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돌이가 한순간에 정적의 장막을 걷어낸다. “컹 크르르”. 시골의 어둠은 정적과 함께 온다. 어둠과 함께 모든 외부 소리가 사라진다. 서재에 있으면, 밤에는 소리라 해봤자 낮에는 들리지 않던 컴퓨터 소음만 종종 의식될 뿐이다.
다시 “컹 크르르, 컹”. 담장 위의 고양이가, 묶여 있어 위협이 못 됨을 눈치 채고서는 도망을 치지 않고 딴청을 피우는 모양이다. 한 번 더 ‘크르르 컹, 컹, 컹’을 끝으로 어둠 속에 정적이 제자리를 잡는다.
책상 앞 의자에서 다섯 발짝 떼면 방문이고, 방문 열고 한 발짝 곁에 맨돌이 집이 있다. 보통 맨돌이는 집에 들어가 있지 않고, 대여섯 발짝 앞,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사방의 움직임과 소리에 반응하고, 특히 앞쪽 살밖(사립문 밖) 골목길을 주시한다. 드물게나마 사람이나 차가 다니기 때문이다.
맨돌이는 내 생활에 요긴한 동서자(同棲者)이다. 삽짝에서 이십여 발짝 거리에 본채가 있고, 본채 곁으로 십여 발짝을 떼야 서재인 아래채가 있다. 사람들은 본채의 문만 두드린다. 기척이 없으면, 거주자가 부재중인 줄 안다. 나 또한 누가 본채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도 알 턱이 없다. 이런 참에 맨돌이는 짖어댐으로 방문자를 알려준다.
맨돌이는 내 유일한 식구이다. 그는 나와 식사 내용물이 거의 같다. 맨돌이의 식사는 내가 먹는 밥에 내가 먹는 국을 말은 것이다. 횟수는 차이가 있다. 나는 하루 두 끼인데 반해, 맨돌이는 한 끼만 먹는다. 이는 당연하다. 70kg과 20kg으로, 몸무게 다르기 때문이다.
운동을 나가든, 생필품 사러 마트에 가든, 볼 일 보러 주민센터에 가든, 맨돌이와 동행했다. 지인들은 내 곁에 맨돌이가 없으면, “개는 어쨌노?” 하고 물을 정도였다. 외출할 때는 대부분 자전거를 이용한다.
한때는 리드줄은 호주머니에 넣고 자전거를 타며, 맨돌이에게는 목줄만 채운 채로 자유롭게 했다. 그러면 맨돌이는 자전거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 들판의 비둘기를 좇아 내닫기도 하다, 끝내는 졸졸 자전거를 뒤따른다. 맨돌이는 묶여 있어 응축된 운동 에너지를 맘껏 발산하며 자유를 만끽한다. 그 자유는 내게도 전염돼 내 마음도 자유로워진다.
맨돌이는 2살 남짓이다. 혈기방장한 청춘이다. 자전거는 아스팔트 도로에서 페달을 힘껏 밟으면 시속 35km쯤 된다. 딴전 피우던 맨돌이가 멀어지는 자전거를 발견하고 내달려오면 얼마지 않아 자전거를 따라잡는다. ‘이렇게 피 끓는 청춘이 묶여만 있었다면, 얼마나 깝깝했을까!’
개는 학습능력이 뛰어나다. 몇 번 가본 목적지는 이미 알고 있다. 마트 앞에 미리 가기다리는 경우가 많다. 뒤늦게 도착한 나는 아무 기둥 근처에 자전거를 세우고, 리드줄을 목줄과 연결해 기둥에 묶어두고 볼 일을 봤다.
문제는 개의 활기찬 자유로움이 종종 인간의 규칙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한데 간혹, 아마 맨돌이의 기준이겠지만, ‘낯선’ 사람이라 싶으면, 다가가 짖는다. 그것도 이빨을 드러내고 말이다.
누가 좋아하겠는가. 풀린 개가 적의(?)를 보이는데. 물론 나는 믿는다, 맨돌이가 입질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질을 습관이라고 들었다. 맨돌이가 한 번이라도 입질을 한 적은 없다. 해서 믿기 때문에 리드줄을 잡지 않고 자유롭게 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내 생각일 뿐일지도 모른다.
한 번은 아침 운동을 나갔는데, 뒤따르면 맨돌이가 심하게 짖는다. 돌아보니 학교버스를 기다리는 어린이를 보고 짖어댄 것이다.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제 집 쪽으로 도망을 쳤다. 동네 앞 들판에 새집 지어 비닐하우스 재배하러 이사 온 외지인의 자녀이다.
부모가 달려 나오고, 아이 아버지가 경찰에 신고하니 어쩌니 하는 등 아들 연배에게 호되게 당했다. 다행히 아이 엄마가 “저도 개를 좋아해 키워 봐서 압니다. 물지는 않더라도 아이들이 울며 놀라니, 아이 아버지의 입장도 생각해 주십시오.” 라며 가운데서 무마를 했다. 그 아이 엄마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물론 리드줄을 잡지 않아, 통제하지 못한 견주는 법규 위반으로 벌금 딱지를 받을 수도 있다.
윗사람에게든 아랫사람에게든 요 몇 년 새 질책 받을 만한 일을 한 적도 없고, 받은 적도 없다. 누구와도 언쟁을 벌인 적도 없다. 잘못은 분명히 내 잘못인데도, 기분이 많이 상했다. 그러나 냉철히 생각해서 만약 물기라도 했다면, 아찔하다. ‘다시는 데려나가지 말아야지!’ 그러나 이 다짐은 이내 무너졌다.
외출 낌새를 맨돌이는 잘 안다. 외출할 요량으로 서재 문을 열고 나와 신발을 신으면, 달려들어 막 안기고 핥고 야단이다. 자전거 쪽으로 내가 가면, 제가 미리 좋아하며 앞뒤 양옆으로 내달려가고 오고 난리법석이다. 그리고 자전거 핸들을 잡으면, 쳐다본다.
아, 그 눈빛! 기쁨과 바람 …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원망(願望)이 담긴 그 눈빛, 그걸 뭉개버리기에는 내 다짐이 턱없이 약하다. 그렇다고 또 욕됨을 당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궁여지책으로 리드줄을 잡고,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어째 조마조마했지만, 최선의 타협책이었다.
마당에서 출발해 삽짝을 나서서 돌아, 큰길로 나갈 때까지 숫제 맨돌이가 자전거를 끄는 형국이다. 브레이크를 잡아야 할 정도다.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1km여 내달리면 그제야 맨돌이는 자전거 옆에서 보조를 맞춘다. 좀은 불안하지만 이것으로 됐다, 고 생각했다. 몇 번은 더불어 외출을 무사히 마쳤다.
한데 무사한 일이 아니었다. 한 번은 보조간선도로로 리드줄을 잡고 맨돌이와 보조를 맞춰 달렸다. 자동차는 뜸하다. 맨돌이를 의식하지 않고, 내 생각만 해도 될 성 싶었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맨돌이가 옆으로 화들짝 뛰어 자전거의 방향과 속도가 엇갈려, 자전거가 고꾸라지면서 나는 내동댕이쳐졌다.
이게 무슨 일? 덩치 큰 덤프트럭이 고속으로 스치자, 맨돌이가 놀라서 딴에는 방어조치를 취한 것이다. 때문에 나는 위험한 순간을 당했다. 다행히 찰과상 정도로 그쳤다. 그러나 운이 나빴으면, 혹?
이제 다짐이 아니라, 결심을 했다. 이제 맨돌이와 동행하지 않는다. 맨돌이의 자유를 제한한다. 그 간절한 눈빛에도 질끈 눈을 감는다. 맨돌이의 자유를 위해, 내 몸을 상하게 할 이유는 뭔가? 단, 그의 활동 폭을 가능한 한 최대로 넓혀주기 위해 묶어두는 줄을 10m 넘게 긴 줄로 갈아주었다.
내 속내를 모르는 사람들은 대개 심심파적 등 내 필요에 의해 개를 데리고 다닌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다. 난 특별한 용무가 있지 않은 이상, 외출 시 메모지와 볼펜은 반드시 챙기되, 휴대폰은 지니지 않는다. 예전 산행 길에서, 요즘 산책길에서 노래 등을 듣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의 지성을 신뢰하지 않는다.
몸의 자유뿐 아니라, 정신의 자유도 중요하다. 매임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빈 마음에 절로든 생각으로든 뭔가를 채울 수가 있다. 맨돌이는 휴대폰과 같은 역할을 한다. 신경이 쓰인다. 정신을 비울 수가 없다. 그래도 동행한 건, 그 눈빛 그리고 내가 자유를 높이 치는 만큼 그에게도 자유를 주고 싶다는 간단명료한 판단 때문이었다.
내가 조금만 손해 보면, 자리이타(自利利他)란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도 이익이고 너도 이익이어야 하는데, 너의 이익이 나에게 막심한 손해라면, 달리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이 지점에서 ‘사랑’을 생각한다. 맨돌이가 사람이라면,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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