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해변은 고독하고 푸른 바다는 처연하다.
바다...
듣기만 해도, 부르기만 해도 시원하다. 바다를 처음 본건 초등학교 5학년 때 부산에 가서다. 지리산 산골이 고향이라 늘 산만 보던 나에게, 영도 앞 바다며 자갈치시장이며 송도해수욕장은 충격이었다. 특히 나환자촌을 지나가는 오륙도는 무서운 길이기도 했지만, 바다에 대한 꿈을 심어준 추억의 섬이기도 하다.
파도...
늘 열정과 긴장을 일깨워 준다. 잔잔한 파도에게서는 낭만을, 성난 파도에게서는 자연의경외를 배운다. 이런 파도가 가슴 속으로 들어온건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밀려오는 파도소리에'를 듣고서다. "...가녀린 숨결로서 목놓아 울부짖는... 못다한 꿈을 다시 피우려, 다시 올 파도와 다시 될꺼나."
순례를 시작한지 45일째다. 프랑스의 르퓌(Le Puy) 순례길을 끝내고, 스페인의 북쪽 해안길도 바스크 지방에서 시작해 아스투리아스 지방으로 진입하고 있다. 1,150km정도 걸었으니 누구는 옛날 진주에서 서울로 가는 과거길만큼 걸었다 한다.
난 지금, 내 가슴 속의 바다와 파도와 함께 순례를 하고 있다. "El Norte(북쪽) 산티아고 순례길"은 스페인의 북쪽 해안을 따라 걷는 길이다.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서 시작해, 칸타브리아 지방과
아스투리아스 지방을 거쳐, 갈리시아 해안을 걸어야만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 도착한다. 무려 850km의 긴 순례길로, 70%정도는 직접 해안과 접하고 바다를 본다.
첫 출점인 이룬에서는, 프랑스 엉데와 국경선인 '생 자크 다리(산티아고 다리)'에서 순례를 시작한다. 빌바오와 포르투갈레트를 지나면서는 도시의 재생과 지속가능한 발전이 무엇인가를, 산세바스티안과 산탄데르에서는 세계적인 휴양지의 경쟁력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시라우츠, 쑤마이, 라레도, 노하, 소모... 처음 들어보는 해안마을이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해안 백사장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바다는 어찌나 싱그러운 모습이더냐... 짜콜리 와인도 맛보고, 엔초아 멸치요리와 뿔뽀도 먹어 본다. 거기다 "비노 블랑코"(화이트 와인의 스페인어)는 얼마나 이들과 환상적인 조합이던가... 산토냐와 산탄데르를 가기 위해 타는 배는 잠시나마 순례자들에게 휴식을 가져다 준다.
겨울의 갈리시아 바다는 바람도 드세고 비도 자주 온다. 그러나 산티아고를 향한 완주의 기쁨이 기다려지기에 순례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드디어 대륙의 끝 피스테라에 가서, 순례할 때 신었던 신발을 태우는 것으로 모든 순례는 끝난다.
고요한 르퓌(Le Puy) 순례길, 해안의 절경 북쪽(El Norte) 순례길 지금 걷는 이 길은 프랑스 르퓌 순례길하고는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산과 들길을 걷는 르퓌 순례길은 고요와 사색의 길이다. 길은 잘 정리되어 있어 고요하며, 만나는 사람들은 경건하다. 마을은 순례의 1000년 발자취가 묻어있어 경이롭다.
반면에 스페인 해안순례길은 일단 풍광이 압도적이다. 끝없이 이어진 해변의 백사장, 푸른 바다의 망망대해를 보노라면 자연 앞에 서 있는 우리가 얼마나 작은지를 느끼게 된다. 나와 함께 두 길을 걷고 있는 프랑스 보르도 출신의 미셸에게 물어본다.
"두 길의 느낌이 많이 다른 것 같은데, 어때?"
"차이가 많이 나는 것 같아. 르퓌 순례길은 스페인의 프랑세스 순례길처럼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어. 스페인 해안순례길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바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뭐 이런 느낌이야."
미셸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양국의 사람들에 대해 나에게 물어도 본다.
"프랑스 사람들은 친절하고 배려심이 큰 것 같아. 한국 사람들이 늘 쓰는 말처럼 '우아하고 엘레강스한'것 같아. 스페인 사람은 말이 많고 강렬하고 적극적인 느낌이야."
미셸이 덧붙인다.
"프랑스 사람들은 친절하고 우아한 것 같아도, 카페나 살롱에서는 말도 많고 자기주장이 강해. 스페인 사람들은 좀 솔직한 것 같아. 뭐든지 이야기 다해."
"프랑스는 시골도 깨끗하고 어디에도 흐트러진 게 없지, 근데 좀 숨이 막혀. 스페인은 조금은 지저분한 것 같아도 사람사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아 그게 나는 좋아..."
그렇다. 우열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는 방식과 문화, 자연이 다를 뿐이다.
'삼천리 동해안 해파랑길'을 꿈꾸며...
스페인에 북쪽 순례길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동해안 해파랑길이 있다. 부산의 갈맷길, 울산의 간절곶 해변, 영덕의 블루 로드, 정동진의 해안길은 세계 어디를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 거리도 770km나 되는 장거리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동해안 자전거길과 함께 세계적인 길이다.
문제는 이들은 우리만의 길이다. 세계의 청년들이 오도록 해야 한다. 프랑스의 지트(Gite)나 스페인의 알베르게( Albergue)처럼 언제 어디서든 싼 값에 이용할 수 있는 숙박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성공의 관건이다. 데바(Deba)라는 마을에서 1층은 기차역사로, 2.3층은 알베르게로 사용하고 있는 공용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표지판도 중요하다. 르퓌 순례길에서는 화이트 앤 레드의 GR65, 스페인 순례길에서는 노란 화살표가 나침반이다. 이것만 보고도 길을 걸을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금강산, 원산, 청진, 두만강을 잇는 한반도 3천리 동해안 해파랑길을 꿈꾸어 본다. 거기다 "DMZ평화누리길"을 더해 잘 홍보하면 세계 최고의 카미노가 될 것이다. 생각만해도 설렌다.
또다시 걷는다. 나는 왜, 머나먼 이국 대서양 어느 해변을 혼자 걷고 있는 걸까...
서정주의 시 "바다"가 생각난다.
귀기울여 있는 것은 역시 바다와 나뿐.
밀려왔다 밀려가는 무수한 물결위에 무수한 밤이 왕래하나
길은 항시 어데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데도 없다...
....
오- 어지러운 심장의 무게위에 풀닢처럼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달고
이리도 괴로운 나는 어찌 끝끝내 바다에 그득해야 하는가.
눈뜨라. 사랑하는 눈을 뜨라...청년아,
산 바다의 어느 동서남북으로도
밤과 피에 젖은 국토가 있다....."
<전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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