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기백과 묘심
나 기백이는 이래뵈도 국왕이었어. 황제는 아니더라도 힘세고 돈많은 권력자였어. 난 백인인데 넌 황인이네.
같은 사람끼리 백인이고 황인이고 흑인이고 뭐가 중요해. 백인은 코카소이드, 황인은 몽골로이드, 흑인은 니그로이드라고 하던데 여기서까지 인종을 구분하는 네가 좀 싫다. 처음 만났는데 그 정도밖에 말을 못해. 네가 국왕이었으면 뭐하냐? 좀 덜 떨어진 인간일세. 나 묘심이는 너보다는 똑똑할 거다.
아! 미안. 네가 좀 경우가 없었네. 내가 하도 답답해서 그래. 사람들은 나한테 600만 명을 죽였느니 최대 1000만 명을 죽였니 하는데 나는 한 명도 죽인 적이 없어. 난 억울해.
너 말 잘했다. 아주 가증스러운 말! 히틀러가 유대인을 600만 명을 죽이고, 스탈린도 자신의 권력을 위해 러시아 자국민을 수천만 명이나 죽이고, 마오쩌둥도 바보같은 정책으로 중국 자국민을 수천만명이나 굶어죽게 했는데… 그럼 그게 다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이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인 거냐? 걔들도 자신의 손으로는 한 사람도 안죽였어. 다만 자신의 권력으로 죽인 거지. 윗 놈이 시켜서 죽이든 아랫 놈들이 알아서 죽이든 죽이는 건지도 모르게 죽음으로 몰아가든… 그렇게 권력자의 권력으로 죽어 간 사람들 숫자로 카운팅 되는 게 죽인 사람들 숫자야. 바보야! 네가 네 손으로 죽이지 않았다지만 역사는 다 네가 죽인 걸로 기록되는 거야.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뭘 몰라도 한참 모르네. 바보!
아! 그렇네. 이치가 그렇네. 그렇다고 바보가 뭐야. 무엄하도다! 버릇없게… 내가 그래도 왕이었다고. 왕한테 바보라니!
넌 그런 말 들어도 싸. 가장 약한 욕이었어. 바보라는 말은… 더 센 욕을 하고 싶어도 내가 참는다. 여기서 뭔 왕년에 왕이 어떻게 저쩌구 그래. 쓰쟐떼기 없이. 진짜 바보네. 기백이 너!
아! 그렇구나. 여기선 그런 게 안통하지. 살아생전에 내가 아무리 떵떵거렸어도 여기선 그런 게 필요없지. 맞아! 여기 와서 생각하니 내가 바보 맞나? 아무튼 내가 직접 죽인 건 아니더라도 다 내가 내 물욕 욕심을 위해 아랫 사람들을 시켜 죽인 거니까 내가 죽인 게 맞네. 그런데도 아직 억울한 게 나는 아랫 사람들에게 사람들 죽이라고 지시하거나 명령한 게 아니거든. 그냥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돈이 되는 카카오나 천연고무 수확량을 어떻게 해서든지 채우라는 말 만 했을 뿐인데. 그래도 다 내가 저지른 건가?
얘가 배울 만큼 배우신 사람같은데 말을 도무지 못알아듣네. 앞으로 네 이름 안부르고싶네. 그냥 바보라 부를게. 다 아실만큼 공부하신 분이 왜 그러셔. 바보야! 너는 네가 이루려는 목적만 말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려는 수단과 방법은 얘기한했다고 네가 너의 죄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야. 힘센 사람들 밑에 있는 사람들의 속성은 알아서 기는 거야. 네가 너의 목적을 좀 하향 조정해서 말했다면 너의 죄가 그나마 조금 면해지겠지만 너의 목적은 그대로 두고 수단방법은 다들 알아서 하라고 말했어도 너는 죄인이야. 그런데 도대체 너는 뭔 죄를 지었길래 그렇게 바보처럼 말하니?
난 내가 그렇게 큰 죄를 저지르는 줄도 몰랐어. 그냥 나는 천연고무나 카카오의 생산량에만 관심이 있었어. 생산 목표치를 지시하고 그 할당량을 어떻게 해서든 달성하라고만 했어. 내가 가보지도 않은 나라에서 생산되는 작물이 중요하고 그 것을 어떻게 생산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엄청난 악행이 벌어지고 있었더군. 여기서 내가 뉘우칠 게 있지. 그 악행을 말리지 않았다는 점이야. 그냥 무심코 내버려 두었다는 거지. 나는 내가 내 손으로 저지른 악행이 아니기에 그냥 그러려니 했어. 그냥 나는 거기서 벌어지는 악행은 관심없고 거기서 나오는 돈되는 작물에만 관심있었어.
바로 그 점에 네가 악하다는 거야. 사람이라면 악행을 막았어야지. 어찌 그냥 팔짱이나 끼고 옆에서 바라보듯 수수방관(袖手傍觀)할 수 있냐는 말이지. 도저히 너는 용납이 안되고 용서가 안되. 넌 아주아주 나쁜 놈이야.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나를 보고 하얀 악마라고 부르더군. 내가 백인이니까 하얗다고 하는 거겠지만 날 보고 악마라고? 난 그걸 용납하기 싫어. 나는 주로 천연고무를 팔아 번 돈으로 우리나라에서 좋은 일도 많이 했어. 순전히 내 돈으로 근사한 건축물들을 많이 지었지. 그래서 사람들은 날 보고 건축왕이라고 불렀어. 나에 대한 그런 우리나라 사람들 평가에 나는 자부심을 가졌었지. 또 우리나라가 초콜렛의 나라라고 하던데 다 내가 걷어 들인 코코아 덕분이야. 맛있는 초콜렛을 나 덕분에 먹는 거야. 나도 잘 한 게 많다고. 사람이 공(功)이 있으면 과(過)가 있는 게 아니겠어.
너 아직도 정신 못차렸구나. 진짜 바보 맞네. 네가 아무리 너네 나라에서 건축물과 초콜렛으로 공이 있다손 치더라도 듣자하니 네가 저지른 악랄한 짓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어. 너는 너의 공이 어쨌느니 너의 과가 저쨌느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어. 넌 그냥 나쁜 놈이야. 아주아주 극악무도한 놈이야. 그냥 그렇게만 알아.
알겠어. 나 그냥 나쁜 놈 할게. 그 것도 아주아주 나쁜 놈, 악랄한 놈… 악마같은 놈이 나지. 나도 내가 나쁜 놈이라는 건 어느 정도 알아. 사실 나 살아생전에 외국 언론에서 나에 대한 적극적인 탐사보도를 하여 나를 까발기는 폭로 기사가 많았지. 나의 식민지에 파견된 선교사들도 그 일에 가담했지. 당시에 사진이라는 게 언론에 이용되기 시작했든데 내가 보기에도 끔찍하더군. 그 기사 내용에 대해서는 나도 내가 악랄한 착취를 하는 그 곳에 가본 적이 없었기에 나조차 모르는 것이 많았어. 하지만 대충 맞는 거였어. 물소가죽으로 만든 채찍으로 원주민 때리기, 가혹한 고문, 잔인무도한 강제노동, 노동자들의 볼모를 잡기, 강간하기, 쇠사슬로 감금하기, 팔과 다리 자르기, 목 자르기, 학대와 학살… 나로 인해 이런 짓들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어. 하자만 나는 아무리 그런 기사들이 나와도 그냥 쌩깠어. 그냥 모른 척 하기도 하고 아니라고 우겨대기도 했어. 우리나라 사람들한테는 우리랑 경쟁하는 영국 놈들의 계략으로 우리나라를 공격하려고 우리나라의 왕인 나를 모함하는 것이라고 둘러댔어. 나는 멧집이 좋은 사람이었어. 아무리 나를 공격해도 꿈쩍도 안했어. 가끔 그런 외국 언론의 공격이 먹히긴 해도 나한테 결정적인 한방을 먹이지는 못했어. 나를 규탄하는 대회가 열리기도 했어. 하지만 나는 거기에 대항해 여러가지 방법으로 여론조작을 벌이기도 했어. 뇌물을 뿌리며 로비도 했지. 하지만 아무리 내가 발버둥쳐도 사태는 악회되었어. 그래서 결국 나는 내 개인 소유로 되어 있는 식민지를 우리나라한테 몽땅 넘겨 버릴 수 밖에 없었지. 당시에 막대한 나의 돈줄이던 그 땅을 그렇게 넘기는 게 아까웠지. 그래서 처음엔 안넘기려고 발악을 했지만 끝내는 넘기게 되었어. 넘기고 나니 난 홀가분했어. 이미 나는 재산이 많았어. 어마어마했어. 그렇게 나는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았어. 내가 아무리 악행을 저질렀다고 해도 살아생전에 벌을 받지는 않았어. 특히 내가 나의 식민지에 파견한 어떤 놈은 실제로 그 잔학한 일을 직접 주도하며 그 곳에서 적도의 악마라 불리웠는데도 천수를 누렸다지.
어떻게 그런 놈들이 천수를 누릴 수 있지만 알아. 도대체 하나님이든 하느님이든 신이 계신다면 응당 그런 자들부터 처벌해야 되는 거 아니야. 정말로 귀신은 뭐하나 몰라. 선한 자는 나중에 잘 살고 악한 자는 결국에 못산다는 말이 틀리는 경우가 너무 많아. 왜 사는 게 그리도 공정하지 않은 거지? 너같은 놈당연히 처벌받아야 하는데… 아, 깝깝하다. 답답해. 게다가 너는 늙어 죽을 때까지 어린 년을 끼고 살았다는 소문이 있던데…
맞아. 난 죽을 때까지 아무런 처벌 없이 잘 살았어. 나를 비난하는 언론으로 인해 시끄럽긴 해도 다 뭉갰어. 그리고 나는 나의 막대한 유산을 나보다 50살이나 어린 나의 정부(情婦)에게 다 물려 주었어. 그녀가 나를 만날 때 매춘부였다고 해도 나는 그녀를 많이 사랑했지. 74세로 내가 죽을 때 그녀는 꽃다운 24세였지. 내가 그리도 사랑했건만 나 죽고나서 금방 다른 남자 품에 안겼다더군. 나쁜 년! 그래도 여기서라도 한 번 보고 싶네. 내가 정말 물심양면으로 주면서 사랑했는데. 물론 내가 그녀만 사랑한 건 아니긴 해도… 나는 수많은 여인네들을 만났었지. 주로 매춘부들이었어. 그 중에서 그녀는 가장 사랑스러웠지.
아니 그런데… 너보다 50살이나 어린 여자가 너 죽고나면 당연히 다른 남자랑 만나서 잘 살길 바래야 되는 거 아니야?
그건 그런데 내가 하도 좋아해서 그래. 나보다 반백년이나 어린 그녀가 젊고 싱그럽기도 했지만, 그리고 매춘부였을 때 처음 만났지만 나는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 버렸어. 왕후였던 내 아내가 죽고 난 후 난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까지 해. 매음굴에서 하루하루 낯선 남자를 만나며 웃음을 팔던 어린 애가 왕후까지 된 거지. 그렇게까지 내가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었는데 다른 젊은 놈씨 품에 안기다니! 아! 신경질나고 화난다. 열받네. 뚜껑열려.
미련을 버려. 바보야. 깨끗이 잊지 못하고 끌리는 데가 남아 있는 마음이 미련(未練)인데… 연(練)이라는 한자에 씻다는 뜻이 있는데 깨끗이 씻지를 아니(未)하였으니 미련인 거야. 여기 들어와서까지 아직도 씻지 아니한 미련을 가지고 있다니… 그렇게 미련을 가지는 놈을 미련하다고 하는 거야. 미련을 놓지 못하면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게 되니까 미련한 거지. 이름은 기백이라고 좋게 지어놓고서 미련한 바보야, 잊어라, 잉! 여기서 그 여자 볼 생각도 시궁창에 내다 버리고…
알았어. 너 참 말을 나한테 심하게 하면서도 날 꼼짝 못하게 하는 마력이 있네. 너도 한가닥 하던 여자였던 거같은데…
나는 내가 살던 우리나라에서 배신자로 불리고 있어. 우리나라를 침략한 놈들한테 붙어서 나라를 멸망하게 했다고 그렇게 부르는 거지. 그런데 그 당시 우리나라는 아주아주 잔인한 나라였어. 지금은 하나의 나라지만 당시에서 여러 부족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힘센 부족은 다른 부족들을 잡아다 인신공양을 했어. 높은 제단을 쌓고 인신공양할 사람을 그 위에 올리고 염통을 꺼내서 태양신에게 제사 지내고 그랬지. 그렇게 죽어간 사체는 제단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밑에 있던 사람들은 그 사체를 조각내어 무슨 고기처럼 취급했어. 집으로 가져가 삶아 먹고 그랬어. 힘이 약했던 우리 부족들한테는 그런 무시무시한 문화가 없어서 나는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어. 그래서 저런 잔인한 부족들은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었지.
사람 고기, 인육(人肉)을 먹다니! 그것도 무슨 세레모니 의식으로 먹는 게 아니라 정말로 일반적인 음식으로 맛있게 먹었다는 거야? 그랬다면 정말로 상종 못할 놈들이네.
정말로 그랬어.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를 침략한 백인들한테 붙어서 그 잔인무도한 부족을 몰아내는데 열심히 조력했지. 특히 백인 남자의 우두머리는 내 실질적인 남편이기도 했고. 또 그 남편 사이에 얻은 아들도 있었지. 결국 내 남편의 군대는 600여명 밖에 안되었지만 총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원시적인 부족을 무너뜨릴 수 있었지. 그렇게 해서 모든 부족들이 다 내 남편의 나라가 되었어. 수많은 부족들의 연합체가 통일되어 한 나라가 된 거지. 이후 그 나라를 다스리느라 남편의 나라에서 많은 젊은 백인 총각 남자들이 건너오고 우리나라 원주민들과 만나 혼혈아가 많이 생기게 되었지. 유전학적으로 순혈보다 혼혈이 더 우수한 DNA를 가진 후손을 남긴다는데 지금 우리나라에는 혼혈아가 많아. 그런데 혼혈아 후손들이 우수한 인간들이 된 거같지는 않아. 후손들이 이룬 나라는 지금 사는 게 어지럽고 어렵거든.
그래도 너는 잘 살았겠지. 네 남편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너는 왕후처럼 살았겠네. 게다가 네 남편의 아들까지 낳았으니…
처음엔 그랬지. 그러네 나중에 남편은 나를 멀리하더군. 그리고 나를 자기의 부하와 정식으로 결혼까지 시켰어. 내가 낳은 아들은 자기네 나라로 가서 귀족으로 살게 하였지. 그래도 나는 순종했어. 특히 새 남편은 좋은 남자였어. 그와의 사이에 딸을 낳았지. 그렇게 나는 살면서 두 남자를 만났고 각각 그 사이에서 아들과 딸까지 낳았으니 다복했다고 할 수도 있지. 그런데 난 행복하지 못했어. 행복이란 말이 너 무슨 뜻인지 알아? 행복에서 행(幸)은 일찍 죽을 요(夭)를 거슬러(屰) 지금 살아 있다는 뜻이야. 위의 요(夭)와 아래 역(屰)의 글자 모양이 바뀌어 행(幸)이라는 글자가 된 거지. 그러니까 행복이란 건 일찍 죽지 않고 지금 살아 있는 복이야. 영어로 행복을 해피니스라고 하던데 행복(幸福)과 해피니스(happiness)는 뜻이 전혀 달라. 해피니스는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나야(happen) 해피(happy)한 거야. 하지만 행복은 좋은 일이 생기든 말든 그냥 지금 일찍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행복한 거야. 그런 점에서 나는 행복하지 못했어. 내 나이 33살 때 나는 웬지모를 병에 걸려 죽었어. 좋은 남편과 예쁜 내 딸과 함께 잘 살지 못하고… 그렇게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혼혈아를 낳은 난 한창 재밌게 살 나이에 허망하게 죽고 말았어. 문제는 나 죽은 다음이야. 나는 이후 우리나라에서 때려죽일 배신자 매국노가 되었지. 그래서 난 지금 여기 들어 온 거야.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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