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고요하고, 마을은 경이(驚異)로운 르퓌(Le Puy) 순례길
아직 돌아 볼 때는 아니다. 순례는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하나의 순례길을 끝냈기에 작은 정리는 필요하겠다.
집을 떠난지 한 달, 길을 나선지 28일째 780km의 르퓌(Le Puy) 순례길을 마쳤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프랑스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와 마주한 한 달이었다. 어찌, 이토록 아름답고 가슴 뭉클한 한 편의 시(詩)를, 어디서 읽을 수 있을 수 있을까.....
길은 고요하다.
르퓌 순례길은 찻 길이나 아스팔트 길이 거의 없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마을을 만나는 산길과 들길이 대부분이다. 들리는 것은 새 소리와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천년을 이어져온 순례객들의 숨결 소리, 한번씩 내 마음을 두드리는 죽비소리뿐이다.
마을은 늘 경이(驚異)롭다.
계곡 속에 자리잡은 마을이며, 중세시대부터 만들어진 성당이나 고성(古城), 그 속에 쌓여있는 문화와 역사... 모든 것이 놀랍다.
프랑스 마을은 한결같다.
깨끗하고 모든 게 잘 정리되어 있다. 한달 간 걸으면서 버려진 쓰레기나 비닐같은 폐 농자재 하나 보지 못했다. 겨울에 쓸 장작더미나 건초더미 하나 흐트러진 게 없다. 집과 마을은 온갖 꽃들과 장식물로 가득차고, 표지판과 간판들이 작고 예쁘다.
프랑스 사람들은 다들 심미주의자다. 무엇보다 유구한 역사와 문화가 마을을 숨쉬게 한다.
사람들은 아름답다.
마을 사람들은 먼 이국에서 온 동양인을 언제나 따뜻하게 대해준다. 길을 잃어버렸을 때, 너무 많이 걸어 지친 순례자에게 쉽게 차를 내준다. 순례자는 모두가 친구가 된다. 같이 걷고 같은 지트(Gite)에 머문다. 저마다 친절하고 남을 배려한다. 진솔하다. 마음 속에 있는 나름의 고민도 쉽게 얘기한다. '푸른 하늘 냄새'가 나는 사람들이다. 걷는 동안 우리나라 사람은커녕 동양인을 하나도 만나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다.
생 장(St.Jean) 은 한 순례길의 종착지이자 또다른 순례길의 시작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 장은 설렘과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파리나 마드리드 공항에 도착해, 바욘(Bayonne)행 TGV를 거쳐, 달랑 한 량의 예쁜 열차로 갈아 타 순례자들이 처음 도착하는 곳이 생 장이다.
깊은 피레네 산 속으로 쑥 빨려들어 가는 기차 안에서 차창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풍광, 단순하면서도 격조있는 생 장 역과 우체국, 순례자 여권을 구입하기 위해 들르는 순례자협회 사무실, 첫 숙소인 공립 알베르게 그리고 순례객으로 활기찬 생 장의 거리...
이 모든 풍경은 저마다의 가슴 속에 그려져 있는 생 장의 그림이다.
그 다음날 모든 순례자는 어김없이 눈물의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의 롱세바예스로 떠난다. 이번 르퓌 순례길의 종착지 생 장에 도착한 날, 무지개가 우리를 반겨줬다. 독일에서 온 후베르토(Hubertus)와 파리 출신으로 스위스 로잔의 국제기구에 일하는 필립(Phllipe)이 마지막 3일을 동행한 순례자다. 얼핏 본 이들의 얼굴엔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뭔가가 흘러 나온다.
무엇을 위해 달려온 고행의 머나먼 순례길인가... 그렇다. 답은 저마다 남몰래 흘리는 저 눈물 속에 담겨 있겠지.
이번에는 좀 느긋하게 1박하면서 도시 곳곳을 둘러보았다. 도시의 모습은, 2년 전 스페인 순례길을 걷기 위해 처음 방문한 그 때와 별반 다르지는 않다. 그러나 내 마음은 좀 다르다. 그
때는 설렘이 컸다면 지금은 그리움이 더 크게 다가온다. 사람은 추억으로 먹고 산다는 게 꼭 맞다.
왜, 우리는 떠나는 걸까? 순례자협회의 통계에 의하면, 산티아고 순례길 종주자 수가 프랑스, 독일 다음으로 우리나라라고 한다. 방황하는 이 땅의 젊은 청춘들이, 삶의 무게에 힘들어 하는 우리네 중년들이 왜 산티아고 순례길로 나서는 걸까?
2년 전 나는, 한참 숨이 막혔다. 더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어디론가 떠나야 살 것 같았다. 공직의 길에서 늘 스트라이커였던 나에게 풀백 역할이 주어졌다. 끝내야 하나, 아니면 어떻게 해야하나 자문해보지만 답을 찾지 못하던 절망의 시기였다. 그 때, 나에게 산티아고 순례길이 다가 온 것이다. 그렇다, 떠나자... 모든 것을 저 불어 오는 바람 속으로 날려 버리자...
우리는 늘 방황하고 고뇌한다. 그 속에서 나름의 답을 찾고자 먼 이국의 조그마한 도시 생 장(Saint Jean Pied De Port)으로 떠나는 것이다. 수도사는 혼자 조용히 묵상할 수 있는 "에르미타(Ermita)"에서 평생을 보내기도 한다.
투우장으로 나서는 투우는 자기만의 공간 케렌시아(Qurencia)에서 마지막 결전의 숨을 고른다. 나에게 그런 것처럼, 산티아고로 가는 모든 순례자에게 이 길은 자기만의 아르미타고 케렌시아인 것이다.
<전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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