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공桓公이 마루 위에서 독서를 하는데, 마루 아래서는 윤편輪扁(바퀴 기술자)이 바퀴를 만들고 있었다. 윤편은 망치와 끌을 놓고 올라가 환공에게 물었다. “감히 묻습니다. 읽고 계신 것에 무슨 말이 있습니까?” 환공이 답했다. “성인의 말씀이다.” 윤편이 물었다. “성인이 살아 계십니까?” 환공이 답했다. “이미 돌아가셨어.”
윤편이 말했다. “그러면 임금께서 읽으시는 것은 성인의 찌꺼기이겠군요.” 환공이 말했다. “과인이 독서를 하는데 수레 바뀌나 깎는 네가 어찌 논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를 설득하면 좋지만, 설득하지 못하면 죽일 것이다.”
윤편이 말했다. “신복합니다. 신臣이 하는 일로 본다면, 바퀴를 깎을 때 바퀴통이 헐거우면 견고하지 못하고, 단단히 조이면 빡빡하여 들어가지 않습니다. 헐겁지도 빡빡하지도 않게 하려면, 손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감응하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입으로 능히 말할 수 없는 이치가 그 사이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신도 신의 아들놈에게 가르쳐 줄 수 없고, 신의 아들 역시 신에게서 물려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칠십 년을 일하며 늙었으나 아직도 수레를 깎고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도 전해 줄 수 없는 그것과 함께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즉 임금께서 읽으시는 글도 옛사람의 찌꺼기일 뿐이겠지요.”
세상이 귀하다고 말하는 것은 책이다. 그러나 책은 말에 불과할 뿐이니, 말이 귀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말이 귀하게 여겨지는 것은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뜻에는 뒤따르는 게 있다. 그런데 문제는 뜻에 뒤따르는 것은 말로써 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즉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知者不言지자불언), 말하는 자는 아는 사람이 아니다(言者不知).¹⁾²⁾
내 동기 중에 별 인기가 없는 친구가 있다. 드물게 두세 명은 아주 좋아한다. 나도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칠팔 명은 싫어한다. 싫어하는 이유를 대라면, 딱히 초들어 말하지는 못한다. 말이 너무 많다, 대충 이렇게 얼버무린다. 내가 보기에는 별 말이 없는 친구다. 한데 왜 다른 친구들은 말이 많다고 할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분명히 아는 것은 있다. 친구들과의 이런 저런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 친구와 다른 친구들 간에 주장의 합치점이 없다는 것이다. 그 친구와 그 외 모든 친구들로 주장이 갈린다. 나는 내 의견이 별로 없다. 두 편이 모두 옳은 것 같기도 하고, 틀린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안타까워서 그 친구에게 다른 친구들의 주장을 애써 반박하지 말고, 그냥 들어만 주라고 했다. 그 친구는 내 애타함을 익히 알고 있다는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무식하니 말을 많이 한다네.”
경식이 부친이 별세했다. 동기들이 장례예식장에 모였다. 고인은 70대 후반이었다. 팔순에 가깝지만, 70대는 애매한 나이이다. 50대 초반인 우리는 보통 동기들 부모 상사喪事에 가더라도 마음이 무겁지 않다. 대부분 망자들이 80대 이상이다. 이 세상에서 누릴 만큼 누린 삶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70대는 뭔가 좀 아쉽다. 그러니 상주의 천붕지통天崩之痛을 헤아려 굳은 표정을 지어야 하나? 좀 힘들다.
그 친구 행동거지는 평소처럼 장례식장에서도 자연스러웠다. 애도의 기미도 안 보이는 듯했다. 소주를 잔마다 주르르 채웠다. “고인이 되신 어른이 생전에 암 투병하시면서도 즐긴 음식이네. 우리도 즐기며 고인의 명복을 빔세.” 한 동작으로 술잔을 털어 넣었다.
암에 걸리셔서 술을 드셨다니, 술만 멀리하고 몸조리했으면, 10년은 더 사셨겠네. 암에 걸리셨으면, 오로지 치료에만 전념하셔야지. 술이 원수였구나. 동기들의 대체적인 의견이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이 사람들아, 술이 원수라니. 낙이었지. 평생 즐기던 술, 70대 후반에 암 걸렸다고 못 마시면 뭘 바라 암 치료하나? 아무 낙 없이 10년 생명 연장이 무슨 보람이 있겠나. 식물인간처럼 낙 없이 백수를 누리느니, 즐기며 70 평생이 더 낫지 않은가. 어이, 상주, 그렇게 찌푸리지 말게 자네도 한 잔 하게나.”
경식이 낯빛이 좋지 않았다. 친구들은 아예 얼굴을 외로 꼬았다. 그러나 그 친구는 태연했다.
북경반점에 자장면을 먹으러 갔다. 꽤 손님이 많은 중국집이다. 자주 가는 곳이라 안팎의 주인을 잘 안다. 요즘은 비닐하우스 인부들도 점심은 가까운 식당에서 먹는다. 주인 입장에서 집에서 점심을 준비하는 것보다 식당 밥을 먹이는 게 더 싸게 치인다고 한다. 비닐하우스 집단과 가까운 북경반점은 그래서인지 손님이 많다. 매상고가 올라가니 주인 콧대도 올라간다. 안사람과 딸이 서빙을 하고, 종업원도 두 명 두었는데 이주노동자다. 한국말이 서툴다.
몸집이 좋은 종업원은 싹싹하고, 가녀린 종업원은 뚱하다. 새로 들어온 두 달여 전에는 표정이 밝았다. 한데 요즘은 볼 적마다 뚱해 있다. 같이 서빙하는 사장 부인의 구박 탓인 듯했다. 곱상하게 생겨 더 싹싹하고 일을 잘할 줄 알았는데, 기대와는 딴판이란다. 손님들 볼세라 목소리를 죽여 가며 막 면박을 줬다. 내가 볼 때는 사장의 기대 높이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손님의 주문에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하는 깐으로 봐서는 열심이었다. 이국땅에서 설움이 많겠지.
“역시 사람은 겪어봐야 알아요. 겉보기와는 영 달라요. 말 배우는 것도 늦고. 도무지 노력을 안 해요. 갈아치우든가 해야지 원.” 그 날도 우리에게 자장면을 갖다 주면서 종업원 흉을 보았다. 그 친구가 나섰다.
“딴은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요. 나무라 치지만 말고, 가르쳐서 좋은 식구로 만드세요.” 친구의 말에 여사장은 모르는 소리 말라는 듯이 한 번 더 강조했다. “같이 안 살아보면 몰라요. 속도 모르면서. 아저씨도 같이 일해 보면 내가 왜 속이 썩는지를 알 거요.”
“엿장수 마음대로 흰 고무신만 바랄 수 있나. 겪어봐야 사람을 안다고요? 그렇다면 여사장님 딸내미도 한 6개월 동거 시키다가 속을 알게 되면, 물새를 놓든지 결혼시키면 되겠네.” 비아냥거리는 말 같은데 친구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여사장은 ‘그게 무슨 말이라고...’ 기가 차다는 듯이 눈길을 한 번 되쏘고는 총총걸음으로 주방에 들어가 버렸다.
한 친구가 한국전력공사(한전) 고향 지사장으로 부임해 왔다. 시골 친구들의 입장에서는 꽤나 출세한 셈이다. 중학교 남녀 동기들을 모아 부임 턱을 냈다. 올 여름은 유난히 덥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더위와 에어컨과 전기요금으로 모아졌다. 그러다가 제법 안다는 축에 드는 한 친구가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탈원전’이 문제라는 주장이었다. 전력예비율이 7%대까지 떨어져서 ‘블랙아웃’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했다.
‘아마추어 정부가 에너지 전환을 강행하려고 원전 가동률을 인위적으로 낮추었고, 그 결과 에너지 수급이 빠듯해졌다’는 언론 보도를 들먹이며, 좌빨 정부가 하는 일이 이 꼴이라며 비난에 열을 올렸다.
잠자코 술만 마시며 듣고 있던 그 친구가 술잔을 비우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뭔가 말을 하려 할 때의 예비동작이었다. “네가 열을 내며 말하고 있는 것은, 원전 가동률은 일단 높아야 한다는 ‘이상한 믿음’과 전력예비율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한 ‘무지’에서 나온 잘못된 주장이거든.” 하며, 심상치 않게 시작했다.
전력부문 7개 공기업의 영업이익이 12조 원이며, 발전 공기업과 민간 발전재벌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탈원전·탈석탄을 무력화하려는 필사적 저항일 뿐이다. 한국의 전력 설비는 과잉상태에 있다. 발전자본이 항상 장래 전력수요를 과잉 추계하여 설비 확충 정당화 논리를 끊임없이 설파해 왔다. 더욱이 예비전력은 ‘돈을 내고 버리는 전기’이다. 보통 새벽의 예비율은 46% 정도인데 예비전력이 6700만KW에 달한다. 한국전력이 발전사업자들로부터 구매한 6700만KW가 쓰이지 못하고 버리진 것이다. 100만KW 의 예비력을 갖추는 데 2조 원의 비용이 든다. 그러므로 예비율을 높이면 전기요금을 올려야 한다, 고 파죽지세로 주워섬겼다. 나는 아는 바도 없고, 관심도 없는 말이다.
한전지사장 친구는 의연히 앉아만 있고, 아무 말이 없었다. 표정이 별로 밝지는 않았다. 내뛸성 좋은 한 친구가 지사장 얼굴을 얼핏 한 번 살피고는, 그 친구에게 일갈을 했다. “얄마, 그만해. 네는 이게 탈이야. 친구들이 왜 너를 싫어하는 줄 아나? 술값은 안 내면서 할 말을 다하기 때문이야. 알기는 아나?”
그 친구는 타박하는 친구를 빤히 쳐다봤다. 입가에는 웃음기를 달고 있었다. 그래, 그만하지, 하며 담배 하나 피우고 오겠다며 일어섰다. 나도 따라 나섰다. 맛나게 담배를 피우는 그의 뒤태를 물끄러미 쳐다만 봤다. 이윽고 담배를 비벼 끄고 나를 돌아다보며 말했다.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고,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고 그러지. 하지만 말을 안 한다고 아는 것은 아니잖아.”
※1)『장자莊子』(외편), 「천도天道」 2)참조. 권오석 역해, 『莊子』(홍신신서, 1994) / 기세춘, 『장자』(바이북스, 2011)
<칼럼니스트·인저리타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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