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석보(越石父)라는 어진 사람이 어쩌다가 죄인의 몸이 되었다. 안영(제나라 재상)이 밖에 나갔다가 길에서 우연히 그와 마주쳤다. 안영은 자기 마차의 왼쪽 말을 풀어 보석금으로 내주고, 월석보를 마차에 태워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온 안영은 아무런 인사말도 없이 내실로 들어가 버렸다. 안영이 내실에서 한참 머물자, 월석보는 떠날 뜻을 비추었다. 화들짝 놀란 안영은 옷과 모자를 바로하고 사과하며 말했다.
“제가 어질지는 못하지만, 당신이 어려울 때 구해 드렸습니다. 어찌 당신이 이토록 빨리 인연을 끊으려 하십니까?”
그러자 월석보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듣건대, 군자는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자에게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만, 자기를 알아주는 자에게는 자신의 뜻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제가 죄인의 몸일 때, 옥리(獄吏)들은 저에 대해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깨달은 바가 있어서 보석금을 내어 저를 구해 주었으니, 이는 저를 알아준 것입니다. 저를 알아주면서도 예의가 없다면, 진실로 죄인의 몸으로 남아 있는 편이 낫습니다.”」 -사기열전/관·안열전-
사람은 ‘의미 짓기’를 하는 동물이다. 특히 곤궁한 처지에 몰렸을 때, 의미 짓기는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동아줄이다. 물론 따지고 보면, 그 의미 때문에 곤궁한 처지에 몰렸을 수도 있겠다.
폭염주의보가 내린 며칠 동안 비닐하우스에서 취나물을 수확하는 노동을 했다. 러닝셔츠(undershirt)를 짜야 할 정도로 땀을 흠뻑 흘렸다. 나는 유달리 땀을 많이 흘린다. 그러나 여름에 강하다. 땀을 많이 흘리면 진이 빠지는 게 아니라, 몸이 가볍고 가뿐해지는 체질 덕분이다.
“독거노인이 이렇게 땀 흘리다 쓰러질라!” 친구의 친구라 말 놓고 지내는 사이로 평생을 일용노동자로 살아온, 우연히 같이 일하게 된 친구가 농반진반으로 말을 건넸다. 독거노인? 참 생경한 단어인데, 나를 지칭하다니, 기분이 참 묘했다. 대놓고 이렇게 불린 적도 없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적실한 말이다. 행정에서는 독거노인이라 공식 등록할 것이다. 혼자 살고 경로 할인을 받는 나이니까, 무슨 덧붙일 말이 필요할까? 마는, ‘불편한 진실’을 개인 인식은 거부한다. 이 진실과 인식의 괴리가 ‘미성숙 노인’의 근인(根因)이다. ‘있는 그대로 보기’가 왜 내공의 가늠자인지 알만한 일이다.
왜 이 나이에 뙤약볕 비닐하우스 안에서 노동을 하는가? 간단명료하다. 임금을 받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 간단명료한 답에는 넓고 깊은 ‘사실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 내포된 뜻을 하나하나 밝히는 건 구차하다. 삭막하고 서글픈 현실만 드러낼 뿐이다.
삭막하고 서글픈 현실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곤궁한 삶을 지탱하는 지주가 흔들린다. 하여 나는 ‘의미 짓기’를 한다. ‘건강검진을 노동으로 대체한다’고. 휴대폰에 폭염주의보가 뜨는 며칠 동안, 육체노동을 했다. 그래도 몸에 이상이 없다. 좀 피곤하긴 하지만 자고 나니 거뜬하다. 아직은 쓸 만한 건강상태구나. 건강검진 한 번 자알 했다. 덤으로 책값도 벌고. 뭘 더 바라랴!
같이 일하는 친구는 넌지시 일당(10만 원)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이 땡볕에 일하는데…, 란 말로 구실을 댔다. 나는 별 할 말이 없었다. 주인 친구와는 ‘특별관계’이다. 이 친구는 내가 귀향 후 몇 년 동안 군불나무를 대줬다. 그 외에도 신세진 일이 많다. 하여 임금만큼 일손 부족한 때 친구의 농사일을 도와서 신세 갚는다는 의미도 크다. 그리고 실제 작업시간은 5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또 10만 원은 비닐하우스 취나물 수확 때의 관행적 임금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 또한 불만이 없는 게 아니다. 서재에서 책을 들면 선비이고, 들에 나가 삽들 들면 농부인 법이다. 현재 나의 경우는, 집 안에서 책상 앞에 앉으면 학인(學人)이고, 밖으로 나가 일을 하면 노가다 일꾼이다.
사람은 여러 개의 정체성(페르소나)을 갖는다. 나의 경우 현재로서 두드러진 정체성이 학인과 노가다 일꾼이다. 문제는 타인과 자아가 갖는 정체성이 서로 다르다는 데 있다. 일을 나가면, 응당 타인은 나를 그냥 일꾼으로 볼 뿐이다. 한데도 일을 하면서도 나의 정체성은 학인에 둔다.
하여 서운한 일이 생긴다. 내심 학인의 정체성에 무게를 두는데, 타인들은 그냥 일꾼으로 볼 뿐이다. 그 타인인 ‘아는 사람’일수록 그 서운함의 정도가 커진다. 이번 일에서는 주인친구가 개인사정으로 인해 현장에 없었기에 더욱 서운함을 숨기기 어려웠다.
작업을 마치고 자전거로 귀가하면서, ‘서운해 하는 나’를 문득 자각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물질적 가난뿐 아니라, 마음까지 가난하구나!’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