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 칼럼】비로소 정신의 궁핍을 자각하다 ②알려짐과 알아줌

조송원 승인 2024.06.26 16:20 의견 0

「안영이 제나라 재상이 되어 밖으로 나가려 할 때, 안영의 마차를 모는 마부의 아내가 문틈으로 자기 남편을 엿보았다. 남편은 마차의 큰 차양을 받쳐 들고, 말 네 필에 채찍질을 하면서 의기양양하여 자못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시간이 지나 마부가 돌아오자, 그 아내는 헤어지자고 요구했다. 남편이 그 까닭을 묻자 아내는 이렇게 대답했다.

“안영이라는 분은 키가 여섯 자도 채 못 되는데도, 몸은 제나라 재상이 되어 제후들에게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그분이 외출하는 모습을 살펴보니, 품은 뜻이 깊고, 늘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태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키는 여덟 자나 되건만 겨우 남의 마부 노릇을 하면서도 아주 의기양양해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소첩이 헤어지자고 하는 까닭입니다.” -사기열전/관·안열전-

학인 대우이면 어떻고, 노가다 일꾼 취급이면 또 어떠랴! 기술이 필요치 않는 근력만이 필요한 막노동을 하고 있는데, 일꾼 대접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고대 2000여 년 전 마부 아내의 비웃음에 정신이 아뜩하다. ‘호주머니 가벼운 것은 둘째치고라도, 정신마저 이렇게 빈약하다니!’

‘알려짐’은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인 일이고, ‘알아줌’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일이다. 곧, 알려짐은 눈에 보이는 것들, 부(통장잔고)나 아파트 큰 평수나 상당한 지위나 직위에 의해서이다. 알아줌은 오감으로는 감각할 수 없는 ‘내적 충실’(덕)에 의해서다.

신언서판(身言書判)에서,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신)과 달변(언)으로 알려지고, 글(서)과 세상사를 꿰뚫는 통찰력(판)으로 알아줌을 받는다(지우를 입는다). 진정한 학인은 알려짐에는 별무관심이다. 알아주는 사람에게는 외려 그에게 배우려 할 뿐이다.

학인이 추구하는 바는 일상인들과는 다르다. 스피노자는 이 점을 정확히 보여준다.

“지복(至福·supreme happiness)은 덕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덕 자체이다. 우리는 욕정을 억누르기 때문에 지복을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지복을 향유하기 때문에 욕정을 절제할 수 있는 것이다.”

-『에티카』/5부 정리42-

‘알려짐’에 대해 『논어』와 『노자』의 관점을 비교해 보면, 제법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후생(後生)이 두려울 만하니 <후생의> 장래가 <나의> 지금만 못할 줄을 어찌 알겠는가. <그러나> 40, 50세가 되어도 알려짐이 없으면 이 또한 두려울 것이 없다.”

-논어집주/자한22/전통문화연구회(밑줄은 필자)-

知我者希(지아자희) 나를 아는 자가 드물다
則我者貴(즉아자귀) 그러므로 나는 귀하다

-노자/70장-

논어 번역서는 5종, 관련 서적까지 합치면 10여 종 가지고 있다. 대체로 위와 같이 번역하고 있다. 밑줄 친 부분을 ‘이름이 나지 않으면’으로 번역한 것도 있다.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이는 오역이다.

흔히들 사서삼경을 ‘동양고전’이라고들 하지만, 정확히는 중국고전이다. 필자는 중국고전 번역서들 중에서 저본으로 삼는 것은 묵점 기세춘 선생의 저작이다. 선생은 <자한22>를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참고로 <자한22>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어 ‘후생가외’(後生可畏)의 출처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후배는 두려운 존재다.
어찌 내일 그들이 오늘 우리만 못하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사십, 오십이 되어도 지혜롭지 못하다면
이들은 역시 두려할 것이 못 된다.”

-『論語강의』/묵점 기세춘(밑줄 필자)-

‘알려지지 않는다면’, ‘이름이 나지 않는다면’라고 번역한, 다른 번역서들과는 달리 ‘지혜롭지 못하다면’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밑줄 친 부분의 원문 四十五十而 無聞焉에서 聞을 각주하여 ‘聞(문)=智也’라 보충 설명했다.

‘알려짐’이나 ‘이름 남’이 ‘지혜로움’과 같은 뜻인가? 전혀 다르다. 필자가 묵점 선생의 번역을 맹신하는 게 아니라, 나름의 근거를 갖고 있다. 『논어』 전체를 압축하는 내용이 이 책 첫머리의 세 문장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이 아니 즐거운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남이 몰라준다고 노여워하지 않으니 이 아니 군자인가?(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군자는 유가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인물이다. 군자는 남이 몰라준다고 성내지 않는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모르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학이16). 따라서 <자한22>에서, 40세 50세가 될 때까지 이름을 날리지 못한다면, 혹은 출세하지 못한다면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 세월까지 남을 다스릴 능력(지혜)을 갖추지 못했다면, 별 볼 일 없는 존재라는 말이다.

유가(儒家)의 공부는 치인(治人·남을 다스림)을 위해 먼저 수기(修己·자기수양)하는 것이 핵심이다. 하여 선비는 비록 관직에 오르지 못했더라도, 언제든 관직에 나가면 인민(人民)을 다스릴 수 있게 자기 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 하여 ‘학생’(學生)이다.

다만, 유가의 이상적인 삶은 ‘덕(지혜)으로 널리 알려져’ 제후나 왕에게 등용되어 ‘선한 권력’을 행사하여,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할 것을 지향한다. 하여 ‘알려짐’이 중요한 구실을 한다.

그러나 ‘알려짐’에 대한 노자의 생각은 다르다. <계속>

조송원 작가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