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대행진...
마지막 날이다. 하늘의 별들은 빛나고 있다. 아침에 비가 잠깐 오더니만 별이 더 총총하다. 순례자들은 대개 오 페르도스 (O Perdouze)마을에서 마지막 순례길의 밤을 보낸다. 산티아고까지는 20여km 떨어져 있어 아침 일찍 출발해 성당의 정오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나는 그 전 마을인 산타 이레네(Santa Irene)의 공립 알베르게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다. 한국에서 온 순례자도 있고, 각 국에서 온 순례자들로 방이 꽉 찬다. 다른 날에는 순례 무용담으로 떠들썩하더니만 다들 조용하다. 저 마다 무슨 생각들을 하고있는 걸까.
누구는 생 장에서, 누구는 이룬에서, 또 누구는 프랑스 르퓌나 아를에서 출발해서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다. 나도 프랑스 르퓌에서 출발해 생 장을 거쳐, 다시 이룬에서 히혼으로, 또 오비에도를 거쳐 산티아고로 향하고 있다. 장장 근 두달 동안 1500km를 걸어서 말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이어지듯, 모든 순례의 최종 종착지는 산티아고(Santiago de Compostela)다. 각각의 순례길에서 드문드문 만나던 겨울 순례자들이 일부는 멜리데(Mellide)에서, 또 다른 일부는 아르수아(Arzua)에서 합류하여 대군단이 된다. 이들 순례의 대군단이 산티아고로 행진을 하는 것이다. 배낭을 메고 지팡이를 들고서 진군하는 행진이다. 이보다 더 아름답고 숭고한 대행진이 어디에 있을까.
서너시간 걸은 후 고소산 언덕에 오르니 드디어 산티아고 시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름을 '기쁨의 산(Monte de Gozo)'이라 했나. 이 때부터 순례자들은 가슴이 콩다콩닥이다. 이후부터는 한걸음 한걸음이 다 신중하다. 이어 '콩코르디아 공원'의 산티아고 입성 환영인사를 받으면 곧장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한다.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환호하는 산티아고 대광장. 이번에는 2년 전 산티아고 순례의 흔적과 기억도 되살리면서 좀 천천히 걸어 늦은 오후에 산티아고 성당에 도착했다. 성당 앞의 '오브라도이로 광장(Plaza do Obradoiro)'에서 감격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같이 걸어 온 동료들과 격한 포옹으로, 격문을 준비한 순례자는 플래카드를 펼쳐 들고서 감동을 자축하기도 한다.
며칠 간 동행한 이탈리아에서 온 지오반니는 좀 다르다. 무릎을 꿇고 긴 시간 동안 성당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있다. 너무나 간절한 모습이다. 힐끗 보니 그의 얼굴에서 굵은 눈물이 흐르고 있다. 어떤 눈물일까. 감격의 눈물이고, 사랑의 눈물이고, 또 참회의 눈물일 것이다. 어디 비단 지오반니만 흘리는 눈물이겠는가. 먼 순례를 끝낸 모든 순례자들이 똑같이 흘리는 눈물일 것이다.
이번에는 산티아고에 이틀을 머물면서 도시 곳곳을 돌아 보았다. 12세기에 지어진 대성당은 물론, 도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또 2000년에는 유럽의 문화수도로 선정되기도 했다. 도시전체가 세계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중세시대 도시란다.어디, 도시의 건물이나 도로만 보존된게 아니다. 순례의 역사와 정신이 무엇보다 잘 보존되었기에 오늘의 산티아고가 아닐까.
산티아고는 순례의 도시이면서 젊음과 열정의 대학도시다. 도시 전체가 젊은 대학생으로 넘쳐난다. 가히 청춘의 도시다. 순례 처음엔 대성당과 순례자들만 보이더니 시야가 좀 넓어졌나 보다.
1495년에 세워진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학교(USC)'에 4만5천명 정도가 종사하고 있고, 인근에 산티아고 국제대학도 있다. 도시인구의 거의 반이 대학생이란다.
루고(Lugo)에도 캠퍼스가 있어 2 캠퍼스 체제다. 산티아고 대성당 앞뒤로 철학부며 법학부며 의학부 건물이 눈에 띈다. 무엇보다도 19세기까지 대학의 중앙도서관이었던 'Colegio Fonseca'를 볼 수 있어 감회가 남다르다. 이곳이 산티아고의 정신과 문화의 총본산이란다.
산티아고 곳곳에는 저녁마다 음악회가 열리고 각종 전시회도 열린다. 여기까지 어렵게 온 순례자들은 성당만 볼 게 아니다. 성당과 함께 도시의 문화와 정신도 같이 보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무엇을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일까.
세월이 많이 흘렀다. 영원할 것만 같던 청춘도, 직장도, 주변의 사람들도 떠나간다. 주연으로만 살아 오다가 어느 순간 인생의 후반전이 되었다. 아쉽기는 하지만, 슬프만 할 일은 아니다. 이게 자연의 이치고 섭리다.
그렇다고 그냥 흘려 보낼 필요는 없다. 한번쯤 회상에 젖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사람은 추억의 동물이고, 망각의 동물이라 하지 않던가. 내 삶과 동고동락했던 학교와 직장, 살던 도시와 친구들과 공놀이 하던 골목길. 이런 장소와 공간은 추억의 저장소다. 그 공간에서 함께했던 사람들은 이제 한없는 그리움으로 되살아 난다. 그 그리움은 고마움으로 변하기도 한다.
사실 이번 산티아고 순례 중에 가장 즐겁고 흐뭇한 순간도, 이전 순례의 추억이 되살아 났을 때다. 첫 출발지인 생 장(St. Jean Pied Port)에서 설렘으로 잠 못이루었던 첫날 밤의 황홀함,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의 뿌듯함, 그 뜨겁던 황토색의 메세따 지방을 홀연히 걸어가던 고요의 순간, 산티아고 대성당에 입성할 때의 벅찬 감동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다. 지친 순례자들을 위로해 주던 산티아고 대성당의 경건한 미사, 순례증명서를 받기 위해 들어선 순례자 협회사무실에서의 즐거운 대화, 내가 거닐었던 산티아고의 골목, 긴 순례 후 일행들과 술잔을 나누었던 어느 유명한 뿔뽀 식당, 어디엔가 남겼던 비밀의 흔적들... 이 모든 순간이 아련한 추억으로 되살아 난다. "시간은 흘러 다시 돌아오지 않으나, 추억은 남아 절대 떠나가지 않는다"는 생트 뵈브의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렇다고 추억만 되살릴 일은 아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다"라는 E.H.카의 명구를 차용해보면, '삶이란 과거의 추억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의 대화다'라고 말하고 싶다. 산티아고 어느 골목의 카페 이름이 라틴어로 "EGO MUNDI(나는 세상이다)"다. 카페이름으로 하기엔 좀 아깝지만, 최고의 상호다. 여기에 하나의 답이 있는 것 같다. 성서에 "나는 세상의 빛이다(Ego Sum Lux Mundi)"라는 구절이 있다.
그렇다. 머나먼 순례길을 달려 온 순례자에게는 새로운 세상(Mundus)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 , 인생 2막의 세상에는 다른 무엇이 아닌 '나(Ego)'가 그 중심에 있을 것이다. 더는 주변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생각한대로 마음 먹은 대로 갈 일이다. 청춘시절 즐겨 사용했던, '고독과 자유(Einsamkeit Und Freiheit)'를 느껴볼 일이다. 이제, 비로소, '내가 세상이다(Ego Mundi)!
오늘도 순례자는, 먼 길을 지나 도착한 산티아고를 뒤로 한 채 또다시 길을 나선다.
<전 국가인재개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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