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67)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8장 만두가게 개업(7)

이득수 승인 2024.06.23 18:03 의견 0

“예. 맞습니다. 아주 드문 경우로 말을 잘 안하는 치매가 왔답니더.”

“그래. 불행 중 다행이다. 그런데 사람은 알아보나?”

“예. 처음 만나면 한참 들여다보다가 간혹 니가 상철이제, 또 용철이제, 미숙이제? 하면서 간혹 알아보기도 하지만 눈이 잘 안 보이는지 그냥 멀뚱히 쳐다만 보다가 엄마 내가 누고? 하고 물으면 그 제서야 니 상철이제? 내 아들 상철이 하고 알아 볼 때도 있고 보통은 니 열찬이제 부산 사는 내 동생 열찬이! 하고 저냐 형님이나 사위들이나 어떤 때는 며느리나 딸들까지 그냥 부산 사는 내 동생 열찬이제, 를 반복한답니다.”

“그래? 누님이 평소에 내를 많이 챙겼지.”

하는 순간 그만 눈앞이 흐려지며 울컥 가슴에 싸한 강물이 흘러갔다.

18. 만두가게 개업(7)

“여보세요?”

통화를 이어나가다 화장실에 가는 척 일어난 열찬씨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눈가의 눈물을 닦다 아예 얼굴을 씻었다.

(나는 누님이 나를 업어 키워서 나를 그렇게 좋아하고 걱정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먹고살기 힘들어 이사를 가고 아이들이 자꾸 태어나는데 시동생에게 논밭을 팔아주고 그냥 떼이고 우울증으로 병이 오고하는 그 긴 세월동안 그래도 주여, 주여, 를 입에 달고 살며 잘도 견딘다 싶고 끔찍이도 날 챙긴다고 생각한 것이 그게 아니었구나, 아니었구나?)

평생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생각, 만사에 자신만만하고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이 적극적이던 누님이 매사 열찬이, 열찬이 자신을 챙긴 것이 단순한 동생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큰 소리 탕탕 치고 사는 자신의 마음이 흔들릴 때, 아무리 기도를 하고 할렐루야를 외쳐도 끝없이 불안하고 자신이 없을 때 세상에 단 하나의 의지 처인 동생 열찬이, 친정의 7남매, 시가의 9남매 중에서 우일하게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어디에서 공무원을 한다고 남에게 말 할 수 있는 동생, 나중에 사무관이 되어 동장을 하고 시집을 낸 시인이 되었을 때 세상에 제일 잘난 남자가 바로 자신이 업어 키운 동생 열찬이라고 보는 사람마다 말한 자신이 사실은 누님의 자랑거리이기 이전에 남들은 하도 당당해서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누님자신의 불안한 마음, 기도와 찬송만으로 채워지지 않은 어떤 허전함과 불안을 채워줄 유일한 의지 처로 바로 이 눈치 없는 동생을 생각했구나.)

하며 누님의 일생을 더듬어 보았다. 아무 달기도 없이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언니 갑찬씨 대신 동생들을 챙기고 아버지 수발을 들며 가난한 농가의 맏딸 노릇을 하다 단지 골짝 논 서마지기가 있어 배는 안 곯겠다고 아버지가 떠밀어 보낸 남편 김재근씨랑 석 달을 살아본 뒤였다.

암만 좋게 보려고 해도 생각하는 거나 말 하는 거나 아무 용맹도 없고 거기다 술이나 좋아하고 만사에 게을러 일하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해 살아봤자 아무 전망이 없을 것 같은 남편에게 너무나 실망이 커서 아직 아이도 없을 때 헤어지지고 말했을 때였다.

자신은 누님이 하나 있는 무려 9남매, 8형제 중 네 째로 위의 두 형과 아래의 네 동생들이 저마다 살길을 찾아 집을 나가 둘째는 김해처녀를 만나 부산에서 식당을 하고 세 째는 어찌어찌 글을 좀 배워 여기저기 남의 일을 봐주며 입치레를 하고 동생들도 라이터장사를 하는 경우, 되지도 않는 고등고시를 친다고 절에 들어간 사람을 비롯해 나름대로 살길을 찾아 나섰는데 물론 장남이기도 하지만 체격이 난장이나 겨우 면했을 정도로 작은데다 오모짱이라고 자신보다도 훨씬 더 작은 아내, 그래도 이목구비는 또렷하고 줏대는 있어 제 할 말은 꼬박꼬박 다 하는 형수와 큰형님이 혼자된 어머니와 늘 티격태격하자 보기가 딱해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따로 방을 얻어 어미니가 따로 밥을 끓여먹게 하고 군에 가기 직전 속병(위암으로 추정됨)으로 밥을 제대로 못 먹을 때 머슴살이를 그만 두고 일부러 밥을 눌게 해서 눌은밥을 주걱으로 문질러 암죽처럼 먹이다 숨을 거두자 초상을 치르고 군대에 갔다는 예기, 비록 휴전이 되었지만 아직 전방에는 가끔 총성이 터지고 논산훈련소가 <돈산훈련소>로 불리던 시절 국민학교도 나오지 못해 총검술과 제식훈련조차 힘이 든 데다 머슴살이를 하며 늘 고봉밥을 먹던 사람이 군대짬빵이 턱 없이 부족해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저녁 한 끼만 실컷 배불리 먹으면 자다 죽어도 좋을 것만 같았는데 명색 9남매가 넘어도 면회 오는 사람 하나가 없어 일요일이 더 비참하고 슬펐다.

또 전방의 자대배치를 받아서는 돈 한 푼 없이 PX에서 빵 한 조각 사다 나눠먹을 수도 없어 고참들에게 늘 얻어맞기만 하는 자신이 이러다가 제대도 못 하고 굶어죽을 지도 몰라 언양의 큰 형님에게 자신의 서마지기 논을 팔아서라도 돈을 좀 가지고 제발 면회를 좀 오라고 해도 결코 면회 한 번을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할 때 그만 사정없이 눈물이 흘러

“알고 보니 당신이 나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구나? 그래도 열심히 살기는 살았구나!”

하면서 이혼하자는 생각을 접고 남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고 했다. 그 제서야 아버지 명촌가손이 남편의 먼 친척인 하잠댁이를 통해 중매가 들어왔을 때 자신을 굳이 그 용맹도 없는 사내에게 보낸 것이 단순히 골짝 논 서 마지기외에 제 어미에게 효도를 다 하는 모습을 좋게 본 때문이란 걸 깨닫고 일하는 데 몸을 아껴 게으른 것은 십년가까이 머슴을 살다 생긴 습관이니 자신이 몸을 더 움직여 살면 될 것으로 보고 아무리 바쁜 농사철이라도 핑계만 있으면 천장을 쳐다보고 드러눕는 남편을 대신해 언양방송국소리를 들으면서도 극성스럽게 몸을 움직여 나름대로 다섯 자식을 다 고등학교를 마치게 하고 미경이, 미옥이 밑에 두 딸들은 대학까지 공부를 시킨 것이었다.

한참 만에 마음을 진정시킨 열찬씨가 전화기를 받아 누님을 비치게 하고

“누님, 내가 눈고 알겠능교?”

하고 한참이나 기다리니

“엄마, 엄마가 이적지 기다리던 열찬이 삼촌 아이가? 뭐라 말 좀 해 봐라.”

옆에서 세 딸이 이야기하며 구슬리자

“아저씨는 눙교? 내 동생 열찬이라꼬? 나는 인자 늙어서 잘 모리겠네.”

하고 눈만 끔벅거렸다.

“보자! 미숙아, 우리는 암만 서둘러도 내일 오후는 되야 김해 너거 집에 갈수 있을 텐데 우짜고 내일 어머니 모시고 집에 있을래?”

“아임더. 우리 딸들은 인지 점심 묵고 각자 제 시집으로 가고 엄마는 내일 오후에 오빠들이 요양병원에 모셔다 줄 김니더. 추석 쉬고 장촌, 명촌 이모들 하고 같이 병원으로 오시는 기 좋을 김더.”

“그래. 병원주소하고 전화번호 불러봐라.”

아고 전화를 끊자

“아이구, 매운탕이 다 식어 우짜노? 아버님 식사하이소.”

그 때까지 숟갈을 놓고 기다리던 김서방이 말했다.

오후에 슬비네가 시집으로 떠나자

“인자 우리 본가 식구 다섯만 남았네.”

제사는 없더라도 생선이나 나무새 등 기본음식은 갖추는 영순씨가 소고기를 넣은 미역국밥에 오색나물로 상을 차리자 열찬씨가 하는 것을 보고 아들과 며느리까지 양재기 하나씩을 들고 나물과 밥을 비벼 저녁을 먹고 이제 혼자 한참이나 앉았다 문갑을 잡고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쓰는 아이를 번갈아 보면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튿날 날씨가 추워 아이가 딸린 며느리와 영순씨는 집에 있게 하고 열찬씨부자만 진장산소에 가서 한 바퀴를 비잉 돌고 종찬씨 집에 올라가

“형님, 제가 왔는데 어서 내려 오이소. 설술 한 잔 하십시다.”

벽에 걸린 사진을 한참이나 바라보는 사이에 새로 본 둘째 며느리가 야무지게 술상을 봐왔다. 사람하나 들고남에 그렇게 차이가 많은 건지 형님이 돌아가시고 텅 빈 것 같던 집이 깨끗이 청소가 되고 노란 아침볕이 들자 집안전체가 반질반질 윤이 나는 것 같았다. 조카들은 커피를 마시고 열찬씨 혼자 소주 반병을 마신 뒤 언양의 상찬씨 집에 들러

“형님, 저 왔습니더. 형수님은 잘 계시지요?”

하는 순간 눈이 마주친 조카며느리 정신씨가 흠칫 놀라며 입을 딱 벌렸다. 사촌처형 남숙씨의 딸을 영순씨가 중매해 질부가 되고나니 이모부라 부르던 열찬씨가 졸지에 당숙어른이 되고 만 것이었다.

“너거 형수 며칠 전에 양산의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상찬씨의 말에

“예에? 와요?”

“혈압으로 엎어졌다 아이가? 근근이 사람은 알아보고 걸음도 좀 걷는데 아직 정신이 없단다. 자식들, 손자들 이름도 가물가물 하고 어떤 때는 사람도 잘 못 알아보고.”

“저런? 식구들이 고생이 많겠네. 형님도 많이 섭섭하고.”

하는데 질부 정선이가 상을 봐왔는데 어쩐지 형수가 있을 때보다 많이 허전한 것 같았다. 옆에 붙어 앉아 소주를 부어주며

“너거 작은아부지 식사하게 떡국이라도 어셔 가주 오너라.”

상찬씨가 챙겼지만 덩치도 크고 손도 큰 형수, 시동생인 자신은 물론 공부 잘 하는 조카라고 온 동네에 자랑하고 다니는 정석이에게 끔찍이 뭔가 챙겨 먹이려던 형수가 없으니 영 분위기가 살지 않았다. 홍근이에게 병원호수를 물어 휴대폰에 입력하고 일찍 일어나서

“아버지, 명촌으로 갈까요?”

“아이다. 바로 부산으로 가자. 요번 추석은 영 기분이 안 난다. 집집이 사람들만 쓰러지고.”

곧바로 부산으로 차를 몰게 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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