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가락은 굵고 손등도 두꺼워 전체적으로 큰 편이고, 아주 투박하다. 천생 막노동을 통해 단련된 모습 같다고들 한다.
수삼 년 전, 친구 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여직원이 타이핑 중이었는데, 한글 타자는 숙련돼 있었지만, 괄호 속에 든 영문을 타자하는 데 숫제 ‘독수리 타법’이었다. 여직원이 차를 내오려 나간 사이, 심심파적으로 A4용지 두 장 분량을 내가 단숨에 타이핑했다. 친구도 적이 놀랐고, 여직원은 내 손과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눈이 휘둥그러졌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경로의존성’의 지배를 받는다.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e)이란, 과거에 형성된 관행이나 제도, 규격, 제품 등에 익숙해져 이에 의존한 탓에 지간이 지난 후 이것이 비효율적인 것으로 밝혀지거나 변화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을 때에도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사회경제적 현상이다(나무위키).
우리는 익숙한 것에 정서적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낀다. 특별하고 절박한 이유가 없는 한, 경로를 바꾸는 데 드는 비용과 수고를 지불하지 않고, 설령 좀 비효율적이라도 익숙한 길을 그대로 걷는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가는 것도 경로의존성 때문이다. 자녀의 지저분한 방을 어머니가 깨끗이 치우면 되레 자녀가 짜증을 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엄연히 미터법이 공인인데도 아직도 우리는 건물을 평수로 말한다. 23년 6월 28일 이전까지 한국에만 존재했던 ‘세 개의 나이’(세는 나이, 연 나이, 만 나이)도 경로의존성 탓이다.
내가 경로의존성을 탈피한 것은 악필 때문이었다. 국어시험지 지문은 좀 기냐. 매분기 시험 문항 출제에도 수고가 많이 드는데, 이걸 갱지에 옮겨 적는 게 이만저만한 고행이 아니었다. 흡사 불경을 사경(寫經)하듯 땀을 흘려야 했다. 아니다 싶어 작심하고 타자 수련(?)을 감행했다. 40여 년 전의 일이지만, 그 당시 재직 학교에서 시험지를 타자로 친 교사는 50여 명 중 내가 유일했다.
주간지 <The Economist> 연간 구독료는 종이책으로는 60여만 원, 온라인으로는 20만 원 정도다. ‘활자는 종이책으로’ 란 향수에 집착한다. 종이책에 익숙한 것이다. 한데 어쩌랴, 주머니가 가벼운 것을. 어쩔 수 없어 온라인 구독을 한다.
한데 온라인으로 보니 이점이 종이책을 훨씬 능가한다. 기사 업데이트도 매일 이뤄져 최신 기사를 실시간으로 검색할 수 있다. 더구나 자료정리에서 강점이 돋보인다. 기억하고 싶은, 후에 참고할 기사를 바로 캡쳐해 컴퓨터에 저장할 수 있다. 아마 책값에 무심해도 될 형편이었다면, 이 이점을 영원히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나이 들어, 나잇값에 걸맞게 세상사 인생사에 대해 나름 깨침이 있어서든, 저물어 가는 해 영달을 포기해서든 간에 안심입명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 안심입명에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생활비(의료비 포함)와 건강이다.
이 둘을 절묘하게 충족시키는 게 있다. 자전거이다. 자동차는 유지비가 많이 든다. 한정된 자원으로 그 유지비를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동수단으로 단·중거리는 자전거로 족하다. 원행은 대중교통이 받쳐준다. 물론 불편쯤은 감내해야지.
20여 리 상거의 읍내에 볼 일이 생기면, 보통 자전거를 이용한다. 쉬엄쉬엄 오고 가는 데만 2시간이 걸린다. 자동차로는 30분이면 족할 것이다. 그러나 노선버스 시각에 맞추고, 내려서 목적지까지 걷는 시간을 고려하면 시간상으로도 대차는 없다.
몸 찌뿌드드할 때 자동차 타고 가는 편안함보다, 자전거를 타며 땀 흘리면서 몸이 깨어남을 자각할 때 ‘아직도 몸이 쓸 만함’을 확인한다. 역시 삶의 생기는 육신의 편안함에서 돋워지는 게 아니라, 육신을 적당히 괴롭힘에서 오는 것이구나, 하는 깨침을 얻는다.
내 화장실은 본채와 떨어져 있는 뒷간이다. 곧 ‘퍼세식’이다. 이 뒷간을 이용할 때마다 다산 선생의 <肩輿歎견여탄>의 앞 두 구절을 읊조리게 된다.
人知坐輿樂(인지좌여락) 사람들은 가마 타는 즐거움은 알아도
不識肩輿苦(불식견여고) 가마 메는 고통을 알지 못하네
자기 배설물을 정직하게 직시한 적이 있는가. 한 걸음 더, 그 오물이 내 뱃속에도, 저 잘생기고 잘난 남자의 뱃속에도, 저 단아하고 아리따운 여성의 뱃속에도 똬리 틀고 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본 적이 있는가.
문명 이기(利器)에 그 처리를 맡긴다고 그 오물과 나는 진정 상관없는 일일까? 수세식에서 물 한 번 내림으로 처리하고 깔끔을 떠는 사람들, 음식을 삶의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필연의 그 배설물은, 우리가 살아있음의 흔적이라는 것, 고마워한 적이 있는가.
모자람이, 부족이, 결핍이 결코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때로는 힘이 된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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