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 간다. 걸어온 길의 거리도 점점 길어진다. 출발지 르퓌(Le Puy)에서 콩크Conques)까지는 대략 250km다.
벌써 10일째 걷고 있다. 걷는 길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요령도 많이 생겨난다. 걸을수록 머리와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길에서의 터득한 요령의 핵심은, 어떻게든 길을 잃지 않는 것과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모르면 다른 순례자에게 물어도 본다. 젊을 때와 달리 나이가 좀 들면 물어보기가 쉽지 않다. 스스로의 품위 문제도 생각하고, 혹시 실례가 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다.
그러나 모르면 동행한 순례자나 현지인에게 물어보는 게 상책이다. 주저할 일이 아니다. 언어는 꼭 말이나 문자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몸과 표정도 언어다.
르퓌 순례길은 스페인 순례길과는 좀 다르다. 스페인 순례길(Camino de Frances)의 상징은 끝없는 대평원 메세따다.
르퓌 순례길은 프랑스 중남부 산간지방에서 피레네 산맥을 향해가는 산길이 기본이다. 매일 고개를 넘고 강을 건너야 마을이 나온다. 때로는 하루 종일 걸어도 단 한 사람도 못 보는 경우가 있다. 대신 다양한 나무와 풀, 소들과 새, 드문드문 나타나는 마을, 높다란 하늘과 애기하면서 걷는다. 고요해서 좋다.
이러한 순례길에서 콩크(Conques)와 피작( Feajac)은 좀 특별한 마을과 도시다. 콩크는 마법의 마을이다. 어떻게, 이처럼 깊은 계곡에 웅장한 대성당과 마을이 만들어졌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콩크 대성당은 1050년에 시작해 1135년에 완공됐다. 본당 높이가 22m로 건립 시기나 규모면에서 결코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보다 못하지 않다고 수도사는 강조한다.
특히, 성당 정면의 팀판듀에는 지옥과 천국, 최후의 심판이 아주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수도원이며 집들이 계곡 안에 오밀조밀 붙어 있다.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초기 기독교 순교사에 있어 중요한 푸아(Foy) 소녀와 관련된 마을이라 수도원과 예배당 이름도 푸아가 들어 있다. 이런 연유로 지금은 르퓌 순례길의 중요 거점으로, 이 마을만
찾는 이도 많단다.
콩크에서 리빈악(Livinhac)을 거치면 피작이다. 피작으로 가는 길에 있는 마을 집 담벼락에 붙어있는 시 하나가 지친 순례자들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준다.
왜 이토록 긴 여행을 하는가
먼 길을 걸어가는 순례자여,
너는 어디로 가는가
너는 강과 산을 이겨내야 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하지...
카스띠야는 너를 불태우고
갈리시아는 너를 기다리고 있지...
넌 이 길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네
나의 마음을.
길을 걷는 이의 마음을 대변하는 시다. 누가 쓰고 누가 붙였을까?
해질무렵 도착한 피작은 꽤 큰 도시다. 열차도 다니는 교통의 거점이다. 2주 정도 휴가를 내어 걷는 단기 순례길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열흘간 동행했던 티모이와 알렉스는 이틀 전에 헤어졌다. 피작에는 최종7명이 함께 했다. 리더 격인 프랑스 중년의 여인 애니타, 아르헨티나에서 온 파비오와 오르넬라, 같은 또래의 대학생인 엘루아와 앙리 그리고 엘리오노레다.
이 친구들과도 일단 피작에서가 마지막이다. 일부는 귀가하고, 다른 일부는 인근 유명지역을 관광한 후 순례를 계속하기로 한 것이다.
그간의 노고를 자축하는 파티를 열였다. 특별히 나를 위해 야채 복음밥을 오르넬라가 준비했다. 레드와인의 짙은 향기가 우리를 가득 적신다.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몰랐다. 문득 하늘을 보니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살아가면서 서로의 힘든 마음을 함께 나누는 것은 큰 행복 중의 하나이지 않을까. 그들과의 파티가 잠시나마 행복한 위로였다.
피작은 퐁피드 대통령, 프랑스와즈 사강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도시의 중심에는 샹폴리옹 문자박물관이 있다.
샹폴리옹이 누구인가. '로제타 스톤'의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한 근대 이집트학의 아버지 아닌가.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바로 피작이다. 그의 생가에 지어진 문자박물관에는 우리의 한글을 비롯해 세계의 모든 문자와 관련된 자료들이 있다.
그는 이미 16살에 12개 언어를 통독한 천재다. 로제타 돌에 새겨진 글을 해독한 공로로 이집트로부터 받은 선물이 파리 콩코드 광장에 우뚝 서 있는 오벨리스크라 한다.
순례길에서 만나는 마을은 많다. 저마다 특색이 있고 사연이 있다. 그 중에서도 콩크와 피작은 르퓌 순례길의 특별한 영감을 주는 마법의 마을이었다.
이제, 나는 또다시 순례길을 걷는다.
<전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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