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장편소설】 저곳 - 7. 경수와 오미③

박기철 승인 2024.02.16 11:41 | 최종 수정 2024.02.17 16:29 의견 0

저곳에서
남녀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되는
물권색
物權色

7-3. 망해갈 때 왕이 된 여왕

나는 너 같은 국민의 배신자는 아니야. 그런데 너 이후에 나라가 망했다고 했는데 나도 나 이후에 나라가 망했으니 비슷한 처지이긴 해. 그런데 너는 네가 죽고 10여년 지나서 나라가 망했고 나는 내가 죽고 60여년 지나 나라가 망했으니 너와 내가 끼친 망국의 수준이 다르긴 해. 10년은 금방이지만 60년은 오랜 기간이잖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한 세대라고 하면 적어도 30년은 되어야지. 시간이 흐르는 세월(歲月)을 따질 때 쓰이는 세대(世代)에서 세(世)는 30년이야. 世 글자를 뜯어서 자세히 봐봐. 열 십(十)이 세 개 있는 거 확실히 보이지. 그러니까 내가 죽고 60여년, 즉 두 세대가 훨씬 지나서 나라가 망했으니 내가 직접적으로 나라를 망쳤다고 하면 난 억울한 거지.

뭐 처음부터 복잡한 얘길하고 그래. 꼭 그런 거 복잡하게 따지는 사람들이 알고보면 자기 변명을 하는 거더라. 그런 얄궂은 셈법으로 변명이 되는지 안 되는지 내가 잘 들어서 판단해 볼게. 허심탄회(虛心坦懷)라는 게 마음(心)을 비우고(墟) 가슴(懷)을 편다는(坦) 뜻이잖아. 오미! 넌 누구였어? 허심탄회하게 말해봐.

나도 너처럼 한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였어. 너는 국민투표로 선출된 지도자였지만 나는 왕이었던 오빠가 임명한 지도자였어. 이 오빠 이전에 큰 오빠도 왕이었어. 두 오빠들이 왕이었고 나중에 왕이 된 작은 오빠가 나한테 왕 자리를 물려주었으니 세계역사상 사례가 드문 남매 계승이 이루어졌던 거지. 그런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 오빠가 왕이 된 후 2년 만에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아들이고 딸이고 후사가 없어 나한테 물려주게 된 거지. 이 때 오빠가 한 말이 우리나라 역사에 기록되어 있어. “내 누이동생의 성품이 총명하며 골격이 장부와 같기에 왕에 걸맞다.” 그렇게 나는 여왕이 되었어. 내 나이 대략 스무살 때야.

어쩐지 네 골격이 늠름하니 든든해 보여. 오빠도 네가 든든해 보였나 보다.

그랬겠지. 나 이전 200여년 전에 우리나라에 여왕이 둘이나 있었는데 그녀들도 체격이 크며 덩치가 좋았대. 그런데 그 두 여왕이 나름 통치를 잘 했다고 평가받지. 실제로 잘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두 여왕 이후에 나라가 안정되고 우리나라가 중심이 되어 세 나라를 하나로 통일할 수 있었거든. 경수 너네 나라는 북쪽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통일했지만 우린 남쪽이 중심이 되어 북쪽을 통일했어. 너네 나라랑 우리 나라랑 여러 모로 비슷한 점이 많아서 평행선 이론을 들이대기도 하지만 다른 점이 많아. 아무튼 통일의 기틀을 다진 선대의 두 여왕들처럼 나도 그런 훌륭한 여왕이 되길 오빠는 바라셨던 거겠지. 당시 나라가 분열되려고 혼란했거든. 그럼 나도 훌륭한 왕이 되었어야 했는데 그게 그리되지 못했어. 나는 잘 하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어. 아주 어려웠어. 나라가 어지러웠어. 도처에서 농민들 난이 일어났지. 그래서 망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 여기와서 보니 그게 아니야. 망할 때가 돼서 망한 거 같아. 자연스럽게… 그러니 내가 아무리 인위적 노력을 해도 자연적 흐름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거였지.

망할 때가 되서 망하다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뭔 개풀 뜯어 먹는 소리냐고? 개떡같은 소리네. 개콧구녕 같은 말하지마. 반성은커녕 변명을 하려고 하네. 도대체 망할 때가 돼서 망하다니 뭔 뜻이야? 일단 그 알량한 변명이라도 들어라도 보자.

흥분하지 말고 침착해. 내가 즉위할 때 우리나라는 개국한 지 900년이 훨씬 지날 때였어. 한 국가가 900년 넘게 유지되는 게 쉬울 거 같아. 476년에 망한 서로마제국이 1000년 넘게 유지되고 1453년에 망한 동로마제국도 1000년간 유지되었지만 그건 아주아주 특이한 사례야. 동서 로마를 합치면 2000년 넘게 유지되었지. 그런데 로마는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광활한 대제국이었어. 그런데 어느 반도의 한 귀퉁이에 있는 작은 국가가 900년 넘게 유지하고 있다는 건 망할 때가 된 거라는 거지. 실제로 로마같은 대제국을 제외하고 한 국가가 1000년 가까이 유지된 건 우리나라가 거의 1등이야. 진시황의 진나라는 겨우 15년 밖에 못갔어. 아직도 왕국인 영국이란 나라가 왕가는 바뀌어도 1000년 넘게 지금도 하나의 왕국 명맥을 유지되고 있지만 표면적인 왕국일 뿐이야. 나 때에 1000년 왕국은 우리나라가 유일했지. 그러니 망할 때가 돼서 망했다고 하는 거야. 뭐 틀린 말 했어? 뭘 아신다구! 거 참 어이가 없네. 말하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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