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려과(西閭過·전국시대 책사)가 동쪽으로 하수(河水)를 건너다가, 물 한가운데에서 빠져버렸다. 뱃사공이 다가가 그를 건져내며 물었다.
“지금 그대는 어디로 가려는 길입니까?”
“나는 지금 동쪽의 제후들과 왕들에게 유세를 하러 가는 길이오.”
뱃사공은 이 말에 입을 가리고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물 한가운데에 빠져, 스스로 헤엄쳐 나오지도 못하면서, 어찌 능히 제후들과 왕들에게 유세를 할 수 있단 말이오?”
그러자 서려과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의 능한 바로써 상대에게 상처 주는 일은 없도록 하시오. 그대는 화씨벽(和氏璧·천하의 보물)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소? 그 값이 천금이나 되지만, 이를 방추(紡錘·피륙을 짜는 베틀의 한 부품)로 쓰게 되면, 기와 조각이나 벽돌 조각만도 못하오.
또 수후지주(隨侯之珠·진귀한 구슬)는 나라의 보배요. 그러나 이를 탄환으로 쓰면 진흙으로 만든 총알만도 못하오. 그런가 하면, 기기(騏驥)와 녹이(騄驥) 같은 준마는 형액(衡軛·수레 앞뒤 가로대)을 갖춘 수레를 끌면 하루에 1천 리를 달려 지극히 빠르지만, 이들에게 쥐를 잡으라고 시키면, 오히려 1백 전(錢)이면 살 수 있는 살쾡이만도 못하오.
또 간장(干將)과 막야(莫耶) 같은 명검은 종을 쳐도 울리지 않고 물건을 베어도 느낌이 없을 정도이나 그 칼날은 다른 금속조차 베어버리며 깃을 베듯이 쇠도끼도 자를 수 있소. 천하에 날카로운 칼이지요. 그러나 이 칼로 신을 수리하는 데에 쓴다면, 이는 두 전(錢)짜리 송곳만 못하오.
지금 그대가 노와 삿대를 잡고 배를 몰아 이 넓은 강에서 양후지파(陽侯之波·큰 강의 수신水神이 일으키는 파도)에 맞서 어떤 물결도 감당해 내는 것, 이것은 바로 그대만이 능히 할 수 있는 일이오.
그러나 그대에게 만약 동쪽으로 가서 제후들과 왕들에게 유세를 하라고 한다면, 한 나라의 임금만 만나도 그대는 몽매하기가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개와 다를 바 없을 것이오!” -『설원說苑』/권17잡언편/서려과동도하西閭過東渡河-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자주 불렀다. 3~4년 전 같은데, 꼽아보니 벌써 30~40년 전의 일이다. 지금도 노래방에서 박자 놓치지 않고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노래 중의 하나이다.
간혹 노랫말 때문에 오해를 받기도 한다. ‘맘 속 깊은 곳에 외로움 심으신’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맞는 말이긴 하지만, 조금 거리가 있다. 푸르른 시절에 ‘외로움 심은 사람’을 안 가져본 이 뉘 있으랴. 마는, 단풍 든 인생의 늦가을에도 ‘외롭게 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감성은 깨어있는 정신의 표지(標識)가 아닐까?
차 마시는 사람을 존경한다. 차는 자극이 희미하다. 차의 은미한 맛은 술이나 담배 등 자극이 강한 기호품에 인이 박힌 혀로써는 느끼기 힘들다. 모르면 몰라도 평소 마늘, 파 등 강한 자극성의 오신채(五辛菜)도 멀리하는 정갈한 혀로써만 즐길 수 있는 게 차라고 내 나름 생각한다.
차를 즐기려면, 다기(茶器) 구색을 갖춰야 하고, 다례(茶禮) 또한 좀은 번거롭다. 되는 대로 먹고 마시고, 단순 질박함이 체질화한 내겐 맞지 않다. 머리 감는 데 샴푸를 써본 지가 몇 십 년은 된다. 비누로 한 방에 끝낸다. 아직 검은 머리다. 비결을 묻곤 한다. 비누만으로 머리를 감아라,고 조언한다. 믿거나 말거나다.
차를 겉멋으로가 아니라 진정으로 즐기는 사람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의 ‘여유’ 때문이다. 차 맛을 온전히 음미하려면 정갈한 혀에다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 허겁지겁 차 마시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차의 멋은 곧 ‘여유’가 아니던가.
쫒길 일도 없는데, 돌아보면 지난날에도 또 지금에도 나는 여유롭지 못하다. 자격시험 칠 일도 없다. 한데도 매일매일 읽을거리를 다 못 읽어 안달이고, 수북한 메모지 다 정리 못해 복달이다.
반성해 보면, 여유는 평소 정돈된 삶에 뿌리를 두는 것 같다. 정갈한 혀 곧 절제된 식생활, 다례로 표현되는 격조 있는 몸가짐, 정돈된 생활, 그래서 갖게 되는 여유, 어이 아니 존경하랴! 마는, 차 마시는 사람을 보면, 뭔가 하나 빠져 허전한 느낌이 든다.
내 부족한 모든 부분을 가졌지만, 그는 왜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은 생각하지 않을까? 내가 그가 가진 것을 못 가짐으로써, 뭘 가졌고 가지려 하는지, 에는 관심하지 않을까? 하여 그에 대해 적확한 표현은 ‘경이원지’(敬而遠之)이다. 의역이 아니고 글자그대로의 뜻이다. ‘존경한다, 그러나 멀리한다.’
어쩌다 만나 그리운 사람, 대개 ‘차 마시는 사람’류(類)이다. 그러니 어쩌랴,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인 것을. 다만, 애이불상(哀而不傷)이라, 슬프지만 마음이 다치는 것은 아니다.
“예니, 사물이 변하고 별이 움직이며 하늘과 땅이 돌지라도 당신은 영원한 내 마음 속 파란 하늘과 태양이오. 세상 사람들이 적의를 품고 나를 비방하며 상처를 줄지라도 예니, 당신만 내 곁에 있다면 나는 결국 그들을 패배자로 만들 것이오.” -카를 마르크스-
“나는 심지어 상상한다. 만약 당신의 오른손이 나라면, 나는 당신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될 수 있고, 그때 나는 당신의 모든 사랑스럽고 절묘한 사상을 기록할 수 있으며, 당신에게 진정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 나는 당신의 오른손과 같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예니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예니가 없었다면, 마르크스는 평범한 사상가로 남았을 것이다”고 말했다. 예니의 묘비명은 “여기 카를 마르크스의 절반이 잠들다”이다.
“요즘 ‘자본’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카를 마르크스가 장모, 곧 예니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러자 장모는 “자본에 대해 글을 쓰지 말고, 자본을 좀 만들었으면….”하고 좀은 원망스럽게 맞받았다.
빈털터리로 끼니 걱정을 하면서도 자본에 대해 글을 쓰도록 생겨먹은 사람이 있다. 자본에 대해 쥐뿔도 모르면서, 자본을 잘 만들도록 생겨먹은 사람이 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진리이다.
오래 전 어느 날 밤, 부산 86번 버스 산복도로 변,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과 가까이 경계석에 앉아, 시내의 휘황한 야경 특히 아파트 숲에서 새어나오는 전깃불 조화를 내려다본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은 능력과 소유를 이야기했고, 나는 왜?와 자연을 이야기했다.
격강(隔江)이 천 리라 했던가. 몸의 한 뼘 거리와 마음속 한 치의 거리, 몸은 마음을 이기지 못한다.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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