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141) 지난밤 꿈에, 장진숙

손현숙 승인 2024.09.28 09:00 | 최종 수정 2024.09.28 11:22 의견 0

지난밤 꿈에

장진숙

돌아가신 친정아버지가 오셔서
한 웅큼 볼펜을 사주셨다
딸을 바라보는 눈빛이
어쩐지 슬퍼보였다

오래도록 문 닫아건 채
베짱이처럼 유유자적 놀고 있는
한심한 막내딸에게
교보문고 매장에서 볼펜을 건네던
아버지 마음을 헤아려보다가

새벽에 잠에서 깨어
게으름을 떨치고
책상 앞에 앉는다

장진숙 시인

장진숙 시집 《그림자 유적》을 읽었다. ‘2024. 한국문연’

이생에서 만난 아버지와 딸은 어떤 인연의 연속이었을까. 8남매 여자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시인은 아마도 아버지에게는 참으로 애틋한 존재였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언니 오빠들이 누렸던 아버지와의 시간만큼은 함께하지 못하였으리라. 왜 화자가 “오래도록 문 닫아건 채/베짱이처럼 유유자적 놀고”있었는지는 시의 정황상 밝혀지지 않았지만, 막내딸을 향한 아버지의 애정만큼은 짧은 시화 속에서도 충분하다. 아마도 화자, 즉 시인은 어려서도 책과 문구용품을 좋아했었나 보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막내에게는 채근보다는 사랑을 넌지시 쥐어주시곤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시인은 그 다정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 되었던 듯싶다. 아직도 허전하고 쓸쓸한 날에는 어김없이 찾아와 주시는 아버지……, 새벽녘 시인은 아버지를 몸에 각인한다.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멀어도 걷는 사람》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