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끝자락에 시작한 새로운 순례길은...
길은 많다. 길은 어디에선가 갈라지고, 또 그 어디에선가 만난다. 이게 길의 묘미다.
순례길도 마찬가지다. 스페인 북쪽 해안순례길(El NorteCamino)도 히혼(Gijon)에서 갈라지고, 아르수아(Arzua)에서 다시 만난다. 바다와 함께한 이 길을 히혼에서 끝내고 다시 시작한 순례길은 '프리미티보 순례길 (Primitivo Camino)'이다.
이 길은 오비에도에서 시작해 루고를 거쳐, 멜리데Melide)에서는 프랑세즈 카미노 순례자들과 아르수아에서는 북쪽 해안길 순례자들과 합류하여 산티아고로 간다. 250km 정도, 한 열흘쯤 걸리는 길이다.
프리미티보는 말 그대로 최초나 시원(始源)을 의미한다. 산티아고로 가는 여러 개의 순례길 중에서 처음 시작한 순례길이 '프리미티보 카미노'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국왕 알폰소 2세는 야곱의 유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814년 직접 산티아고까지 순례길을 나선다. 바로 이 길이 첫 순례길이라는 의미에서 '프리미티보 순례길', 그는 첫 순례자라는 뜻에서 'El Primer Peregrino'(엘 프리메르 페레그리노)라고 부른다.
단순히 종교적인 목적만 있는 순례는 아니었다. 스페인 남부는 무어인들이 침입해 있기에 이들을 내쫓고 국토를 되찾는 것이 스페인의 가장 중요한 당시의 과제였다다. 이른바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의 이데올로기가 숨겨져 있다.
이후 중세시대에는 한 해에 50만 명 이상이 순례에 나섰다 한다. 지금 순례길의 주요 도시와 성당들은 그 때 다 만들어졌다. 중세는 암흑의 시대가 결코 아니다. 단지 나약한 인간의 본성을 잘 아는 시대일 뿐이다.
그러다 잊혀진 길이, 순례길을 복원하기 위한 종교·장거리도보운동 단체들의 노력과 파블로 코엘료의 소설 '순례자'로 인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영화의 소재로도 된 길이다. 지금은 종교적인 순수 순례자들과 삶에 지친 세계의 청춘들이 어울려 걷고 있는 힐링의 길이다. 순례길 자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가을이 끝나는 시기에 시작한 이 순례길은 산 속을 걷는 길이라 쓸쓸한 늦가을 분위기를 온 몸으로 느낀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마을을 찾아가던 프랑스 르퓌 순례길의 재판이다. 조락(凋落)의 강도만 다를 뿐이다. 산에서 바다로, 또 바다에서 산으로 돌고도는 순례길이다.
오비에도(Oviedo)와 루고(Lugo)는 '프리미티보 순례길'의 심장부...
오비에도(Oviedo)는 옛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수도였고, 지금은 아스투리아스주의 주도(州都)다. 시내 역사지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순례의 시작점인 산 살바도르(San Salvador)대성당이 문화유산의 중심이고, 인근 나랑코 산에는 중세시대의 교회와 유적들이 잘 보존돼 있다.
더 중요한 포인트는 시내 곳곳에 조각작품들이 놓여져 있어 신구(新舊)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뤄 도시의 품격이 한층 되살아 난다.
루고(Lugo)는 산티아고로 가는 중간 거점도시다. 특히 도심을 감싸고 있는 2.1km의 로마시대 도성이 완벽히 보존되어 도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아마 이 처럼 잘 보전된 도성은 프랑스 아비뇽의 도성과 우리나라의 도성들인 성 싶다. 2년 전 산티아고 순례 때에도 특별히 방문한 적도 있는데, 성곽 위를 조깅하던 그 때의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 난다.
멜리데(Melide)는 산티아고 순례자들에게는 추억의 명소다. 갈리시아 음식의 대명사인 '뿔뽀와 비노 블랑코(화이트 와인)'의 환상적 조합을 경험하는 곳이기도 해서다.
무엇보다도 인근의 아르수아 (Arzua)와 함께 순례자들로 넘쳐나는 순례도시다. 생 장에서 출발한 '프랑세즈 카미노'(Frances Camino)순례자, 이룬에서 시작한 '엘 노르테 카미노(El Norte Camino)순례자가 만나는 곳이다.
도시 전체가 알베르게고 순례자들을 위한 식당들이다. 저녁에는 알베르게와 식당에서 각 길을 걸어온 무용담으로 밤을 지샌다. 가히 순례자들의 게토다. 순례자들이 이 두 도시를 먹여 살린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머물고 있는 오늘 밤도 멜리데와 아르수아의 불은 꺼지지 않고 있다.
스페인 북쪽 해안순례길의 마지막을 함께했던 알제리 출신의 다하는 히혼에 이어 오비에도와 루고순례 시 동행하면서 나에게 묻는다.
"세 도시 중에 어디가 가장 좋아요?"
"글쎄...다 특징이 있어 고르기가 쉽지 않아. 히혼은 해변의 낭만과 역사가 공존하는 도시고, 오비에도는 산 속 분지지만 유적과 새로운 문화가 조화를 이루고 있고...."
내가 그에게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도시가 맘에 들어?"
"난 젊어서 그런지 히혼의 불끄지지 않는 정열의 도시가 좋아요."
"나는 사실 루고가 최고야. 추억이 서려있기도 하고, 성곽 위를 걷는 고요가 참 좋아....."
이제, 한 이틀 후면 산티아고(Santiago de Compostela)에 도착한다. 겨울 카미노는 순례자가 많지 않아 하루종일 한 사람의 순례자도 보지 못하는 때도 있다.
나는 이 고요가 좋다. 하지만 외롭다.
멜리데에 오자 알베르게가 꽉 찬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한국의 청춘남녀들도 보인다. 무엇을 찾아 나선 젊은이들일까... 무엇이, 이들을 먼 이국의 땅 산티아고 순례길로 안내한 것일까라는 생각이 계속 맴돈다.
왜, 나는 새로운 순례길을 찾아 나선 것일까...
가을이 끝나 간다. 오랜 공직생활을 끝낸 이후 처음 맞이한 가을이다. 먼 이국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에서 가을을 온전히 보내고 있다. 10월 초부터 순례를 시작했으니 딱 두 달 째다. 가을의 처음과 절정은 프랑스 르퓌( Le Puy )순례길에서, 중후반부는 스페인 북쪽 해안순례길에서, 그 끝은 '프리미티보 순례길'에서 보내고 있다.
가을의 꽃은 낙엽이다. 누가,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라 했나. 적어도 순례자에게는 이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낙엽은 지친 순례자의 발바닥을 딱딱한 지면으로 부터 분리해주는 좋은
카펫이다. 새로운 생명탄생의 자양분이 된다는 생태계의 환류보다도 더 유용한 낙엽의 쓰임새가 순례자에게 있는 것이다.
처음 순례를 시작할 때, 나를 포함해 다들 혼자 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다.결국 혼자 해내고 있다. 아니, 혼자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 이상 나에게는 도와줄 직원도 비서도 없다. 청춘이라는 것은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할 때 붙여줄 수 있는 칭호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나도 새로운 청춘이다.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순례자에게 더 이상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오히려 새로운 호기심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불타오른다. 오랜 공직생활의 관성에서 벗어 나고 싶다. 자유인이 되고 싶은 걸까.
청춘의 열정이 다시 불쑥불쑥 솟아 오른다. 두려움이 환희로 바뀌고 있다. 이게 청춘이 아니고 무엇이 청춘일까.
자, 또다시 시작이다. 이제 어느 길을 걸어 볼까요?
<전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