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남존여비(男尊女卑)는 ‘사회적 사실’이다. 남성이 여성보다 존귀하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통용되었다. 조선시대에 양반이니 상놈이니 하는 계급(왕실-양반-중인-양민-천민)은 ‘제도적 사실’이다. 『경국대전』에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사회적 사실과 제도적 사실은 인간 사이의 합의에 따른 결과이다. 그러나 인간의 선택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사실이 있다. 물리학자들은 이를 ‘잔인한 사실’(brute fact)이라 부른다.
갈릴레이의 지동설은 잔인한 사실이었다. 중세 당시의 종교와 국가의 사회적이고 제도적 사실은 천동설이었다. 잔인한 사실이 사회적·제도적 사실과 경합하여 이겨냈다. 그 결과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속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사회적 사실과 제도적 사실이 만들어졌다.
곧, ‘만인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제도적 사실과 ‘남녀평등’이라는 사회적 사실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를 역사적 진보라고 부른다.
‘잔인한 사실’을 물리학적·철학적 의미를 떠나 일반적인 용어로 풀면, ‘진실이며 결코 무시할 수 없지만, 불유쾌한 어떤 사실’(something, especially something unpleasant, that is known to be true and cannot be ignored)을 가리킨다.
현재 대한민국, ‘눈 떠보니 선진국’에서 불과 2년 만에 ‘자고 나니 후진국’이 된 나라에서 ‘잔인한 사실’은 무엇인가? 역사의 진보가 무색케 ‘피크 대한민국’(Peak Korea.대한민국의 성장이 한계에 봉착함)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 참담한 심정이다.
21세기 대명천지의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무소불위의 칼날이 시퍼런 검찰이 ‘출장 조사’가 웬 일이어서, ‘콜 검’이란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가! 현 정부 실정의 제1책임은 물론 대통령이겠지만, 그 뿌리는 검찰이다. 검찰이 대통령의 갑옷과 투구에다 창과 칼이기 때문이다. 콜 검이란 조롱은 이제 검찰은 ‘해체’ 외는 대안이 없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지금 남북에서 쏘아올린 쓰레기 더미가 날아다니고 있다. 국외에서 보면 한반도에서 당장 ‘열전’(熱戰)이 발발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2년 연속 세수 결손이 예상됨에도 여전히 부자 감세를 고집하고 있다. 한데 생활고에 허덕이는 국민들을 위해선 예산을 쓸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
단순한 축제에서 사람이 백 수십 명이 죽어도 그 책임자인 행안부 장관은 아직도 건재하다. 지휘관의 잘못된 명령으로 병사가 사망하여, 그 책임자를 가려 처벌하자는데, 여당 국회의원은 순직 해병을 ‘장비 파손’에 비유하여 모욕한다.
대통령 부인이 보냈다고 하는 문자메시지 전문이 공개되고, 당 대표 후보가 그걸 ‘읽씹’했느니 어쨌느니 이전투구가 벌어졌다. 그 난장판의 본질을 여당 쪽 인사들이나 지지자들은 알고나 있을까. ‘문자 읽씹’은 손가락이고, ‘대통령 부인의 금품수수와 국정 개입’이 달이다.
공소 취하 청탁을 본인만을 위한 것이냐, 당 소속 전체를 위한 것이냐, 이게 뭐가 중요한가. 어느 쪽이든 불법이다. 판사 출신의 법 인식이 이 정도라니, 윤석열 정권이나 국민의힘 사람들은 수사나 기소를 자신들의 권리로 여긴다고 볼 수밖에 없다.
또 공직자가 불법 청탁을 받은 경우는 신고, 조사 등 관련 조치를 취해야 한다. 곧, 불법 청탁을 한 나경원 후보나 불법청탁임을 알고도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은 한동훈 후보 둘 다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결국 범죄피의자들끼리 설전을 벌이고 있다. 그들의 설전은 손가락이고, 양쪽 모두를 수사함이 달이다. 한데 양쪽 모두 불법에 대한 의식도 없고, 수사에 대한 두려움도 없는 듯하다. 여당 지지자들도 그들의 불법성은 안중에 없는 듯하다.
이게 법이지요/목에 걸면 그것은/부자들에게는 목걸이가 되고/가난뱅이들에는 밧줄이 되지요(김남주, <법 좋아하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청문회에 맞불로 정청래 의원에 대한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직 해임’,‘국회의원직 제명’을 요구하는 국회 국민동의청원이 수만 명의 동의를 얻고 있다. 민주당 해산 청원 역시 수만 명의 동의를 얻고 있다.
‘청원 정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현상을 일부 언론에서는 ‘역풍’이니 ‘촌극’이니 하며 청원 정쟁을 폄훼한다. 아니다. 바람직한 전개이다. 민주주의는 구성원 간의 갈등을 전제한다. 이익의 충돌은 필연이다. 하여 민주주의는 소란스럽고 비용이 많이 든다.
다만 이 갈등을 어떻게 극복해내느냐가 관건이다. 이 정쟁은 국회의원들끼리의 야합보다는, 청문회란 열린 공간에서 타협을 하든 가부를 가리든 그 과정을 국민들에게 노출하는 것이 미래지향적이다.
재레드 다이몬드(『총,균,쇠』의 저자)는 『문명의 붕괴』(2005)에서, 인류가 직면한 문제와 그 해결책과의 긴장관계를 경마에 비유했다. 곧, ‘파괴’라는 말과 ‘희망’이라는 말과의 경주이다.
한쪽은 문제를 악화시킨다. 한쪽은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양쪽의 경쟁의 결과에 따라 우리 문명이 붕괴되든지, 다시 한 발 앞으로 내디디며 더욱 번영할지,가 결정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AGI에 사고(思考)를 아웃소싱함에 따라 인간의 지능이 덜 중요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100년 전에 자동차가 발명되면, 걷는 것이 불필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다.
AGI는 창조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전문가도 많다). AGI의 지식은 ‘과거의 누적’이기 때문이다. 곧, 현재 시점 이전까지의 모든 데이터를 섭렵한 것이다. 하여 새로운 돌발 사태나 상황 변동에 AGI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다. AGI는 아는 것은 과거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마차를 몰던 시절, 누군가가 증기기관 열차를 제안했다고 치자. AGI이라면 ‘말을 더 빨리 달리게 하는 방안’을 제시하지, 증기기관을 채택하진 못할 것이다. 그 시점의 과거 데이터엔 증기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지금대로 하지 않겠어’라며 반항적 행동을 한다. ‘현재’와 ‘일반’에 저항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이를 통해 새로운 예술이나 기술, 제도를 창조한다. 반면에 AGI는 인간과는 반대로 일반적인 것, ‘과거에 가장 많이 해온 것’으로 학습하고 그런 결과물을 낸다.
AGI를 사용할 때, 인간은 일을 ‘시키는 존재’이고, AGI는 ‘실행하는 존재’이다. 일을 시키는 존재가 일을 실행하는 존재보다 그 일의 내용을 더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는 동시에 일의 목적도 달성할 수 있다.
AGI를 상용하는 세상이 어떠할지,는 결국 인간의 손에 달려있다. 지금 이 시대에서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 ‘잔인한 사실’들을 극복할 수 없다면, 미래에도 AGI는 문명의 붕괴를 재촉하는 편의 무기가 될 뿐일 것이다.
AGI는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다. AGI가 인류에게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해 줄 수 없다. 인류의 미래는 오직 우리 인간의 손에 달려있다. ‘지금 여기’에서 ‘잔인한 사실’을 직시하고, 그 잔인한 사실을 해결한 연후에야, AGI는 프로토피아적 세상으로 나아가는 요긴한 동반자가 될 것이다. <끝>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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