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퓌(Le Puy) 가는 길은 설렌다. 처음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날 때 시작했던 생장(Saint JeanPied Pord)느낌 그대로다. 깊은 산 속으로 쑥 빨려들어 가면서 온 몸이 흥분된다.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파리 드골공항역에서 리용까지는 TGV, 르퓌까지는 일반열차로 환승해 10월 5일 저녁 무렵에 도착한 르퓌는 고요한 종교도시의 모습이다. 멀리 보이는 거대한 성모상 , 큰 배낭을 둘러맨 순례객들, 카페 야외 테라스에서 열띤 애기를 나누는 젊은이들...영화 속의 한 장면 같다.
도시를 더 알고 싶어 하루 더 머물기로 했다.
다음 날 도시 곳곳을 둘러 봤다. 르퓌의 3대 명물이라는 성모상과 생 미셸 예배당, 르퓌 대성당도 가봤다. 풍물시장과 뒷골목 등 사람 냄새가 나는 곳도 둘러 봤다.
이 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성모상은 1860년에 크림전쟁에서 포획한 대포를 녹여 만들었다 한다. 이처럼 승패의 갈림길은 때로는 한 사람에게는 생과 사를, 때로는 한 국가에게는 흥망성쇠로 나뉘기도 한다.
사실 르퓌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중요한 의미는, 르퓌 대성당의 고데스칼크 대주교가 959년경에 처음으로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를 시작했다는 점이다. 순례 후 기념으로 지은 것이 오늘의 생 미셸 예배당이다.
르퓌 대성당은 모든 순례자들의 첫 출발점이다. 성당 주관으로 미사를 드린 후 저마다 순례의 길을 나선다.
그렇다. 르퓌는 출발의 도시고, 시작의 스타트 라인이다. 우리는 왜 어디론가 떠나고, 무엇인가를 다시 시작하는 걸까...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나도 영원할 것 같았던 공직의 길도 떠났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또다른 길을 나서고 있다.
새로운 길을 나선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새 길의 종착지가 미지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스스로 모든 것을 준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더 어렵다. 모든 일들을 스스로 꾸려간다는 것이 쉽지가 않은 것이다. 그 전에는 비서가, 직원들이 해주던 것을 스스로 해야 한다. 익숙지 않다. 속도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 스스로 헤쳐 나가야만 한다. 이게 현실이다.
어느덧 지금까지의 삶과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두려움과 상실감도 찾아온다. 당황하기 쉽다. 인생 후반전을 어떻게,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걸까...
르퓌(Le Puy)라는 생면부지의 순례 출발선에서 겸허한 마음으로 인생을 돌아본다. 몸에 퇴적되어 있는, 기억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을 그동안 만난 모든 이들과의 인연도 다시 생각해 본다.
인정하기 싫지만, 미루기엔 두려운, 나의 앞으로의 삶...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할까? 무엇을 지키고 어떤 걸 버려야 할까? 순례의 여정에서 나를 둘러 싼 모든 것들을 다시금 찬찬히 들여다보기로 마음 먹었다. 순례를 나선 순간부터 늘 겪고 보던 일상의 순간들이 ‘무언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몸과 마음, 나를 둘러 싼 사람들과의 관계, 세월이 흘러가면서 새롭게 깨닫게 된 수많은 관념들...
나의 20대는 어땠을까?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조차 몰랐던 것 같다. 늘 격정의 열병이 지나가곤 했다. 그러다 일찍 공직의 길로 들어섰다. 누구는 성공이라 하지만, 이제는 이것 또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앞으로가 중요하다. 앞으로 나의 모습은 어떻게 될까?
되도록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좀 쉽게 살고 싶기도 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조언을 구했더니 ‘물흐르듯 그냥 걸어라. 모든 걸 비우라. 고요함을 느껴봐라...’ 떠나기 전 만난 지리산 속 등구사의 인담스님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스님의 말을 회상하니 지도를 들고 있는 지금 내 손이 흔들린다.
시작 길인 르퓌, 도시는 어둡고, 나는 얼마 가지않아 주저 앉았다. 저 앞 강물은 무심히도 흘러간다. 강물에게 묻고싶다. “우리 인생은 어떻게 흘러가야 하나요?”
시간이 흐를수록 많은 물건이 늘어나듯 우리네 삶도 복잡해져 간다. 부와 명예 지위... 처음에는 부담없던 것들이 세월이 흘러 무겁게 느껴지기도하고, 힘들게 얻었지만 어느새 이제는 필요 없을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잃은 자리는 다른 생의 일부로 다시 얻어진다.
지도에 나오듯 내가 걸어왔던 길도 이 지도와 같을까? 똑바로 걸어왔다 생각했지만 뒤돌아보면 몇번이나 돌아오기도 하고 멈춰있기도 했다. 내가 지나온 세월의 지도는 꽤나 훌륭한 지도였나? 강물은 쉼 없이 흐른다. 강물처럼 흘러 가고 싶다.
아, 바람이 또 분다. 살아온 시간 속에서 꾸짖곤 했던 슬픔과 아픔까지 껴안고 싶다. 나를 둘러싼 것들에 감사하다 말하고 싶다. 누군가 여행은 사람을 성장시킨다고 했다. 나에게도 이 순례의 길이 성숙한 모습으로 바꾸어줄까?
가슴 밑바닥에 깊이 가라앉아 있던 서러운 슬픔이 휘몰아친다. 그 슬픔은 마음을 정화 시키는 슬픔이다.
가자, 또 가자. 이제는 또 다른 시작이다. 새벽에 나선 순례자가 뒤돌아본 르퓌의 도시는 아직도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전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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