의 리더들에게 들려주는 성찰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의미롭게 다가왔습니다. 또 대구파티마병원 관리자 워크숍에서의 특강에 이은 청중의 질문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길을 걸으면서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는지, 그렇다면 무엇이 당신을 울게 하였는지?”라는 어느 수녀님의 질문은 지금도 저를 먹먹하게 합니다.
▶카미노를 떠날 때 ‘비우자’ ‘내려놓자’고 한 다짐과 1년쯤 지난 지금 심정을 비교해 본다면?
‘비우자’, ‘내려놓자’라고 한 것은 제 인생 1막인 33년 6개월 공직생활의 무게가 그만큼 무거웠다는 반증이기도 하죠. “이 무게를 가볍게 하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인생 2막을 나설 수 없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저에게는, 공직 은퇴 후의 요동치는 마음, 삶의 격정을 진정시키는 마법이 산티아고 순례길이었죠. 길 위에서 찾은 마음의 고요라고 할까요.
그런데, 비우고 내려놓는다는 것이 늘 한결같을 수 없다는 게 우리네 삶의 비극(?)인 것 같아요. 일상에는 ‘생활’이 있는 것이죠. 비웠다 했는데 다시 채워져 있고, 놓았다 했는데 다시 붙들려 있고...
불현듯 또는 스멀스멀 다가오는 세속 욕망과의 끊임없는 갈등의 연속이죠. 그래서 책의 에필로그에 “나의 순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고 말했는지도 모르겠네요. 아무래도 다시 순례를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웃음).
그렇지만, “누구나 한 번은 길을 잃고, 누구나 한 번은 길을 얻는다”라고 말한 것처럼 산티아고 순례 대장정은 때로는 길을 잃기도 했지만, 저의 삶에 새로운 길을 얻게 해준 소중한 순간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장장 82일간 2000km의 순례가 자신에게 끼친 가장 큰 영향은 무엇인가요?
가장 큰 변화는, ‘고요’와 ‘고독과 자유’(Einsamkeit Und Freiheit)를 내 관념체계의 중심에 둔 것이죠. 현재까지는 다소간 어렴풋하지만, 더 공부하고 정진해서 그 실체를 꽉 잡아볼 작정입니다.
다음은, 삶의 중심 방향을 새롭게 설정한 것입니다. 늘 세상의 중심에 있고자 했지요. 행정과 정치, 자본의 축적과 신분의 상승. 뭐 이런 것들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고 시간을 보냈죠. “이제는 좀 바꾸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세상의 중심만이 늘 선(善)은 아니죠. 주변부도 아름답고 의미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겠지요. 삶의 고요와 자유는 방황과 고뇌 없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니까요. 진정으로 아파해야 할 새로운 주제를 찾는 길, 그것이 산티아고 순례길이었던 거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로 인생 2막을 살아가는 소감과 각오는?
나이 50에 접어들 무렵, 남은 생에 꼭 해보고 싶은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 한 기관의 CEO되기, 자전거로 세계를 여행하기, 인생 2막을 대학교수로 보내기, ‘고요명상아카데미‘를 설립해 운영해 보기”가 그 때 정한 목록의 일부입니다. 10년 정도 지난 지금 결산해 보면 이룬 것과 미완의 과제가 혼재합니다.
그 중에서도 '대학교수로 인생 2막을 보내기'는 막 실현된 셈이죠. 대학 캠퍼스에서 느끼는 자유로운 공기, 새로운 에너지를 가져다주는 젊은 청춘들과의 교류와 교감이 흥미롭습니다. 늘 천착해 왔던 지방분권과 자치, 국가와 지방의 정책에 대해 무엇이 좋은 정책인지를 대학에서 연구하고 강의하는 것은 저에게 주어진 또 다른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내년에는 선문대학교 행정학과 교수로 초빙되어 ‘지방자치행정론’을 강의할 계획인데, 지방현장의 과제에 대해 좀 더 연구해 보고자 합니다.
▶올 한해를 보낸 소감과 새해의 주요 계획은 무엇인가요?
올 한해는 초보 대학교수 생활과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이 들려주는 리더의 길” 특강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청춘의 열정이 다시 살아난 해이기도 하죠. 하여튼, 산티아고 순례길과 함께 울고 웃고 한 한해였습니다.
내 년에도 많이 바쁠 것 같습니다. 우선, 저의 전공인 지방분권과 자치, 지방재정 문제 대해 책도 쓰고, ‘좋은정책연구원’도 제대로 모양을 갖춰 운영하면서, 각종 칼럼이나 기고를 통해 사회에 대해 발언도 활발히 하려고 합니다.
아울러, 대학 강의와 아직도 들려줄 게 많은 산티아고 순례 특강을 통해 ‘학문과 삶’의 고민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또 다시 길을 나설까도 합니다.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아를에서 산티아고까지 1600km의 ‘아를 순례길(Camino de Arles)’을 걷거나 ‘자전거와 함께하는 북유럽 여행’을 해볼까 합니다. 단언컨대, 세상은 길을 나서는 자의 것입니다.
<동아대 겸임교수·인저리타임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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