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래 시인이 읽어주는 좋은 시(61),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이화은

조승래 승인 2024.10.24 09:00 의견 0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

이 화 은

왕이었던 자가 왕을 벗어도
왕관의 무게는 평생 벗지 못한다는데
나도 모르는 새 나도 왕이 되었다

목이 무거워 견딜 수가 없다
조금만 고개를 숙여도 통증이 발광한다
의사는 아무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말라는데

뻣뻣이 머리를 쳐들고 미사를 보았다
신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으니
어느 거만한 왕이 살다 가셨나

돌아보면 밥도 왕이었고 꽃도 왕이었다
가난도 왕이었고 청춘도 왕이었다
시도 사랑도 왕이었다

폭군이었다

나는 그들의 충직한 백성이었고 신하였고 졸개였다
빛나는 왕관의 그늘에서 대대손손
목을 꺾고 살기를 원했는데
그 왕들은 다 어디로 흘러갔을까

지금은 통증이 어설픈 왕 노릇을 한다

낭만도 품위도 권위도 없는 왕의 눈치를 보며
매일매일 반역을 꿈꾼다
요즘 내가 살아야 할 유일한 이유다

- 순수문학계간 문파 MUNPA 69호, 문파문학사

시 해설

‘왕관의 무게는 평생 벗지 못한다는데 나도 모르는 새 나도 왕이 되’어 ‘목이 무거워 견딜 수가 없’는 시인은 ‘아무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말라는’ 의사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다. 목 디스크인지 목 힘줄 손상인지 조금만 고개를 숙여도 통증이 대단하게 느껴지는 환자이다. 미사를 볼 때에도 고개를 숙이지 않아야 통증이 덜하므로 신과 마주 본다고 하지만 고개를 든다고 왕이 된 것은 아닐 것임을 많은 왕들을 겪어보며 알았다.

밥, 꽃, 가난, 청춘, 시와 사랑도 당당한 왕이었기에 고개를 숙였던 삶이었다. 그들은 폭군이었고 시인은 ‘그들의 충직한 백성이었고 신하였고 졸개였’음이 좋았다. 무리하게 맞서기보다는 살짝 숙이고 겸손하게 살면 ‘대대손손’ 이룰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 왕들은 다 어디로 흘러갔을까’, 시간을 따라가다가 남겨진 시인에게 ‘통증이 어설픈 왕 노릇’ 하는 지금, 이놈의 왕을 과연 섬겨야 하는가,

‘낭만도 품위도 권위도 없는 왕의 눈치를 보며’ 아프지 않으려고 ‘매일매일 반역을 꿈’꾸며 통증에서 벗어나고자 몰입하는 이것이 ‘요즘 내가 살아야 할 유일한 이유’라고 한다. 꽃송이 왕관 쓰고 있던 꽃대도 결국 고개를 꺾으니 순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을 시인이 말하고 있다. 목이 튼튼한 기린도 고개를 숙여야만 물을 마실 수 있다.

조승래 시인

◇ 조승래 시인은

한국타이어 상무이사, 단국대학교 상경대학 겸임교수(경영학박사)를 했고,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이사, 문학의 집 서울 이사, 계간문예작가회 부회장, (구)포에지창원 '시향문학회' 회장, 가락문학회, 시와시학회, 함안문인회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취미생활로는 검도를 하고 있다(4단. 대한검도회 영무검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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