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열전'과 '춘추전국시대의 법치사상과 세勢・술術' 표지와 사기의 저자 사마천. 출처: 위키백과
히틀러가 가장 존경한 철학자가 니체(Freidrich Wilhelm Nietzsche)였다. 시간적 제약을 무시하고 인문학적 사고 실험(Thinking experiment)으로서 만약에, 정말 만약에 히틀러가 니체를 교육부 장관이나 문화부 장관에 임명했다면, 니체가 받아들였을까? 아니더라도 자기를 알아준다는 이유로 니체가 히틀러에게 의리를 가지게 되었을까?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는 나치스의 좌파 지도자 슈트라서의 비서였다. 그는 슈트라서와 히틀러의 대립이 심각해지자, 충성을 맹세하고 히틀러 편에 섰다. 당 선전부장으로서 교묘한 선동정치로써 당세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나치스가 정권을 잡자 선전장관으로서 문화면을 완전히 통제하고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였다. 최후까지 히틀러에게 충성했으며, 히틀러가 자살한 다음날 총리 관저의 대피호에서 처자와 함께 자살하였다.
괴벨스는 ‘자기를 알아준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건 것일까?
예전에 미자하彌子瑕라는 사람이 위衛나라 군주에게 총애를 받았다. 위나라 법에 군주의 수레를 타는 자는 월형(刖刑. 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얼마 뒤에 미자하의 어머니가 병이 나자, 어떤 사람이 밤에 미자하가 있은 곳으로 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미자하는 군주의 명령이라고 속여 군주의 수레를 타고 대궐 문을 빠져나갔다. 군주는 이 일을 듣고 미자하를 어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효자로구나! 어머니를 위해서 다리가 잘리는 형벌까지 감수하다니!”
또 미자하가 군주와 과수원에 갔다가 복숭아를 먹어보니 맛이 달았다. 미자하가 먹던 복숭아를 군주에게 바치자 군주는 또 이렇게 말했다.
“나를 끔찍이 위하는구나. 제 입맛을 참고 이토록 나를 생각하다니.”
그 뒤 미자하는 고운 얼굴빛이 사라져 군주의 총애를 잃고 군주에게 죄를 짓게 되었다. 그러자 군주는 이렇게 말했다.
“이자는 예전에 나를 속이고 내 수레를 탔고, 또 먹다 남은 복숭아를 내게 먹였다.”
미자하의 행위는 처음이나 나중이나 다를 바가 없지만 처음에는 현명하다고 칭찬을 받고 나중에는 죄를 입게 되었다. 그것은 군주가 그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완전히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주에게 총애를 받을 때에는 지혜가 군주의 마음에 든다고 하여 더욱 친밀해지고, 군주에게 미움을 받을 때에는 죄를 짓는다고 하여 더욱더 멀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군주에게 간언하고 유세하는 자는 군주가 자기를 사랑하는가 미워하는가를 살펴본 다음에 유세해야 한다.(김원중 옮김, 『사기열전』 <노자・한비자 열전>, 민음사)
군주의 총애란 고작 이런 정도이다. 하여 군자는 길이 다르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므로 충성은 때론 위험하다. 국민의 안녕과 국가 보전의 길이 오른쪽인데 왼쪽으로만 치달으며 개인적 야욕만 추구하는 군주에게는 충성이 아니라 차라리 배신이 지당하지 않을까? 중차대한 국정을 보좌해야지 주군의 심기만 보좌한다면, 국정 농단의 주역을 자임할 뿐인 것이다.
『사기열전』 의 <자객열전>에 진晉나라의 예양豫讓이라는 사람이 나온다. 그는 일찍이 범씨笵氏와 중항씨中行氏를 섬겼지만 별다른 대우를 받지 못했다. 예양은 그들을 떠나 지백智伯을 섬겼다. 지백은 그를 매우 존경하고 남다르게 아꼈다. 그런데 지백이 조양자趙襄子를 치다가 되레 멸망하게 된다. 이에 예양은 산속으로 달아나 탄식하며 말했다.
“아!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고, 여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얼굴을 단장한다고 했다. 이제 지백이 나를 알아주었으니 내 기필코 원수를 갚은 뒤에 죽겠다. 이렇게 하여 지백에게 은혜를 갚는다면 내 영혼이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목숨을 바쳐 복수를 하겠다는 대의명분이 ‘자기를 알아줬다’는 것뿐이다. 개인적인 은혜에 보답하는 일이 상찬 받을 일인가? 뒷골목 의리나 괴벨스의 히틀러에 대한 충성과 다른 점이 있는가?
조양자를 암살하려다 잡혔다. 조양자가 꾸짖었다.
“그대는 일찍이 범씨와 중항씨를 섬기지 않았는가? 지백이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지만, 그대는 그들을 위해 원수를 갚기는커녕 도리어 지백에게 예물을 바쳐 그의 신하가 되었네. 이제 지백도 죽었는데 그대는 유독 무슨 까닭으로 지백을 위해 이토록 끈질기게 원수를 갚으려 하는가?”
예양이 말했다.
“저는 범씨와 중항씨를 섬긴 일이 있습니다. 범씨와 중항씨는 모두 저를 보통 사람으로 대접했으므로 저도 보통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보답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백은 저를 한 나라의 걸출한 선비로 대우하였으므로 저도 한 나라의 걸출한 선비로 그에게 보답하려는 것입니다.”
조양자는 예양의 충성심과 절개를 높이 평가하고 예자豫子라고 경칭하며, 그의 소원대로 자신의 옷을 가져다주게 했다. 예양은 칼을 뽑아 조양자의 옷을 내리치고, 이것으로 지백의 은혜를 갚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칼에 엎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예양이 죽던 날, 뜻있는 선비들은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사마천도 긍정적으로 평가했기에 <자객열전> 다섯 명 중 한 명으로 예양 이야기를 실었다. 후세에 ‘사성’史聖이라 불리는 사마천이 개인적인 은원恩怨을 푼 예양을 높이 평가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무렵인 춘추전국시대의 시대적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원전 1122년 목야牧野 전투에서 은殷의 대군을 격멸하여 은 왕조를 멸하고 호경鎬京에 도읍하여 비로소 주周 왕조가 개국된다. 주 왕실은 개국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봉건제도를 실시한다.
전국의 전략적 요충지에 주 왕실의 자제, 일족, 동맹의 부족들을 제후로 임명하여 분봉, 배치하였는데 그 수효는 100~180여 국이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제후를 배치한 다음에 정치・군사적 도시 낙읍洛邑을 건설하여 은족 및 주변 부족들의 준동과 반란에 철저히 대비하였다. 그러나 이 수많은 제후들에 대한 제어, 통할이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주 왕실은 주육사周六師 , 은팔사殷八師, 정주팔사鄭州八師 등의 강력한 무력을 기반으로 외면적으로는 조공朝貢제도와 순수巡狩제도를 실시하여 제후들의 주 왕에 대한 봉건적 군신君臣관계를 수립했다. 내면적으로는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으로 구성된 종법宗法제도를 도입하여 주 왕과 제후 간의 관계를 본가本家와 분가分家의 관계로 만들고, 이성異姓 제후는 동성불혼同姓不婚의 법칙을 통하여 주 왕실 일가로 포섭하여 주실일가周室一家의 천하를 만들었다.
주 왕실로부터 받은 봉지에 도착한 제후들을 기다린 건 적의에 찬 은나라 유민들과 할거하는 토착민들의 침탈이었다. 수적으로 열세였고 고립되었던 제후 집단은 우선 주변 이적夷狄들의 침입과 약탈을 방지하고 안정할 수 있는 정치・군사적 세력 기반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전략적 요충지에 성읍을 조성하여 정치・군사적 거점을 마련하였는데 이것이 국國의 조성이었다. 연후에 다시 주변의 토지를 일족들에게 분배하여 성읍을 조성케 하였는데 이것이 경대부卿大夫의 채읍采邑이었다.
이렇게 정치・군사적 세력기반을 확립한 각 제후국은 다음으로 주변 토착민들을 포섭, 동화하기 시작하였다. 토착민과의 농경지 개간, 관개수리사업의 추진, 토착민에 대한 군사적 보호, 토착민 신神에 대한 제후의 사제장 역할, 상호간의 통혼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은 유민과 토착민들을 제후의 백성들로 포섭, 수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은 토착민들의 신에 대한 제사를 제후가 장악한 것이다.
당시 토착민들은 수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는데 이 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신은 토지신이었던 ‘사’社와 농업신이었던 ‘직’稷이었다. 제후는 궁실의 좌측에는 제후 조상신을 모시는 종묘宗廟를 두고 우측에는 토착민들이 숭배하는 사직묘社稷廟를 안치하였다. 제후는 토착민을 대표한 사제司祭가 되어서 사직신에 대한 제사를 정기적으로 거행하고 농사의 풍년과 나라의 평안을 빌었다.
이같이 매년 거행되는 제후와 토착민과의 공동제사는 마침내 제후와 토착민 사이에 정신적 일체감을 형성시키고 이를 통해 제후는 토착민들을 자신의 백성들로 포섭할 수 있었으며, 사직社稷은 마침내 국가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리고 종묘는 제후 일족의 조상신만을 제사 지내는 제후 일족의 전묘專廟로 변하였다.
당시 농민들은 사회・경제적 발전에 따라 마을을 떠나 야외로 나가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경에 종사하기 시작하였으므로 씨족적 규제 아래 있던 마을도 점차로 해체되기 시작하고 서서히 지연관계가 혈연관계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족周族, 은족殷族, 토착민 간에 씨족과 부족을 불문하게 되고 또 정복, 피정복의 구분과 차별도 점차로 소멸되고 상호 통합하기 시작하였으며 동시에 자연스럽게 각 제후국의 백성들로 포섭되었다.
또 이와 같은 현상과 병행했던 것은 각 제후들의 토지 소유권 장악이었다. 주대周代의 모든 토지는 원칙적으로 주 왕의 소유였다. 그러므로 제후가 주 왕으로부터 분봉될 때 받은 봉지封地는 일정 기간 제후에게 위임된 것이었다. 이후 이렇게 위임된 토지는 제후 및 그 일족들에 의해 세습적으로 통치되었는데 장구한 시일의 경과와 더불어 점차로 제후 및 일족의 사유私有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더하여 제후들은 변병을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봉지 주변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주변 원시 이족들을 회유, 무마하여 동화시키거나 무력으로 정벌하여 그들의 영토를 병합하였으므로 각 제후들의 영토는 꾸준히 확대, 팽창하였다. 그리하여 제후가 주 왕으로부터 위임받은 토지, 제후 자신이 직접 개척하였던 토지, 무력을 통해 병합하였던 토지는 장구한 시일의 경과와 함께 마침내 제후의 자주自主 영역으로 변모되고 말았다.
문화적으로도 제후국들은 주 왕실과 유리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주 왕조의 영토는 남북으로는 남만주에서 양자강 중류에 이르고, 동서로는 위수渭水에서 산동반도에까지 달하였다. 이렇게 광대하고 다양한 지역에 분봉된 각 제후국은 처음부터 강렬한 지역적 토착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문화도 토착성이 강하였다.
이에 따라 일부 제후국은 이와 같은 자연환경과 지리적 조건에 적응하고 또 선주민이 이룩한 토착문화와 전통에 상응하는 정책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마침내 지역적 차이와 환경에 적응된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일부 제후국에는 주 문화와는 유리되면서 각 지역의 특수성과 사정에 제약된 그리고 토착성이 강한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도 제후국은 주 왕실과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주나라 개국 초기 각지에 분봉된 제후들은 대부분이 주 왕실의 근친이었고 동맹부족이었으므로 주 왕실과 제후와의 관계는 공동혈연의식 또는 공동운명의식으로 강고히 결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 왕의 실제적 통치력은 직할지였던 왕기王畿 지역에 한정되었으며 왕기 지역 이외의 제후국 내부에까지 관철되지 못하였다. 각 제후국은 실제적 통치자는 제후였으며 다만 조근朝覲의 예禮를 통해 간접으로 주 왕에게 복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구한 시일이 경과되고 세대가 무수히 교체됨에 따라 주 왕실과 제후 간에는 필연적으로 혈연적 유대관계가 약화되고 동족의식이 소멸되기 시작하였다.
각 제후국은 그들 내부에서 제후를 정점으로 한 새로운 지배씨족의 성립, 토지의 사유화, 토착백성들의 포섭 등을 기반으로 자립, 독립화 현상이 가속되어 왔으며 서주 말기에는 마침내 제후 중에는 주 왕실에 대항할 수 있는 정치・군사・경제적 힘을 갖춘 인물도 나오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제후들의 힘을 노골적으로 표면에 부상시킨 것이 주 유왕幽王 때의 견융犬戎의 침입과 주의 동천東遷이었다.
견융은 여산驪山 아래서 주 유왕을 패사시키고 수도 호경을 함락시켰다. 이에 아들 유 평왕平王은 진晋, 위衛, 진秦 등의 제후들 도움으로 낙읍洛邑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이것이 주의 동천(기원적 770)이었다. 또 기원전 707년에는 주 환왕桓王과 정후鄭侯 사이에 무력 충돌이 일어났는데, 여기서 주 중앙군은 패배하고 주 환왕도 부상당하였다.
이와 같은 견융의 침입과 유왕의 사망, 호경의 함락과 동천, 주 중앙군의 패배와 환왕의 부상 등은 주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결정적으로 실추시켰을 뿐 아니라 주 왕실의 무력약화를 폭로한 것이었다. (참고문헌: 이춘식, 『춘추전국시대의 법치사상과 세勢・술術』, 아카넷) (곧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