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공립 알베르게에서 나와 들른 바에서 주민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 조해훈
오늘은 2024년 11월 27일 화요일이다. ‘콤포스텔라 데 산티아고’의 공립 알베르게에서 아침 9시 15분쯤 나왔다. 숙박한 사람이 필자와 미국 여성 두 사람뿐이었다. 대개 아침 8시 전까지는 알베르게에서 나와야 하지만 순례자가 세 명뿐이어서 직원이 강제하지 않아 늦게 나왔다. 필자가 나올 때까지 미국 여성들은 배낭을 챙기고 있었다.
콤포스텔라성당으로 가는 도로 주변. 사진= 조해훈
오늘은 최종 목적지인 콤포스텔라 성당 앞 오브라도이로 광장(The Plaza del Obradoiro)까지 걸어갈 계획이다. 큰 도시답게 도로가 넓고 자동차가 많다. 어제 첫 번째 들렀던 바에 들어갔다. 콤포스텔라 성당까지는 시간이 그다지 많이 걸리지 않으므로 아침 식사로 커피와 빵을 먹으며 어제 마치지 못한 원고를 쓸 생각이었다. 바에는 아침인데도 손님들이 많았다. 순례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모두 주민들이었다. 이 도시의 시민들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10만 명 안팎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도시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건 순례자와 관광객이 많아서이다.
콤포스텔라성당으로 가는 도중에 만난 작은 성당. 사진= 조해훈
스페인 북부 주민들은 낙천적이고 대화하는 걸 즐긴다는 인상을 받았다. 오늘 아침 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손님들 모두 인근 주민으로 보였다. 그들은 서로 환하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즐겁게 대화한다. 필자가 40일간 순례길을 걸으면서 산촌에서든, 도시에서든, 노인들이든, 젊은이들이든지 간에 먼저 인사를 건네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환한 얼굴로 답례를 해주었다. 필자가 산티아고에 들어선 기쁨도 일부 작용하겠지만, 오늘 아침 바에서 대화를 나누는 주민들의 표정은 더 밝게 느껴졌다.
바에서 오전 11시 48분에 나왔다. 상점마다 콤포스텔라 성당의 사진이나 이미지들이 붙어있다. 바 바깥으로 나오니 바로 앞에 순례자 한 사람이 성당을 향해 걸어간다. 저 사람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 걸까? 그러면 나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필자도 성당에 다닌 적은 있지만 공식적인 가톨릭 신자라고 할 수는 없다. 일반인들보다는 가톨릭이라는 종교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하는 수준 정도이다. 여하튼 이 도시는 스페인의 북서부 갈리시아 자치 지역에 있으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198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도시이다.
길가 작은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서 주민들이 커피를 마시고 있다. 사진= 조해훈
거리에는 그다지 높은 건물이 없다. 그러니 크게 복잡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낮 12시, 오래된 작은 교회가 길가에 서 있다. 이 도시에 콤포스텔라 성당만 있는 게 아니라 동네 여러 곳에 작은 교회가 있다. 이 교회 위로 보이는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떠 있고 맑다. 교회를 지나니 ‘왼쪽으로 가라’는 표석이 있다. 콤포스텔라 성당까지 2,576km 남았다고 적혀 있다. 그러면 필자가 어제 잠을 잤던 공립 알베르게에서 최종 목적지인 콤포스텔라 성당까지는 대략 3km 거리이다. 왼쪽으로 꺾자 길가에 작은 카페가 있다. 손님들이 카페 밖 야외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모두 겨울옷을 입었다. 대서양 인근 스페인 북서부 지역이어서 11월 말인데도 초겨울 날씨처럼 춥다. 필자는 커피를 마신 지 오래되지 않아 카페를 지나쳤다. 성당이 있는 구도심 지역의 중세 때 만들어진 것들은 아니나 길이며 건물들에서 역사성이 느껴졌다.
콤포스텔라성당으로 가는 도중에 셀카로 찍었다. 흰 수염과 흰 눈썹이 보인다.
길을 배경으로 셀카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셀카 사진을 보니 수염의 양이 많지는 않으나 며칠 동안 깎지 않아 좀 길어 보였다. 수염뿐 아니라 눈썹에도 흰 게 섞여 있다. 낮 12시 15분, 길바닥에 동으로 만든 산티아고 문양인 조개껍데기(가리비)가 박혀 있다. 그러면 왜 산티아고 순례길을 상징하는 문양이 조개껍데기일까? 아시는 분은 알겠으나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있어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길바닥에 동으로 만들어 박아놓은 산티아고 순례길의 상징인 조개껍데기. 사진= 조해훈
야고보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 세베대의 아들이다. 또한 사도 요한의 형이다. 야고보 또한 아버지 세베대를 따라 고기를 잡았다고 한다. 참고로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인 살로메는 친 자매지간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와는 사촌지간이다. 야고보는 예수의 3대 제자 중 한 명이자, 예수의 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했다. 이와 관련해 야고보의 아버지가 어부였고, 야고보도 어부 생활을 한 때문에 가리비 조개껍데기가 산티아고의 상징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도로 왼쪽으로 2, 3층짜리 주택들이 많다. 사진= 조해훈
하지만 한국해양환경공단(KOEM) 측은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이유라고 밝히고 있다. 첫째는 순교한 야고보의 시신을 배에 태워 바다로 보냈는데 흘러 흘러 스페인 이베리아 해안에 닿았고 조개껍데기들이 시신을 보호하고 있었다는 설이다. 두 번째는 말을 탄 기사가 바다에 빠졌다가 야고보의 도움으로 살 수 있었는데 물에서 떠오르는 기사를 보니 조개껍데기가 감싸고 있었다는 설이다. 이유야 어떻든 그러한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은 배낭이나 지팡이 등에 가리비껍데기를 달고 다닌다. 몇 개씩 달고 다니는 순례자도 있으나 필자는 프랑스 생장의 순례길 여권을 받는 사무실에서 기부금을 주고받은 조개껍데기 하나만 배낭 뒤에 달고 다닌다.
도로가에 주차돼 있는 클래식 자동차. 주민들도 신기한듯 구경하고 있다. 사진= 조해훈
여하튼 행방이 묘연하던 야고보의 시신이 어느 날 스페인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야고보의 시신이 발견된 이야기는 좀 있다가 콤포스텔라 성당에 가서 다시 언급하겠다. 어찌 됐든 그가 복음을 전하며 걸었던 길이자, 야고보를 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야고보의 시신이 안치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을 방문하기 위해 걸었던 길이 지금의 순례길이다. 그리하여 산티아고 순례길을 안내하는 표식이 가리비 조개껍데기가 된 것이다.
낮 12시 16분, ‘오른쪽으로 가라’는 표석이 있다. 종착지까지 1,930km 남았다고 적혀 있다. 길을 걸을수록 마음이 설렌다. 순례자라면 누구나 가릴 것 없이 오브라도이로 광장에 도착하면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그 먼 순례길을 고생스럽게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기쁨과 안도감 등이 뒤섞인 감정 때문이리라. 눈물이 많은 편인 필자도 ‘과연 눈물이 흐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콤포스텔라 성당으로 향하는 시가지 길은 계속 이어진다. 시가지 주변에 2, 3층 주택들이 많다. 왼쪽 야트막한 언덕에도 주택이 가득하다. 성당이 가까워질수록 순례자들이 눈에 많이 뜨인다. 낮 12시 30분, 길가에 아주 오래된 듯한 클래식 자동차가 다른 차들과 함께 주차돼 있다. 마치 세계 2차대전 당시 독일군 고위급 장교가 타던 자동차처럼 보인다. 주민들도 차를 구경하고 있다. 여기서 5분가량 더 걸어가니 과일을 파는 마트가 있다. 마트에 들어가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과일을 좀 샀다. 민망했지만 마트 앞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토마토 한 개와 작은 사과 한 개를 먹었다. 누가 보더라도 오랫동안 걸어온 순례자로 보이기 때문에 부끄러움이 덜했다.
길가에 보이는 1층 약국에서 두통약을 사 먹었다. 사진= 조해훈
그렇게 앉았다가 일어나 천천히 조금 더 걸어가니 오른편 상가에 약국이 있다. 들어가 설명을 한 후 두통약을 사 약국 안에서 한 알 삼켰다. 필자가 한국에서 상비약으로 두통약 두 통을 사 왔지만 다 떨어졌다. 두통이 계속됐는데 약을 구할 수 없어 먹지 못했다. 필자는 늘 그런 건 아니지만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가끔 편두통이 생긴다. 산티아고 길을 걷기 시작할 때부터 스트레스가 심해 계속 두통약을 먹었다. 약효가 강해서인지 약을 삼키고 조금 지나니 거짓말처럼 두통이 없어졌다.
어느 집 현관문에 금색의 산티아고 문양이 붙어있다. 사진= 조해훈
왼쪽 길에서 걸어오는 가족들에게 인사를 먼저 건네니 "부엔 카미노!"라고 모두 화답했다. 사진= 조해훈
시가지를 걷다 보니 가장 많은 가게가 카페인 것 같다. 오후 1시 6분, 시가지에서 주택가 사이로 들어섰다. 어느 집 현관문에 금빛의 조개껍데기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설마 금(Gold)일 리가 있을까마는. 3분가량 걸으니 자그마한 교회가 또 있다. 교회를 지나니 한 가족인 듯한 주민들이 앞에서 걸어오고 있다. 필자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니 가족 모두 “부엔 카미노!”라고 화답을 해준다. 길에 주민들이 제법 많다. 이제 구시가지로 들어선 것 같다. 중세 양식의 건물들이 눈에 자주 뜨인다. 오후 1시 29분, 여기에도 교회로 보이는 건물이 있다. 오후 1시 36분, 콤포스텔라 성당의 종탑이 건물 너머로 보인다. 구도심의 중심인 듯하다. 오후 1시 41분, 성당으로 연결된 듯한 회랑을 지난다. 그곳에 어떤 여성이 스코틀랜드 악기의 상징인 백파이프를 연주하고 있다. 관광객들이 많이 왕래하는 걸로 볼 때 아마 이곳을 지나면 콤포스텔라 성당이 나타날 것 같다. 가슴이 조금씩 두근거렸다.
구시가지에 있는 중세시대 건물들. 사진= 조해훈
오후 1시 44분, 마침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 앞 오브라도이로 광장에 도착했다. 눈물이 왈칵할 뻔했으나 흐르지는 않았다. 필자의 개인사에서 역사적인 순간이다. 30년가량 벼르고 벼르던 순례길, 마침내 산티아고에 왔으니 말이다. 이 성당은 야고보의 유해가 묻혀 있다고 알려진 곳으로 9세기 이래 가톨릭 신자들의 순례 목적지가 돼 왔다. 오브라도이로 광장 주변에 시 청사와 수도원, 대학교 등 중세 시대 건물이 많다.
건물 뒤쪽에 콤포스텔라성당 첨탑이 보인다. 사진= 조해훈
성당이 있는 오브라도이로 광장의 서쪽에는 18세기에 지은 파소 데 라호이 건물이 있으며 현재 시 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성당 전면 계단의 오른쪽에는 1492년 가톨릭 왕국이던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 지은 건물이 있다. 순례자들의 안식처였던 곳으로 지금은 국영병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콤포스텔라 성당 옆에는 16세기에 설립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학교가 있다. 도심지에는 좁고 꼬불꼬불한 거리가 길게 이어지며 역사적인 건물들로 가득하다.
콤포스텔라성당과 연결된 회랑에서 한 여성이 백파이프를 연주하고 있다. 사진= 조해훈
이 도시는 기원전 로마 제국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던 지역이었으며, 9세기 초반 무렵부터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818~842년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왕인 알폰소 2세(Alfonso II) 시절에 이리아의 테오데마르 주교가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됐다고 주장했다. 알폰소 2세는 이 무덤을 기리기 위해 성당을 건설했고, 이후 순례자들이 방문하는 성지가 되었다. 또한 도시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오후 1시 44분, 마침내 콤포스텔라성당 앞 오브라도이로 광장에 도착했다. 사진= 조해훈
전설에 따르면 우여곡절 끝에 사제들이 야고보의 시신을 현재 콤포스텔라 성당이 있는 곳으로 옮겨 묻었다고 한다. 콤포스텔라라는 이름은 10세기에 붙여졌다고 한다. 콤포스텔라는 갈수록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됐으며 12세기에는 갈리시아 왕국의 수도가 됐다. 또한 12세기에 페르난도 2세와 알폰소 4세 등 왕들이 성당에 안장됐다.
중세 유럽에서 성지 순례는 중요한 신앙적 행위였으며, 로마(바티칸), 예루살렘과 함께 산티아고 델 콤포스텔라는 기독교 3대 성지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성당 광장에 생각보단 순례자들이 적었다. 사진= 조해훈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초반, 이베리아반도 대부분이 이슬람 세력(무어인)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북부 기독교 왕국들은 성 야고보를 이슬람 세력에 맞서는 수호성인으로 여기고, 도시를 발전시키기 위해 힘썼다. 이후 11세기와 12세기 동안 산티아고 순례길이 정비되면서 프랑스와 유럽 각지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다 스페인의 종교 개혁과 나폴레옹 전쟁 등의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16세기 이후 산티아고 순례는 점차 쇠퇴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순례길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고, 특히 1980년대 이후 유럽연합(EU)과 스페인 정부가 문화유산 보호 및 관광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순례길이 복원되었다. 현재는 전 세계에서 연간 수십만 명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다.
필자는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런데 날씨가 추워서인지 광장에는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들이 많이 없다. 관광객과 순례자들이 광장 여기저기를 왔다 갔다 한다. 광장을 가운데 끼고 성당 맞은편 건물 앞에 순례자들이 몇 명 앉아 있다. 아는 사람이 없다. 성당 오른편 호텔 쪽에 있는 난간 위에 걸터앉았다.
필자가 힘들게 구한 사설 알베르게 2층 건물 전경. 사진= 조해훈
걸터앉은 지 1, 2분 되었을까? 오후 1시 50분, 앞에서 엄마와 아들이 다가와 인사를 한다. 아, 그라뇽의 성 세례자요한 성당에서 함께 자고, 아타푸에르카에서는 저녁을 함께 먹었던 어머니와 그녀의 똑똑한 아들 마선이었다. 이들 모자와 필자는 그 후에도 순례길과 식당에서 몇 번 더 마주쳤다. 어머니가 필자를 보자 반가워하며 포옹을 해주었다. 마선 역시 필자와 포옹했다. 마선은 더 대견스러워진 모습이었다. 열세 살 아이가 산티아고 순례를 완주했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성당 광장에서 같은 숙소에서 자고 식사도 함께 했던 호주에서 온 열세 살 마선과 그의 어머니를 만나 사진을 찍었다. 사진= 조해훈
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는 “난간 뒤에 있는 호텔을 숙소로 잡았다.”고 말했다. 필자는 “저는 아직 숙소를 예약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함께 콤포스텔라 성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마선의 어머니는 “호주에 오실 일 있으면 연락주세요.”라고 말했다. 마선도 같은 말을 했다. 필자는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그런 후 다시 포옹한 후 헤어졌다. 이 광장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필자는 주로 혼자 걸었고, 다른 순례자들과 그다지 많이 섞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안면이 있는 순례자가 별로 없었다.
숙소에서 한국 음식을 파는 식당으로 가는 도중의 신시가지 모습. 구시가지의 중세시대 건물과는 달리 빌딩이 즐비하다. 사진= 조해훈
1시간가량 광장과 성당을 천천히 둘러본 후 오후 3시께 ‘숙소를 정해야겠다’ 생각하고 광장을 벗어났다. 성당으로 들어서기 전의 구도심 지역으로 내려갔다. 작은 규모의 호텔 몇 군데를 둘러보았으나 모두 빈방이 없었다. 그 인근에서 왔던 길이 아닌 왼쪽 길로 내려갔다. 사설 알베르게 몇 군데가 있었으나 역시 빈방이 없었다. 낭패였다. 그 아래 도로를 건넜다. 구글 앱으로 확인해 보니 주택가 쪽으로 올라가면 한 사설 알베르게에 방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앱 지도가 정확하지 않아 20분가량 인근을 왔다 갔다 했다. 알베르게는 길가에 있었다. 간판이 잘 보이지 않아 겨우 찾았다. 오후 3시 55분, ‘BOSSH!’라는 이름의 작은 2층 건물의 사설 알베르게였다. 들어가 접수했는데 12유로였다.
좁은 방에 2층짜리 침대가 두 개 있었다. 한 침대 2층에 자리가 하나 있어 배정받았다. 다른 순례자들의 배낭이 바닥 구석에 놓여 있어 필자도 그 옆에 배낭을 놓고 노트북만 꺼내 들고 밖으로 나왔다. 오후 4시 5분쯤이었다. 김치찌개 등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인 ‘누마루’를 검색했다. 레온의 한식당 ‘소풍’에서도 이미 들었던 누마루였다. 대략 30분쯤 걸리는 거리다.
콤포스텔라 성당과 그 주변이 구시가지라면 누마루 식당으로 가는 구간과 그 인근이 신시가지에 속한다. 앱을 보며 누마루로 가는 중에 산꼭대기인 ‘라 라구나(La laguna)’ 마을에서 하루 함께 잔 네덜란드인 에르윈(Erwin)을 거의 열흘 만에 우연히 만났다. 그는 신시가지 쪽에서 걸어오는 중이었다. 힘든 지 살이 빠지고 입술이 부르터져 있었다. 반가움에 포옹하고 잠시 인사를 나눈 후 필자는 신시가지로, 그는 콤포스텔라 성당 쪽으로 갔다.
한국 음식을 파는 식당인 '누마루'. 필자가 간 시간은 '브레이크 타임'이어서 되돌아왔다. 사진= 조해훈
오후 4시 28분, 신시가지로 접어든 사거리에서 좌회전했다. 빌딩들이 즐비했다. 은행과 바, 핸드폰 가게 등 온갖 상점들이 다 있었다. 콤포스텔라의 중심지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길을 따라 10여 분 걸어가니 식당 앞에 쳐진 햇빛 가리개 천막에 한글로 ‘누마루’라고 적혀 있다.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한국 사람이 아니고 아시아계였다. 아주머니가 “지금 영업시간 아닙니다.”라고 했다. 소위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필자가 “그러면 앉아서 좀 기다리면 안 될까요?”라고 물었다. 아저씨가 “들어오세요.”라고 해 테이블에 앉아 들고 간 노트북을 켜 글을 쓰는 데 아주머니가 “지금 문을 닫아야 하니 나가주세요.”라고 했다. 할 수 없이 나와 발길을 돌렸다. 오다가 한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숙소 쪽으로 되돌아 오면서 본 신시가지 모습. 사진= 조해훈
그런 후 잡아놓은 숙소 쪽으로 걸었다. 숙소 올라가기 전에 바가 있는데 문을 열었다. 아까 숙소를 잡으러 가면서 보니 문이 닫혀 있었는데 저녁 무렵이 되니 오픈한 모양이다. 오후 5시 50분에 바 안으로 들어갔다. 문어 요리가 있었다. 문어 요리와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주인아저씨에게 “노트북 작업을 좀 해도 됩니까?”라고 물으니 “가능합니다.”라고 답했다. 음식을 먹고 있으니 다른 손님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숙소 인근인 데다 주인이 편하게 해줘 저녁 8시 40분이 다 되어 바에서 나왔다.
숙소 아래 바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촬영한 내부 모습. 사진= 조해훈
숙소 맞은편 쪽에 아주 작은 카페가 있다. 오늘 밤이 산티아고의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더 마셔야겠다.’라고 생각했다. 주인아저씨가 필자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커피를 한 잔 주문하니 아주머니가 뭘 들고 들어왔다. 아저씨에게 물건을 건네고 아주머니는 입구 쪽을 치우고 정리하였다. 아저씨와 몇 마디 나누다 밤 9시 20분쯤 숙소로 들어왔다. 모두 자고 있어 조용히 2층 침대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이렇게 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하루를 마감했다.
누워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 간단하게 정리를 해보았다. 프랑스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출발하여 약 800km에 달하며 순례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프랑스 길(Camino Francés)’을 필자는 걸었다. 그리고 ‘포르투갈 길(Camino Portugués)’도 있다. 포르투갈 리스본 또는 포르투에서 출발하는 길로, 스페인 북부 대서양 해안을 따라 걷는 코스이다.(위의 자료성 글들은 몇 가지 자료를 참고하여 정리하고 인용했음)
산티아고 순례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다.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걸었던 역사적이고 종교적, 그리고 문화적 의미가 깊은 길이 아닌가! 쉽사리 잠이 들지 않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필자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감격의 눈물인지, 아니면 회한의 눈물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필자는 모든 게 느린 사람이다.
오늘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공립 알베르게에서 콤포스텔라 성당까지 약 3km가량을 걸었다.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스 길’ 전체를 걸은 것이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