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140) 책갈피, 장이지

손현숙 승인 2024.09.14 09:00 의견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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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yptonite

장이지

당신과 함께 있을 때 저는 스무살이었고 어느 날 깨어보니 서른살이 되어 있었어요 친구들이 편지를 읽어주러 왔어요 우리가 주고받은 편지를…… 시간이 저를 비눗방울 불 듯 불어댔어요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있는 것이 없었어요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바람,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한숨…… 우리는 항상 광주로 되돌아가지만 광주를 졸업할 수는 없어요 노란우산을 쓴 인파 그리고 피흘리는 소녀, 피흘리는 양곤, 블루 사이공, 꽃잎 꽃잎 사랑의 시간, 우리가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 있는 곳

장이지 시인


시집 《편지의 시대》를 읽었다. ‘2024’

시간은 무참한 것이어서 우리들은 잊으면 안 되는 것들을 모두 잊고 산다. 그리고 또 어쩌면 그 망각으로 삶은 다시 방향타를 잡는다. 그러나 절대 잊을 수 없는 무엇도 있다. 광주, 그것은 잊을 수도 잊히지도 잊어서도 안 되는 한 지점이다. 상처, 그러나 그 순간 그 공간 밖에서 당신과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수천수만의 이유들이 저들 공포와 고립과 죽음과 무모와 용기를 외면했다. 편지, 화자가 이야기하는 편지는 그래서 수신자가 없는 발신자의 고백이다. 그리고 꽃잎, “꽃잎이 지고 또 질 때는” 노래가사처럼 가족을 잃고 미쳐서 나신으로 춤을 추는 어떤 소녀의 뜨거운 모습을 상기하게 된다. 어디 이런 일이 우리에게만 있을 것인가, 시인은 오늘 “우리가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 있는 곳”으로 편지를 쓴다. 그것은 참회여도 괜찮고 회한이어도 좋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우리는 항상 광주로 되돌아가지만 광주를 졸업할 수는 없”다는 것을.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멀어도 걷는 사람》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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