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공부는 어렵습니다. 공부란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하다가 질문하면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믿지 못할 놈들 천지인데 의심이 뭐가 어렵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의심하기 어려운 이유가 의외로 많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메시지가 좋기 때문입니다. 버스 뒷자리에 앉은 고운 아주머니가 초등하교 2학년쯤 되어 보이는 딸에게 이야기합니다. “엄마가 책에서 읽었는데, 물에 대고 ‘넌 참 곱구나. 나는 너랑 놀고 싶어. 사랑해’ 같은 좋은 이야기를 하고서 얼리면 대칭형의 예쁜 얼음 결정이 생기고, ‘난 네가 싫어. 꺼져. 죽어버려’ 같은 나쁜 이야기를 하고서 얼리면 아주 못생긴 얼음 결정이 생긴대.”
일본 사람이 쓴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우리나라에서만도 수십만 부가 팔렸습니다. …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도대체 물은 몇 가지 언어를 이해해야 하는 걸까요? 예쁜 말에서 특정한 파장의 에너지가 나와서 물 분자를 진동시켜 특정한 모양이 되게 할 리가 없잖습니까.
하지만 이런 말은 쉽게 믿게 됩니다. 왜냐하면 메시지가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예쁜 생각을 하고, 고운 말을 쓰라는 거 아닌가요.
두 번째 이유는 메신저가 좋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훌륭한 분의 말씀을 믿고 싶어 합니다. 선생님, 목사님, 스님, 신부님, 공자님처럼 좋은 사람들의 말은 쉽게 믿습니다. 환경운동가처럼 자신의 이익은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사는 사람들의 말을 쉽게 믿습니다.
왜요? 메신저가 좋으니까요. 좋은 사람이 설마 나쁜 이야기를 했을 리는 없으니까 믿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죠. 왜 훌륭한 분들이 하는 이야기가 다 다른지 말입니다. 핵발전소, 동성애, 신도시 건설,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목사님, 신부님, 스님들의 이야기는 모두 다릅니다. 지지하는 정당도 다릅니다.
좋은 메신저가 하는 이야기가 다 다르다면, 그들의 메시지도 당연히 의심해야 합니다. 아이들을 자연 치유시키려 한 어떤 한의사 선생님은 얼마나 훌륭한 생각을 하셨습니까. 하지만 그를 의심하지 않아서 생긴 폐단은 너무 컸습니다.
저는 환경운동가들의 삶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GMO, MSG, 전자(기)파의 위험성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무턱대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이정모/『과학인 가르쳐준 것들』(2024)-
전 국립과천과학관 관장 이정모 선생을 ‘지식’ 관련 유튜브에서 더러 만났다. 생물다양성과 6차 대멸종, 기후위기 등에 관한 그의 명쾌한 해설은 우리가 맞닥뜨린 인류 차원의 위기를 이해하는 데 무척 도움이 되었다.
유튜브는 아무래도 ‘단편적’이다. 어떤 지식의 체계적인 전모를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저서, 곧 책을 읽어야 한다. 마침 ‘자유롭고 유쾌한 삶을 위한 17가지 과학적 태도’란 부제를 단 『과학이 가르쳐준 것들』이 눈에 띄었다. 읽었다.
위 인용문은 ‘17가지 과학적 태도’ 중 ‘비판적 사고’에 나오는 내용이다. 저자가 언급하지 않았지만, 필자의 관견으로는 우린 지나치게 의심하기도 하고, 지나치게 믿어버리기도 한다. 그 기준은 무엇일까? 대체로는 ‘이기적 본능’이다.
미모의 톱 여배우가 광고하는 화장품을 바르면 그처럼 미모가 될까? 둘의 인과관계는커녕 상관관계도 지극히 낮다. 모델료 지불하려 화장품 단가는 분명 높아질 것이다. 손흥민이 선전하는 어떤 금융기관, 둘 사이도 상관관계가 없다. 노동자의 파업투쟁에서 제3자들은 회사측과 검찰의 주장을 노조의 주장보다 더 받아들인다. 언론들도 대체로 회사측과 검찰측을 대변한다.
과학의 영역에서 ‘사실’은 확정적인 것이 아니라, 잠정적인 것이며 시험에 열려 있다. 곧, 항상 의심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뇌호흡을 보자. 이에 대한 책은 세계적으로 수십만 권이나 팔렸다. 뇌호흡은 다양한 방법으로 뇌를 자극하고 운동시킴으로써, 뇌의 긴장을 제거하고 뇌가 원래의 편안한 상태를 회복하도록 돕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과학 교과서에는 뇌호흡이 안 나온다. 이는 과학자의 의심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학적 연구를 통해 뇌호흡의 효과가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판적 사고는 어쩜 과학적 문제에서는 쉽고 당연한 일이다. ‘검증’이란 눈에 보이는 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하여 정작 필요한 곳은 사회적 문제에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검증도 어렵거니와, 그 검증의 결과는 수 년 혹은 수십 년의 세월이 걸리기 때문이다.
하여 우리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사실’을 확인하기보다는, 곧 의심하는 비판적 사고를 갖기보다는 손쉽게 메시지와 메신저에 의존하여, 믿거나 믿지 않게 된다. 본디 우리 뇌는 게으르고 편안한 것 좋아한다.
그러나 분명한 건, ‘비판적 사고’에서 비판이란 비난을 의미하는 부정적인 뜻이 아니다. ‘critical’은 ‘비판적’으로 자주 쓰이지만, 거기에는 ‘중대한, 결정적인’이란 뜻도 포함하고 있다. ‘비판적 사고’란 곧 우리에게 ‘아주 중대한 사고’라는 뜻이다.
우리 사회구성원 대다수가 비판적 사고를 한다면, ‘채 해병 사건’이나 ‘김 여사 사건’ 등에 관해서 아예 청문회를 열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이정모 전 관장은 <비판적 사고>의 장을 열면서, 논어/양화편8을 인용한다.
「‘호신불호학(好信不好學) 기폐야적(其蔽也賊)’, 요즘 말로 하면 ‘믿기만 좋아하고 공부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사회의 적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필자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뜨악했다. 매우 놀랐다. 그리고 ‘인공지능(AI)의 한계’가 퍼뜩 연상되었다. 왜 그랬을까?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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