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우리의 허영, 자기애는 천재 예찬을 부추긴다. 천재를 우리와 아주 동떨어진 존재, 기적으로 생각할 때만 그 사람 때문에 기분이 상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 천재도 먼저 벽돌 쌓는 법을 배운 뒤 건물 짓는 법을 배우며, 끊임없이 재료를 찾고 그 재료를 써서 꾸준히 자신을 만들어 간다. 천재의 활동만이 아니라, 사람의 모든 활동은 놀라울 만치 복잡하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기적’은 아니다.' -프리드리히 니체/『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앨런 튜링(Alan Turing. 1912~1954)은 컴퓨터과학의 아버지이자 현대 컴퓨터과학을 정립한 인물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정부의 요청에 따라 나치 독일군의 암호기 에니그마(Die Enigma)의 암호 해독 임무를 맡았다. 튜링은 에니그마의 해독을 통해 전쟁 기간을 단축했고, 대략 1400만 명의 목숨을 구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앨런 튜링의 실화를 바탕으로 나치 독일의 암호기 에니그마를 해독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가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2014)이다. 여기서 에니그마 암호 해독을 위한 일급비밀 프로젝트의 요원을 뽑기 위한 면접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데니스턴 중령 : 자넨 누군가?
앨런 튜링 : 앨런 튜링입니다.
데니스턴 중령 : 아, 그 수학자 튜링. (서류를 보며)캠브리지 대학 킹스 칼리지. 수학 에 타고난 천재라고 쓰여 있군.
앨런 튜링 : 글쎄요, 저는 그다지….
데니스턴 중령 : 나이가 어떻게 되지?
앨런 튜링 : 27살입니다.
데니스턴 중령 : 몇 살 때 교수가 됐나?
앨런 튜링 : 24살에요.
데니스턴 중령 :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논문을 발표한 건?
앨런 튜링 : 23살 때요.
데니스턴 중령 : 그런데도 자신을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나?
앨런 튜링 : 뉴턴은 22살에 이항정리를 발견했고, 아인슈타인은 26살에 4편의 논 문을 써서 세상을 바꿨죠. 그에 비하면 전 기본 수준인 거죠.
사마천(기원전 145년~기원전 86년?)은 동양에서 역사학을 정립한 사람이라 평가할 수 있다. 서양의 헤로도토스(기원전 484년 경~기원전 425년 경)와 함께 동서양의 역사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사마천은 『사기열전』 일흔 편 중 첫 편 「백이숙제」에서 ‘천도시비’(天道是非), 곧 ‘하늘의 도는 옳은가 그른가’란 질문을 제시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늘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
백이와 숙제 같은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이처럼 어진 덕망을 쌓고 행실을 깨끗하게 했어도 굶어 죽었다.
또한 공자는 제자 일흔 명 중에 안연만이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안연은 늘 가난해서 술지게미와 쌀겨 같은 거친 음식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고, 끝내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복을 내려 준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춘추시대 말기에 나타난 도적 도척(盜跖)은 날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간을 날로 먹었다. 잔인한 짓을 하며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제멋대로 천하를 돌아다녔지만 끝내 하늘에서 내려준 자신의 수명을 다 누리고 죽었다. 이는 도대체 그의 어떠한 덕행에 의한 것인가?
(…) 이런 사실은 나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리라고 한다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초기 유가(儒家)들, 훗날 성리학자들은 자연의 존재법칙과 인간의 당위법칙을 구분하지 못했다. 산의 높음과 계곡의 깊음이 있으니, 곧 자연에는 높낮이가 있으니, 인간에게도 높낮이가 있어, 남자는 위이고 여자는 아래며(男尊女卑), 관은 높고 민은 낮다(官尊民卑)는 등으로 해석했다. 일종의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이다.
역시 역사가는 유가들과 다르다. 사마천은 역사를 연구하고 인간과 사회를 살피고 경험하면서, 세상사를 익히 알았다. 유가들이 말하는 천도의 기본, 곧 권선징악(勸善懲惡)은 하나의 바람이나 푯대일 뿐, 실제 사회 현상에서는 유가들이 말하는 천도는 존재하지 않음을 직시했다.
이런 사실은 사마천이 겪은 치욕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이 천도의 문제를 첫대바기로 내세운 것은, 백이숙제와의 동병상련, 아니 그보다는 발분(發憤)의 의지를 다지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오래 전부터 사마천이 궁형(宮刑·생식기를 없애는 형벌)의 치욕을 감수하면서까지 살아남으려는 이유에 숙연해 했다. 그러다가 컴퓨터 세상이 되고 그 선구자 앨런 튜링을 알게 되자 곧바로 사마천의 궁형이 연상되었다.
튜링도 전쟁 후 동성애 혐의로 체포되어 화학적 거세형을 선고 받았다. 2000년의 세월 건너뛰고 동양과 서양을 가로질러, 뛰어나고 선량한 두 인물이 궁형과 ‘화학적 거세형’을 받게 됐다는 것은 어떤 시사점을 주는가? 만약 앨런 튜링이 노자의 가르침을 알았더라면, 어쩜 지금 현재가 AI 시대를 넘어 이미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세상으로 진입했을지도 모른다.
노자는 이런 인간사, 인심을 2000여 년 전 그 당시에 이미 깨닫고, 세인들에게 가르치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