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현
승인
2020.02.03 13:21 | 최종 수정 2020.06.17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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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에서 잠자는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인간과 우주에 담긴 정보의 빅히스토리’라는 부제가 붙은 ‘인포메이션(Information)’. 책장을 주르륵 넘기다 보니 눈에 익은 문구가 보인다. 10년 전에 읽은 같은 제목의 책이 떠오른다. 다시 서가를 뒤져보니 ‘과학의 새로운 언어’라는 부제가 달렸다. 다른 부제의 두 인포메이션에서 강렬한 호기심을 자극한 문구는 공교롭게도 같았다. ‘존재는 비트로부터(It from bit)’.
존재가 비트로부터라니. 우주나 인간이 비트로 구성된다고! 놀라움과 황당함이 교차한다. 비트(bit)는 정보의 최소단위를 말한다. 이를테면 0 혹은 1이다. 모든 수는 물론 텍스트나 이미지·영상도 디지털 변환을 통해 비트로 표현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비트(정보)가 존재를 구성한다니. 우주와 인간 같은 존재를 구성하는 건 물질이다. 이게 상식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정보란 자료이자 데이터이고 상태이자 지식을 말한다. 어떻게 이런 정보로부터 존재가 탄생할 수 있다는 말일까.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관습에 의해 달고, 관습에 의해 쓰며, 관습에 의해 뜨겁고, 관습에 의해 차갑다. 색깔 역시 관습에 의한 것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원자와 진공뿐이다”고 선언했다. 달다 쓰다 뜨겁다 차갑다 등은 모두 주관적인 것이며, 원자와 진공의 존재만이 객관적인 실체라는 것이다. 데모크리토스의 이 언명은 2000년 동안 과학자들에게 ‘객관성을 향한 꿈’을 제공했다. 과학이란 객관적인 실재를 탐구하고 기술하는 학문이 아니던가. 데모크리토스의 진술을 간단히 바꾸면 ‘존재는 원자와 진공으로부터’가 되겠다.
‘존재는 비트로부터’와 ‘존재는 원자와 진공으로부터’는 의미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 전자를 처음 언급한 사람은 저명한 천체물리학자로 ‘블랙홀’ 명명자인 존 아치볼트 휠러이다. 휠러는 같은 제목의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존재는 비트로부터’라는 문구는 물리적인 세계의 모든 대상이 그 바닥에 비물질적인 원천과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또한 우리가 실재라고 부르는 것이, 최종적인 분석에 의하면, ‘예-아니요 질문’을 제기하고 답하는 것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세계의 모든 대상이 비물질적인 원천과 이유를 갖는다’는 놀라운 언급이야말로 ‘존재는 비트로부터라’는 명제의 의미에 다가가는 길을 알려준다. 이건 물리학의 양대 기둥인 양자역학의 원리와 맞닿아 있다. 비록 우리의 직관이나 상식과 정면 배치되는 내용이어서 가슴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양자역학의 실용성을 의심하는 물리학자는 아무도 없다.
양자론의 아버지 닐스 보어는 “물리학, 특히 양자역학은 이 우주 자체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우주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만을 기술한다”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우주를 완전하게 기술하지 못하는 이론은 엉터리”라며 보어와 세기의 논쟁을 벌였다. 과학사의 유명한 사건이다. 이 논쟁의 패배자는 아인슈타인이다. 보어가 말한 ‘세계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만 기술한다’는 건 ‘관측된 물리량만 의미가 있다’는 양자역학의 기본 전제이다. 미시세계의 대상(양자)은 관측하기 전에는 그 속성(정체)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말할 수 없다. 그러니 이 세계는 관측된 물리량의 총체로 기술해야 한다. 관측된 물리량 즉 관측값은 모두 정보, 비트로 표현할 수 있다. 이제야 ‘존재는 비트로부터’의 의미를 조금 알 것 같다.
관측은 인간이 한다. 비트는 인간의 개입을 전제한 관계의 소통 개념이다. 결국 존재(우주·세계)는 인간과 관계를 떠나 이야기할 수 없게 된다. 요즘 물리학은 그동안 애써 추방한 철학(형이상학)을 다시 불러오는 조짐을 보인다. 휠러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물리학만 다루는 물리학 이론은 결코 물리학을 설명할 수 없다. 나는 우주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같다고 믿는다. 물리적인 세계는 어떤 깊은 의미에서 인간과 묶여 있다.”
※ 원문 보기 ☞ 국제신문 [과학 에세이] 2020-01-27
<웹진 인저리타임 대표·동아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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