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136) 박스리어카 장 씨 - 꽃피는 백골, 정병근

손현숙 승인 2024.08.17 10:44 | 최종 수정 2024.08.17 11:08 의견 0

박스리어카 장 씨
- 꽃피는 백골

정병근

그는 사랑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사랑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숱한 고비를 넘고 허기를 끄면서 그냥 살았다. 죽은 아내에게도 평생 그 말을 해 주지 않았다. 감은 눈의 장막에 과거의 장면들이 스쳤다. 식민지와 육이오와 보릿고개가 지나갔다. 4.19와 5.16과 고속도로가 지나갔다. 부모 형제도 지나갔다. 자식들도 지나갔다. 울면서 아내도 지나갔다. 그는 점점 혼자가 되었다. 그는 혼자인 것에 상심하다가 분노하다가 잠꼬대처럼 울컥 뭐라고 내뱉었다. ‘이놈들아’인지 ‘야야야’인지 귀조차 가물가물했다. 듣는 이 없이 쇠잔한 그는 이윽고 남은 숨을 거두었다. 한줄기 눈물이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초개의 생을 마감하는 이슬방울이었다. 그는 가장 평화롭게 몸을 놓았다. 그는 말 대신 긴 냄새로 사랑을 피웠다. 녹아내린 몸이 장판을 타고 번지다가 번지다가 천천히 말랐다. 봄이 왔다. 문이 열렸고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목련꽃이 뒤늦은 시취를 풍겼다. 아홉 시 뉴스에 그의 죽음이 불려 나왔다.



정병근의 시집 《우리 동네 아저씨들》을 읽었다. ‘2024. 사유악부’

정병근은 시인의 말에서 “언어주의자인 나는 모든 것을 읽는다”라고 발화한다. 그렇게 그는 0도의 글쓰기로 다만 사물을 응시한다. 그가 총알처럼 장전하고 있는 견자의 시선은 “유리창에 몸 베인 햇빛이/피 한 방울 없이 소파에 앉았다”_(〈유리의 기술〉 중에서)로 예리하고 첨예하다. 그의 여섯 번째 시집 《우리 동네 아저씨들》은 정말 허술하고 허름한 동네 아저씨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저들은 모두 가난하고 찌질하고 또 애잔하다. 한결같이 못났거나 주저한다. 저들의 운명은 결국 시인의 일갈처럼 “곧 유한한 종국을 맞이할 빛나는 실패자” 들인 것이다. 나는 여기서 문장을 고쳐야 한다. 저들이 아니라 우리 모두, 그러니까 이 시집 속에 들어앉은 우리 동네 아저씨들 50명의 모습은 결국 당신과 나의 모습이다. 누가 잘났고, 누가 못났고의 이야기는 하수들의 밀당이다. 당신도 나도 그리고 또 저 너머의 누구도 결국은 거기서 거기다. 가난하고 외롭고 돈도 없고 버림받은, 그러나 열심히 살았던 흔적은 빛나는, 우리는 너나없이 찬란하게 몰락한다.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멀어도 걷는 사람》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