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131) 다리, 신경림

손현숙 승인 2024.05.25 09:00 의견 0
신경림 시인

다리

신경림

다리가 되는 꿈을 꾸는 날이 있다
스스로 다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내 등을 타고 어깨를 밟고
강을 건너는 꿈을 꾸는 날이 있다
꿈속에서 나는 늘 서럽다
왜 스스로는 강을 건너지 못하고
남만 건네주는 것일까
깨고 나면 나는 더 억울해지지만

이윽고 꿈에서나마 선선히
다리가 되어주지 못한 일이 서글퍼진다

신경림 시인
신경림 시인

고 신경림 선생님을 애도하며 선생의 시 〈다리〉를 읽었다. ‘2024’

신경림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선생을 추모하는 물결은 짙고 깊다. 선생은 큰 별로, 스승으로, 바르고 옳은 길을 걸어오신 분이다. 우리는 모두 시대의 스승이 돌아가셨다고 입을 모은다. 선생이 지향했던 삶의 사실적 묘사는 그렇게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되었다. 아래 글은 선생과의 인터뷰 때 적은 글이다. 원문을 그대로 표기하는 것으로 선생의 영전에 고개 숙인다.

“신경림 선생님 감사했습니다.”

손현숙, 우찬제 시인이 펴낸 『시인박물관』 표지. 신경림 시인도 수록돼 있다.

그림자 앞의 햇빛

선하고 뜨거운 무엇을 만지듯, 선구자가 도래할 때 소문부터 퍼지듯, 시인을 만나러 가는 내 몸은 이미 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사랑이 사랑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고 나무가 나무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시인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될 수 없는 남자. 시인이 세상에서 제일 잘 어울리는 사람. 그림자 앞의 햇빛처럼. 동네어귀 느티나무 정자처럼. 늘 그 자리, 그 음성으로 우리와 함께 늙어버린 사람.

작은 키에 작은 손. 노 시인이 내미는 손을 잡는다. 이 남자 손의 감촉에서는 세월을 느낄 수 없다. 모든 것이 비워지는 듯 동시에 채워지는 듯,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집안 어디에도 다른 인기척은 없다. 사사로운 질의응답은 서로 성가실 뿐. 가지런히 정리된 3평 남짓의 서재에서는 문학과 지성은 문지대로 창작과 비평은 창비 대로 패거리 문단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듯싶었다. 모두 읽은 책인가? 우 문에 ‘아니다’ 현 답을 한다.

빠른 걸음. 명쾌한 답변. 운명과 시간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은 글뿐, 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글을 쓰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 글의 권력을 이미 맛본 사람. 약간의 두려움을 안고 그와 함께 걷는다. 시인에게 지금 누가 싸움을 걸어온다면? 느닷없는 질문에 총알처럼 튀어나오는 답변. ‘싸운다, 물러서지 않고 싸운다’ 시인에게서 투사적인 기질을 본다. 하긴 그는 일평생 우리들의 이야기를 대신 글로 써 내려갔던 유명한 싸움꾼이 아닌가! 칼집 속의 칼처럼 그가 더욱 단단해 보인다.

호기심의 화살에 찔린 내가 묻고 또 묻는다. 노년의 의미는? ‘여름날 저녁에 내리는 느닷없는 어둠’ 담담하게 말하는 시인에게서 라벤더 향의 상큼함을 본다.

역광 속에 시인이 서 있다. 카메라의 눈은 수도 없는 호기심을 보인다. 그는 한순간도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다. 많은 시인들과 많은 평론가와 많은 소설가들을 이야기한다. 모두 문자로 지은 집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무덤 속의 관만큼 엄격하고 구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어린 새의 소리처럼 그들 모두 시인의 품 안에서는 맑고 높은 족속이 되나 보다. 마지막으로 내가 다시 화살을 쏜다. 독약 같은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사랑’. 시인은 불의 소리를 토하듯 ‘가슴을 서로 교환하는 것’ 딱 잘라 말한다.

- 『시인박물관』(2005년)에 수록. 현암사

제14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자 손현숙 시인이 지난 18일 부평문화사랑방에서 열린 시상식 중 수상 소감을 밝히고 있다.

◇손현숙 시인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발화의 힘』, 대학교재『마음 치유와 시』▷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제14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자 손현숙 시인이 김구용문학제 관계자 및 동료 시인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동료 시인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손현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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