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화개골은 온 천지에 매화가 피어 아름답기 그지없다. 벚꽃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은은한 그 모습이 매력적이다. 필자는 짬만 나면 낫 한 자루 들고 집 뒤 차산(茶山)으로 올라가 일을 한다.
차산에 있는 20여 그루의 매화나무가 꽃을 한껏 피우고 있다. 평지인 섬진강변보다 지대가 높아 매화가 늦게 핀다. 녹차 잎 역시 늦게 올라온다.
올봄에는 차산에서 지내는 시간이 좀 적다. 남동생이 화개터미널 인근서 운영하는 쉼표하나 카페의 일을 돕기도 하지만 다른 여러 일이 자꾸 생겨 시간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3월 9일 오후에 산에 올라 일을 하였다. 미처 베어내지 못한 억새가 허옇게 바람에 나부끼고 있고, 지난해 올라온 고사리가 위쪽 차밭을 상당부분 덮고 있었다. 산에 올라갈 때마다 이것들을 베어내지만 아직 마무리를 못하였다. 4월 중·하순 첫 찻잎을 채취할 때까지 계속 작업을 해야 한다.
차산 입구에 다다르자 순간 마음이 행복해짐을 느꼈다. 수령이 오래 돼 키 큰 매화나무들이 비탈에 서서 바람에 꽃을 일렁이고 있었던 것이다. 매실을 얻기 위하여 매화나무에 전지를 하지 않는다. 할아버지와 선친의 영향인지 어릴 적부터 매화를 좋아한다. 그리하여 꽃을 보기 위하여 마음껏 자라도록 놔둔다. 마을 주민들은 필자의 그런 내면을 이해하지 못하신다.
여하튼 그렇게 위쪽 차밭에 있는 원두막으로 올라갔다. 위쪽 차밭에도 매화나무가 몇 그루 있어 꽃을 피워 보란 듯이 몸을 흔들고 있었다. 원두막에 올라 걸상에 앉아 계곡인 화개동천(花開洞川)쪽을 바라보았다. 계곡 너머 가끔 차량이 한 대씩 지나가고 있었다. 차산에 올라오면서 보는 매화도 황홀하지만 위쪽인 원두막에 앉아서 아래쪽 차밭의 매화를 감상하는 것 역시 아름답다. 어쩌면 이 풍경이 더 매력적이다. 계곡 건너편 산자락에 흩어져 있는 용강마을의 집들 또한 풍경에 한 몫 보태기 때문이다.
한참동안 매화를 바라보며 앉아있으니 19세기에 활동한 중인신분의 문인이자 화가였던 우봉(又峯) 조희룡(趙熙龍·1789~1866)의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가 생각났다. 차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원두막은 있지만, 혼자 들어가 앉아 차를 마시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움막은 없다. 아래쪽 차밭의 매화나무 아래에 손수 조만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두막에서 차산의 매화를 보며 즐기다가 낫을 들고 차산을 한 바퀴 돌기로 하였다. 그러면서 산딸기 가시와 허연 억새풀, 새로 올라오는 잡목 등을 낫으로 베어냈다. 찻잎 올라올 무렵 바쁘거나 다른 급한 일들이 생겨 찻잎을 따지 못하더라도 차산 관리는 꼭 해줘야 한다. 한해라도 묵히면 차산이 엉망이 되어 버린다.
지난해 제대로 따주지 못한 묵은 고사리들이 차나무를 덮고 있다. 갈수록 고사리가 차밭을 더 많이 점령(?)하는 것 같다. 키 큰 차나무들이 있는 쪽에는 고사리들이 차나무를 덮기 위해 키를 더 키웠다. 180cm인 필자의 키를 고려할 때 이런 고사리들은 2m를 훨씬 넘을 것 같다. 이달 하순이면 햇고사리가 올라온다. 올해는 가능하면 고사리를 많이 꺾을 생각이다. 쉼표하나 카페에 가끔 들리는 화개골의 모 모텔 사모님이 “내 친구가 고사리를 꺾고 싶다는데, 그렇게 좀 해주면 안 될까요?”라고 부탁하시어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시죠.”라고 답을 해놓은 상태이다. 그 친구 분이 고사리를 꺾으신다고 해도 필자가 먹을 고사리는 딸 수 있을 것이다.
위쪽 차산 오른편 위로 보면 예전에 화전민으로 밭농사를 지으며 산 사람들이 있었는지 돌로 축대를 쌓아 평지를 만들어놓은 곳이 있다. 이 인근, 즉 고사리 밭이 있는 아래쪽에는 산딸기 줄기가 해마다 많이 올라와 일일이 잘라내고 캐낸다. 화개골에 들어온 첫해인 2017년 봄에 보니 산딸기 밭이었다. 누가 심었는지, 아니면 자연스레 번져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녹차와 고사리를 채취하고 그들의 생장을 위해서 해마다 베어내고 뿌리를 캐내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 많이 올라온다.
또한 옻나무가 해마다 차산 전체에 많이 올라와 이것들 베어내는 게 일이다. 옻나무의 종류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전에 필자의 차산에서 찻잎을 채취하고 고사리도 꺾으시던 마을 할머니는 “그 집 차산에 있는 옻나무 순 올라올 때 뜯어 나물 해먹으면 맛있어. 그 옻나무 좋은 거라.”는 말씀을 하신 적은 있다. 해마다 봄에 옻나무 순을 조금 뜯어 나물을 해 먹고는 있다. 3년 동안은 차산에 퍼져 있는 이 옻나무들을 톱으로 잘라내느라 애를 먹었다. 아직도 새 옻나무들이 올라온다. 차산을 다니며 이것들 역시 다 낫으로 잘라낸다.
바람이 많이 불어 춥기는 하여도 비탈진 차산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일을 하다 보니 옷에서는 땀 냄새가 푹푹 풍긴다. 그래도 피곤한 줄 모르고 기분이 좋다. 사방에 매화가 피어있는 까닭이다.
해거름이 되어서야 내려오면서 아래 움막에 들렀다. 대나무를 몇 개 잘라 울타리(?)를 좀 메우면서 ‘닭을 몇 마리 키워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 여기서 염소 두 마리를 잠시 키운 적이 있었다. 집으로 내려오니 어느새 사방이 껌껌해졌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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