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따뜻한 남쪽 리스본으로 길을 나선 순례자...
새로운 길을 나서는 건 늘 설렌다. 새로 만나는 마을과 도시, 산과 들이 그렇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설렘은 순례의 여정에서 가장 큰 즐거움이다. 먼 길을 걸어 도착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에서 순례의 정점을 찍고,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리스본으로 향하고 있다.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에서, 생 장에서 산티아고로 가는 '프랑스 순례길(Camino Frances)'에 이어 두 번째로 순례자가 많은 길이 '포르투갈 순례길(Camino Portugues)'이라 한다. 리스본에서 출발하여 투마르, 코임브라, 포르투, 바르셀루스, 뽄데베드라를 거쳐 산티아고로 가는 600여 km의 길이 정식 루트다.
많은 순례자들은 이 중에 반 정도 걸리는 포르투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요즘 유럽의 대학생들이 단기 코스로 이 길을 가장 많이 걷는다 한다. 나는 역(逆)으로 산티아고에서 리스본으로 향하고 있다. 근데 이게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직접 얼굴을 대면할 수 있어 좋다. 서로 인사도 나누고 격려도 하고... 무엇보다도 알베르게나 길에 관한 살아있는 정보를 물어 볼 수 있어 좋다. 서로 의기가 투합되면 길 섶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도 많이 나눈다.
그룹을 지어 산티아고 순례길을 나선 호주의 멜버른 대학생들을 만난 것도 이 길에서다. 꼬박 밤새워 애기하고, 다음 날 헤어짐을 못내 아쉬워 하던 체코에서 온 필립과 모니카를 만난 것도 포르투갈 루비엥스 알베르게에서다.
말없이 떠나간 친구를 계속 그리워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조국 체코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20대 청년들의 풋풋한 고민에 묻고 답하던 알베르게 학당(?)에서 오히려 내가 배운게 더 많다.
산티아고에서 포르투 가는 길은 반은 스페인 땅이고, 반은 포르투갈 땅이다. 뚜이 (Tui)가 스페인의 마지막 도시고, 발렌사 (Balensa)가 포르투갈의 첫 마을이다. 한강만큼이나 큰 미뉴(Mino)강을 사이에 둔 국경도시다. 근데 두 도시의 풍경이 사뭇 다르다. 스페인 땅 뚜이의 가장 높은 언덕에는 대성당이 자리잡고, 그 아래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평화로운 모습이다. 발렌사는 그렇지 못하다. 강을 낀 언덕은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난 이처럼 크고 장엄한 성벽을 여태 보지 못했다. 그야말로 철옹성이다. 두 도시의 외관만 보더라도 누가 쳐들어가고, 누가 막고 있는지를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
누가, 왜 이 두 도시를 이처럼 다르게 만들어 놓았을까... 가슴이 먹먹해 진다. 대륙은 스페인과, 해안은 거친 대서양과 오로지 접하고 있는 나라가 포르투갈이다. 싸워 이기든지, 아니면 종속되든지 둘 중 하나다. 이게 작은 나라 포르투갈의 숙명이다. 식민지와 분단의 땅, 우리의 한반도가 불쑥 겹쳐 보인다. 그냥 눈물이 난다. 역사라는 것, 조국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길래...
그러나, 슬프만 할 일은 아니다. 포르투로 가는 길에서 만난 포르투갈의 마을과 문화는 스페인에 전혀 꿀리지 않는다. 리마 강가에 자리잡은 폰트 데 리마(Pont de Lima)와 수탉을 상징으로 하는 바르셀루스(Barcelos)의 아름다운 다리와 고풍스런 풍경은 도시의 역사와 수준을 말해준다. 포르투갈 특유의 심플한 모습의 성당이나 교회, 아줄레주양식(Azulejo Style)으로 치장한 예쁜 건물, 조그마한 돌로 촘촘히 만든 포장길 (Calsada Portuguesa), 대구와 정어리로 맛을 낸 포르투갈 음식... 모든 게 포르투갈만의 독특한 색깔이 있다. 사람들도 훨씬 친근하다. 먼저 인사하고, 먼 길을 나서는 순례자를 늘 정답게 반겨준다. 우리네 시골 인심 그대로다. 작지만 강한 나라다.
붉게 불타 오르는 도시 포르투(Porto)....
포르투는 붉다. 도시의 지붕 색깔도 붉고, 도루강 너머로 지는 석양도 무척이나 빨갛다. 유리 잔에 담긴 포르투 와인은 붉다못해 검붉은 빛이다. 오묘한 정염의 빛깔이다. 아, 붉게 타오르는 도시 포르투에서 나도 붉게 물들 수 있을까...
근 280km를 걸어 금요일 저녁에 도착한 포르투는 인산인해다. 요즘 해외여행의 대세가 포르투와 리스본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는 것 같다. 2년 전 방문 때하고도 많이 다르다. 특히 젊은이들이 많다. 동 루이 다리와 접하고 있는 히베리아 광장은 청춘의 용광로다. 활기가 넘친다. 미래가 밝아 보인다.
나는 강을 좋아한다.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서 한없이 걷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고요의 순간이 좋다. 이틀 머무는 동안, 하루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포르투의 도시를 탐험하고, 또 하루는 온 종일 도루(Douro)강을 걷고 있다. 강의 상류는 끝없는 포도밭이다.
여기서 만든 와인이 그 유명한 포르투 와인이다. 일반 와인보다는 도수가 좀 높다. 영국상인들이 와인에 브랜드를 섞어 만든게 독특한 맛과 색깔을 지닌 포르투 와인을 탄생시켰다 한다. 레드 와인은 진한 루비색, 화이트 와인은 황갈색... 어디서 이런 오묘한 빛깔과 맛을 가져왔을까. 역시 포도주는 '신의 눈물'인가 보다.
포르투 시내 의 도루강변은 동 루이 다리와 마리아 피아다리며, 강가에 자리잡은 와이너리며, 맛있는 음식점과 카페들로 즐비하다. 하류는 항구다. 리스본과 함께 바다의 제국을 건설한 대항해시대의 전초기지다.
걷고 또 걸어도 힘들지 않다. 석양에 물든 도루강은 이미 내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은 사유의 붉은 강이 되었나 보다.
이제, 포르투갈 카미노도 반만 남았다. 유서깊은 옛 도읍지 코임브라를 지나고, 성모 발현으로 기독교의 중요한 성지가 된 파티마를 거쳐, 투마르와 생타렘을 지나면 리스본이다. 장장 2000여 km 순례의 대장정 끝이 대항해 시대에 스타트라인이던 테주강의 리스본이다. 어느 순례자의 종착지가 누군가의 출발지인 것이다. 끝은 시작이고, 시작은 또 다른 끝이다. 자꾸만 마음이 미묘해진다. 해냈다는 성취감, 순례를 뒤로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아쉬움 등이 순례자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나에겐 순례가 이미 또다른 일상이 되어버린 걸까...
도루강의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순례자는 마지막 종착지 리스본으로 향하는 길을 또 다시 나선다.
<전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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