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현명하고 일에 협조하고 예절 바르고 총명한 동반자를 얻는다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하리니, 기쁜 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그와 함께 가라.
그러나 그대가 만일, 현명하고 일에 협조하고 예절 바르고 총명한 동반자를 얻지 못했다면, 마치 왕이 정복했던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서로 사귄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괴로움이 따르는 법, 연정에서 근심 걱정이 생기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숲속에서 묶여 있지 않는 사슴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빨이 억세고 뭇 짐승의 왕인 사자가 다른 짐승을 제압하듯이, 궁벽한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사품蛇品/무소의 뿔-
나는 그녀에게 알렉산드로스와 디오게네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영웅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으나, ‘개’ 같은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전혀 알지 못했다. 디오게네스의 질박한 삶에 관해서도 별무관심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헬레니즘 시대를 연 힘의 상징이었고, 디오게네스는 민중에게 ‘욕망에서 해방’을 가르치는 당대의 현인이었다. 개 같이 살아도 민중에게 꽤나 존경 받았던 모양이다. 절대 권력자가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방증된다.
무엇이든 줄 수 있는 대왕이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철학자를 찾아갔다. “무엇을 원하는가?”, “햇빛만 가리지 말아주시오.”
디오게네스는 냉소주의자가 아니었다. 정반대로 그는 ‘덕’을 성취하려는 열정으로 불탔다. 덕에 비하면 현세의 좋다는 것들은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욕망에 해방됨으로써 덕과 도덕적 자유를 얻으려 했다. 행운이 따라야 얻게 되는 좋은 것들에 냉담해져라. 그러면 두려움을 떨치고 해방되리라.
누구는 무엇이든 줄 수 있는 능력자가 되기를 원하고, 또 누구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는 질박한 삶을 원한다.
힘(power)과 지혜(wisdom)는 태생이 다르다. 인간 능력의 다른 범주, 곧 별개의 능력이다. 힘을 갖는다고 해서 지혜가 자연히 따라오는 것도 아니고, 지혜를 갖는다고 해서 힘을 당연히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개인이 가지는 지적 에너지의 한계를 감안하면, 힘과 지혜는 서로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곧, 사람은 힘과 지혜를 동시에 추구할 만큼의 지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선택을 해야 한다. 힘이냐? 아니면 지혜냐?
지적 에너지가 제법 충만한 사람이 힘을 선택하면 - 그 결과 나중에 이룸이 보잘 것 없더라도 - ‘가까이하고픈 사람’에게 대체로 호소력을 갖는다. 그렇지만 지혜를 선택할 낌새를 보이면? ‘그 사람’은 대체로 멀어질 결심을 할 것이다.
물론 ‘힘이냐 지혜냐’의 이분법은 설명의 편의를 위한 장치일 뿐, 현실의 정확한 반영은 아니다. 힘과 지혜 중 어느 쪽에 본능적으로 더 끌리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그 끌림이 한쪽으로 쏠릴 수도 있고, 엇비슷할 수도 있다. 힘 대 지혜가, 85 대 15, 55 대 45, 45 대 55, 15 대 85 등등으로 말이다.
침팬지와 인간은 공통조상을 가진다. 진화과정에서 600만 년 전에 갈라졌다. DNA는 약 99%가 같다. 차이는 1%다. 이 작은 차이가 600만 년이란 세월과 결합하니 엄청난 결과를 빚어냈다. 지금의 인간과 침팬지, 얼마나 다른가.
침팬지와 인간의 차이도 크지 않는데, 인간끼리야 말할 것도 없다. 인간의 욕망은 다 어금버금할 것이다. 누구나 힘과 지혜, 둘 다를 욕망한다. 그러나 조금의 차이는 있다. 이 작은 차이가 몇 십 년 누적으로, 꽤 다른 인생을 결과한다.
얻는 데에는 힘과 지혜가 배타적이지만, 사회적 역할은 상호보완적이다. 문제는 역사에서, 특히 200년 남짓의 자본주의 시대에서 힘은 필요 이상으로 존숭되고, 지혜는 최소 필요한 만큼의 관심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위인전에 알렉산드로스는 실려도, 디오게네스는 없다.
힘이 존숭 받은 결과 인간은 장족의 문명적 발전을 이뤘다. 그러나 지혜에 무관심한 대가로 생태계 붕괴, 세계대전, 통제 불능의 기술(AI)과 같은 실존적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도전을 극복할 지혜는 있는 것일까? 있다. 오래전부터 있었다. 힘에 눌려 발휘되지 못했을 뿐이다.
황금률(Golden Rule)이다. 동서양 대부분의 문화와 종교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원칙이다. “자신이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
변주는 많다. 그러나 다 같은 뜻이다. ‘그들은 나와 같고 나도 그들과 같다고 생각하여, 생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 또한 남들에게 죽이게 해서도 안 된다.’(숫타니파타), ‘내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말라’(공자), ‘내게 고통스러운 것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라’(힌두교/마하바라타),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예수)
길벗은 소중하다. 마는, 바라보는 곳이 다르면 동행은 억지이다. 좀은 외롭고 고달프더라도 허위허위 홀로 걸음은 차라리 나그네의 무게 같은 것,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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