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가 말했다. “백성이 휴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은 다음 네 가지 때문이니,
수명, 명예, 지위, 재물이 이것이다.
이것들에 얽매인 사람은 귀신과 대인(귀족)과 권세와 형벌을 두려워한다.
이런 사람들을 일러 ‘둔민’(遁民·거짓된 사람)이라 한다.
이 둔민에게는 죽고 사는 운명을 제어하는 것이 자기 밖에 있다.
그러나 운명을 바꾸려 하지 않으면 어찌 오래 사는 것을 부러워할 것이며,
귀(貴)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찌 명성을 부러워할 것이며,
권세를 추구하지 않으면 어찌 지위를 부러워할 것이며,
부(富)를 탐하지 않으면 어찌 재화를 부러워할 것인가!
이런 사람들을 일러 ‘순민’(順民·자연인)이라고 한다.
순민은 천하에 당할 자가 없으니,
운명을 제어하는 것이 밖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열자(列子)』/「양주(楊朱)」-
달랑 모자 하나 쓰고 말뚝을 드러낸 채 한낮에 자전거를 탄다. 땀이 가슴골로 흘러내리고, 자전거의 빠른 속도가 일으키는 바람도 후텁지근하기만 하다. 땡볕은 따갑다. 그래도 옆 동네 냇가 정자나무 그늘까지 30여 분 페달을 밟는다.
여름날 나무그늘의 시원함은 대가를 지불하고 ‘벌어야’ 행복감으로 연결된다. 하루 종일 나무그늘에서 빈둥거려도 더위란 불쾌는 없을지언정 행복감은 얻을 수 없다. 젊은 날 천왕봉 등정 때나 오래지 않은 지난날 육체노동을 할 때, 그 휴식의 달콤함을 기억한다. 몸을 움직여야, 고통을 줘야 ‘달콤한 휴식’을 기약한다. 달콤함이 없는 휴식은 그냥 무료함이다.
나무그늘에서 체계적인 운동을 한다. 국민체조를 하고, 스쿼트·발꿈치들기·무릎올리기(피치)를 차례로 한다. 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맨발 걷기를 좀 하다가, 마지막으로 팔굽혀펴기(push-up)를 한다.
우리 동네에 ‘남산보건소’가 있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보건소 앞을 지나게 된다. 소장은 차라리 열사병을 우려하며 요즘 날씨에 한낮 운동을 무리라고 걱정한다. 맞기도 틀리기도 하다. 연일 폭염이 계속되고 있다. 기온과 습도 등을 반영해 체감온도가 35도 이상인 상태가 이틀 이상 지속될 것으로 예상될 때 발령되는 폭염경보도 하루에도 몇 번씩 휴대폰을 울린다.
열사병은 체온을 조절하는 신경계가 열 자극을 견디지 못해 그 기능을 상실하는 것으로, 온열질환 중 가장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폭염경보 상황에서 적절한 휴식시간과 휴식공간, 음료 등이 주어지지 않고 노동을 계속할 때 열사병이란 위협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여 필자의 운동과 열사병과는 상관관계가 거의 없다.
폭염경보 속에서도 열악한 노동조건에 일해야 하는 노동자의 처지가 아님에 불볕더위를 몸 게으름의 핑계로 삼지 않는다. 그리고 기억한다, ‘생활근육은 연금보다 더 중요하다’는 경구를.
맬서스의 덧(Malthusian trap)을 생각해 본다. 토머스 맬서스(1766~1834)는 저서 『인구론』(1798)에서, 식량과 후생(厚生·삶을 넉넉하고 윤택하게 함)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인구 증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결국 복리후생을 사회구성원에게 충분히 제공할 수 없는 사태가 온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종종 식량과 인구를 지혜와 지식으로 바꿔놓고 생각해 보곤 한다. 지식은 특정한 사실을 아는 것이고, 지혜는 이 지식을 연결하고 활용하여 삶을 행복으로 이끄는 능력이라고 대충 정리한다. 따라서 지식 그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다. 잡다한 지식을 버무리어 지혜로 숙성시켜야 가치를 지닌다.
지식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늘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지혜의 증가는 산술급수적이다. 우리는 동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그들의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초보적인 과학자도 뉴턴이나 갈릴레이보다 더 많은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인문학 교수가 고대의 사상가보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력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유발 하라리는 고·중세인들이 현대인보다 더 행복감이 높았다고 주장한다.
두보(712~770)의 ‘곡강曲江’를 감상할 때마다, 식량과 인구를 지혜와 지식으로 치환된 ‘맬서스의 덫’이 연상되곤 하는데, 아전인수(我田引水)식 개인적 감상일 뿐인가?
곡강 제이수(曲江 第二首)/두보
조정에서 나오면 날마다 봄옷 저당 잡히고(朝回日日典春衣)
매일 강가로 나가 잔뜩 취해 돌아오네(每日江頭盡醉歸)
외상술 빚이 가는 곳마다 깔리는 것은(酒債尋常行處有)
인생 칠십 살기가 예부터 드물기 때문일세(人生七十古來稀)
꽃밭 속 오가는 호랑나비 보일 듯 말 듯하고(穿花蛺蝶深深見)
잠자리 물 위로 스칠 듯 느릿느릿 나네(點水蜻蜓款款飛)
아름다운 풍광도 모두 흘러가는 거라지만(傳語風光共流轉)
잠시나마 외면 말고 함께 즐기자구나(暫時相賞莫相遠)
그 유명한 ‘인생칠십고래희’가 여기서 나온다. 필자는 ‘외상술 빚’(酒債)에 더 눈길이 간다. 두보(시대의 사람들)에게 인생은 덧없었다. 까짓 70년도 못 살았다. 하여 짧은 삶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만 시름을 잊게 하는 망우물(忘憂物), 곧 술 외에 다른 즐길 수단이 뭐 있으랴. 한데 그것도 돈이 없으니 외상을 할 수밖에.
1200여 년 후 우리는 칠십에 더해 10년, 20년을 더 산다(지식의 증가). 한데 그 기간 향유할 감각적 수단(술) 외에 다른 뾰족한 수단을 발전시켜 온 것일까(지혜의 증가)? 더 행복을 증진시키지도 못하면서 외상술 빚(가계부채)만 늘여온 것은 아닐까?
<작가/본지 편집위원>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