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퓌(Le Puy)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지트(Gite)
가을이 끝나간다. 이제 르퓌(Le Puy) 순례길을 시작한 지도 25일, 지나온 거리는 700여km다.
천년이 넘은 순례길에는 저마다의 사연과 흔적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이게 역사가 되고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언제나 맞이하는 하늘도, 불어오는 바람도 같을 수는 없다. 돌이켜보면, 순례길의 하늘과 바람과 별은 내 마음 속에서 늘 요동치고 있다. 하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순례길은 또 하나의 우주가 된다. 끝이 없는 무한의 공간이다. 그 속에서 순례자는 저마다 하나의 별이 되겠지...
순례길은 마음의 길이다. 때로는 경건함을, 때로는 즐거움을, 때로는 괴로움을 안겨주는 길이다.
순례길에도 '3락(樂)'이 있다. 첫째는 아침 일찍 길을 나서면서 오늘은 어떤 사람, 어떤 마을을 만날까 하는 설렘의 즐거움이다. 둘째는 하루종일 걸은 후에 도착한 지트(Gite)에서 샤워를
마치고 진한 커피를 한잔하는 정갈함의 즐거움이다. 셋째는 숙소인 지트(Gite)에서 순례자들이 모여 앉아 같이 저녁식사를 하면서 대화하고 와인 한잔 곁들이는 노변정담(爐邊
情談)의 즐거움이다.
이 모든 것이 한 편의 시(詩)고 소설이다.
길 위의 인연, 우연일까 필연일까...
순례길에서는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져 스쳐지나가는 사람도, 며칠간 같이 걷고 자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 보면 정도 들고 애환도 함께한다. 티에모, 앙리, 엘레오노레, 파비오와 오르넬라,
애니타... 이름만 들어도 그리워진다.
독일 청년 티에모(Thiemo Timo)는 "Wy Camino?"하면서 늘 삶을 고민한다. 내가 걷는 순례길의 의미를 덩달아 각인시키는 동반자다. 앙리(Henry)와 엘레오노레(Eleonore)는 파리에서 온 풋풋한 20대 초반의 청춘남녀다. 순례길에서 만나 늘 같이 붙어 다닌다. 나의 프랑스 선생이다. 시시콜콜한 질문에도 늘 정성스럽게 답한다.
파비오(Fabio)와 오르넬라(Ornella)는 아르헨티나의 멘도사에서 온 젊은 약혼자다. 늘 싱글벙글하면서 요리도 잘 한다. 오르넬라가 해준 파스타와 마지막 작별 파티 때 나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준 야채복음밥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독일 베를린에서 온 필립은 야영하면서 리스본까지 순례하고 있는 씩씩한 젊은이다.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사람은 애니타(Anita)다. 50대 후반으로 르퓌 순례길의 몬트리얼(Montreal-du-Gers)에서 지트(Gite d'etape Compostela)를 직접 운영한다. 불어는 물론 영어, 스페인어, 독일어도 능통하다. 내가 길을 잘 못들어 로카마듀어로 같이 간 순례자다. 인생의 원숙미를 보여준다.
로카마듀어 지트에서 오스피탈레 도미니끄와 함께 나눈 밤늦은 대화는 이번 순례길의 백미다.
"현역에서 왕성하게 일도 했지만, 내 마음이 가장 정갈해지는 지금이 내 인생의 최고다" (지트에서 자원봉사자로 10년째 생활하는 도미니끄)
"하루하루 열심히 걷는 것, 그 것이 바로 내삶이다 "(애니타)
33년간 공직의 길을 막 끝낸 나에게 들려주는 경구(警句)다.
이처럼 순례길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은 저마다 스승이다. 그간 공직의 길에서도 많은 스승과 도움을 주는 현인들을 만났다. 늘 윗 분들의 총애를 받으면서 크 온것 같다. 내 공직인생 최고의 스승은 이덕영 전 경남부지사이다. 일하는 법을, 삶의 진중함을 배웠다. 늘 걱정해주시고 격려해 주신다. 어느덧 선배가 되고 기관의 장(長)이 되었을 때, 나는 후배들에게 또 하나의 선생이 되었을까 자문해 본다.
순례문화가 꽃피는 곳, 지트(Gite). 오늘날, 산티아고 순례길이 세계 최고의 순례길이 된 것의 중심에는 독특한 숙박 시스템이 자리잡고 있다. 스페인에서는 '알베르게(ALBERGUE)' , 프랑스에서는 '지트(GITE)라 부른다. 아주 저렴한 가격에(5~10유로 정도), 매우 쉽게(도착한대로 이용하거나 메일이나 전화로 예약 가능)순례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유형 숙박시설이다.
지트는 단순한 숙소가 이니다. 지트는 순례문화가 교류되는 각국의 국제학교이고 해외문화원이다. 여러 나라에서 온 순례자는 또 하나의 외교관이고 문화전도사다. 나도 전파한 게 몇 가지가 있는데, 우리의 한글(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등)과 건배사 구호 "위하여!"다. 저녁 와인 잔을 기울일 때는 언제나 "위하여"라고 외친다.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지트는 저렴함에, 수도원이 운영하는 지트는 경건함에, 개인이 운영하는 지트는 아기자기한 개성에 강점이 있다. 다들 순례길을 걸은 날짜만큼 지트에 머문다.
15세기에 건축된 마법같은 건물의 렉토르의 공립지트, 음악공연과 순례길 문화유산 설명회를 개최한 콩크 뿌아 수도원 지트, 석별을 아쉬워하며 밤늦게까지 우정을 나누었던 피작의 코끼리코 지트를 순례자들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또 다시 순례길을 나선다.
이제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누구는 앞서 나가고, 또 누구는 순례를 끝내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 빈자리에 하늘과 바람, 그리고 총총한 별과 시(詩)가 대신한다.
윤동주가 말했듯이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전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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