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수천만의 미국인들은 TV 저녁 뉴스에서 너무나 체력이 약해져서 걷지 못하는 소를, 도축하여 식육으로 가공하는 죽음의 도축장 쪽으로 몰아가기 위해 발길로 차고, 전류가 흐르는 봉棒으로 전기 충격을 주고, 막대기로 눈을 찌르고, 지게차로 이리저리 밀고 다니는 모습을 촬영한 비밀 비디오 영상을 두려움과 의혹의 눈으로 지켜보았다.
이 비디오 영상은 캘리포니아 주 치노Chino 소재 웨스트랜드/홀마크 도축장에서 촬영된 것이었다. 도축장은 최신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대규모 시설로, 전국학교급식프로그램(National School Lunch Program)에 식육을 제공하는 주요 공급원이며, 후미진 농촌 지역이 아니라 로스앤젤레스 중심부에서 불과 50여 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비디오 방영을 계기로 미국 역사상 최대의 쇠고기 리콜 사태가 벌어졌다. 걷지 못하는 쇠고기를 먹을 경우 사람들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 병든 소의 안면에 전기 쇼크를 가하고, 두들겨 패고, 지게차로 밀어붙이는 모습을 촬영당한 축사 관리자인 다니엘 우가트 나바로는 동물 학대 명목의 고발에 대해 변론을 한 후,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고 다만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 물론 우가트의 행위는 비열하긴 했다. 하지만 우리의 동물 처우 방식의 배경을 이루는 윤리와 법률은 더욱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사람들이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생물을 먹으려 하고, 가능한 한 값이 가장 싼 고기를 제공하려는 경쟁이 있을 경우, 관련 시스템은 이러한 수요를 충족시키는 사람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우가트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을 따름이다. 미국 인도주의협회 소속의 한 조사자가 그의 행위를 비밀리에 촬영한 불행-그에게나 웨스트랜드/홀마크사에게-만 없었다면, 우가트는 고용주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하여 계속 효과적으로 작업을 했을 것이다.
이 비디오와 동물 학대를 비밀리에 촬영한 다른 비디오들을 통해 촉발된 증오감이 널리 확산되었다는 사실은 미국에서 대규모의, 제도화된 동물 학대가 계속 이어지는 이유가 사람들이 동물에게 무관심해서라기보다는 동물이 처해 있는 상황을 모르기 때문임을 시사하고 있다. -피터 싱어(김성한 옮김)/『동물 해방』/2009년판 서문-
나는 ‘동물권 옹호론자’가 아니다. 동물 애호가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맨돌이를 좋아한다. 맨돌이도 나를 좋아한다. 방문을 열고 나가면, 맨돌이는 배를 드러내고 길게 모로 누워 양지에서 해바라기를 하면서 꼬리를 살랑인다. 내가 눈길을 보내 관심을 보이면, 금세 달려와 뒷발로 서서 안기며, 닥치는 대로 핥으며 세게 꼬리를 치면서 애정을 표현한다.
나 또한 맨돌이의 애정 표현에는 반드시 애정으로 화답을 한다. 의식적으로라도 머리를 두 손으로 지압하듯 주물러주고, 몸뚱이를 네 손가락으로 긁어주고, 특히 정수리 부분을 집게손가락으로 한동안 부드럽게 긁어준다. 그러면 맨돌이는 좋아서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꼬리만 살랑이며 가만히 있는다. 얼마 동안 내 애정을 전달하고 나서는 꼭 수돗가로 가서 손을 씻는다.
개와 애정을 교환하며 같이 먹고 같이 산다는 것과 ‘동물 애호’와는 거리가 멀다. 지난여름 아랫동네 친구는 집 뒤란의 대나무밭을 정리하고 그 자리에 정원을 조성하려 했다. 그러려면 먼저 대나무를 쳐내야 한다. 대나무 쳐내는 작업을 같이했다. 베어낸 대나무는 친구 트럭으로 내 집으로 가져왔다. 겨울 난방용 땔감으로 쓰려는 심산에서다.
그 대나무 땔감 덕분에 요즘 내 서재 방바닥은 종일 따뜻하다. 대나무를 땔감으로 쓸 때는 먼저 두 자 길이로 토막을 낸다. 그리고 그 토막도 마디 사이에 빈 공간이 있으므로 바로 아궁이에 넣으면, ‘뻥 뻥’하고 무섭게 폭발하므로 먼저 망치로 마디를 두드려 짜개야 한다.
대나무 토막을 모루로 삼는 벽돌 위에 올려놓고 망치로 두드려 짜갤 때, 난처한 일이 발생할 때가 더러 있다. 대나무 속에 개미떼가 거처로 삼은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대나무가 짜개지면, 개미떼가 뭉텅 쏟아져 나온다. 대나무 속에 붙어 있는 놈도 많다. 기온이 제법 내려가서인지는 몰라도 여름에서처럼 재빠르지도 못하고, 아주 굼뜨다.
그 짜갠 대나무 토막을 불로 벌겋게 달은 아궁이에 바로 넣거나, 작업을 계속하여 벽돌 위에 다른 대나무 토막을 올려놓고 망치로 두드리면, 개미는 타서 죽거나 맞아죽거나 깔려죽는다. 나는 작업을 멈춘다. 벽돌 위를 빗자루로 가만히 쓸고, 한두 발짝 옮겨 개미가 떨어져 나가라고 대나무 조각을 땅에 탁탁 친다. 그렇다고 내가 ‘개미 애호가’는 아니다.
무더위 피하려 동네 앞 시냇물에 멱 감으려 나가곤 했다. 물장구 치고 놀 수는 없는 노릇이라, 심심풀이로 수경 쓰고 다슬기를 주었다. 무자맥질하며 30분쯤 주우면 반 되 가량 된다. 집에 가져와서 상수도물에 서너 시간 담가 놓으면 해감이 빠져나간다. 그리고 삶으면 국물이 재첩국보다 시원하다. 알맹이는 바늘로 뽑아먹으면 그 맛도 괜찮다.
매일 멱 감으러 나가고 매일 주워 오니, 다슬기가 처치 곤란이다. 해감 토해내라고 상수도물에 담가놓은 어제 것 그제 것이 그대로 있다. 이웃에 주려해도 별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 하여 하루는 습관적으로 주운 다슬기를 물 밖으로 나서기 전에 다시 시냇물에 뿌려주었다. ‘생명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하는가!’ 재작년의 일이다.
작년과 올해 여름에는 냇물에 나가도 다슬기를 줍지 않았다. ‘먹는 이익 vs 수백 다슬기 생명 박탈’ 간에 균형을 맞출 수 없기 때문이었다. 40~50년 전 중고 시절, 폐결핵에 걸린 내 친구들 중 부잣집 자식은 누렁이(개)를 잡아먹었고, 가난한 집 아들은 뱀을 잡아 푹 고아먹었다. 폐결핵에는 고단백 영양식이 필요하다. 어느 쪽을 먹었든 다 건강을 회복했다.
나 역시 그때 그 상황이었다면, 아무 거부감 없이 누렁이를 잡아먹든 뱀을 잡아먹든 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슬기 즙이 간에 좋다고 한다. 간경변증이 있는 사람들이 일부러 동네 시냇물에 다슬기 주우러 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도 간이 나쁘다는 진단을 받았으면, 매일같이 다슬기를 주워, 주운 족족 삶아 먹든 ‘엑기스’를 내 먹든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게 별 이익도 없는데, 개든 뱀이든 개미든 다슬기든, 생명을 뺏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인간/자연을 대립시킨다. 인간이 주체이고 자연은 객체이다. 자연을 인간을 위한 약탈 대상으로 삼는다. 웃기는 ‘소리’이다. 인간은 자연에 포함된 한 부분일 뿐이다. ‘동물 애호’란 말은 인간의 ‘종차별적’ 특권의식과 무식한 오만이 깃들어 있다. 인간도 동물, 좀 특별한 동물일 뿐이다.
애정을 주고받는다고 해서 나는 맨돌이를 반려견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맨돌이는 나의 반려가 아니다. 이런 저런 시절인연에 의해 삶을 공유하게 되었을 뿐이다. 나는 그의 먹이를 책임지고 보호자가 되고, 그는 내 거처의 파수꾼 역할을 하고 재롱으로 기쁨을 준다. 상황에 따른 이익의 합치이다. 상황이 변해 이해관계가 바뀌면 맨돌이와 나의 관계가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개미에게든 다슬기에게든 그리고 맨돌이에게든, 내가 진심으로 대하는 건, ‘생명에 대한 예의’ 때문이다. 개미든 다슬기든 맨돌이든, 그리는 나를 포함한 인간이든, 모두가 한 생명일 뿐이다. 우주 차원에서 그리고 지구 역사 차원에서 보면, 별스런 차이가 없다.
개미와 다슬기와는 달리, 반려견과는 애정의 교류로 묶여 있으니 ‘생명에 대한 예의’에도 계층이 있는 게 아닌가, 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애정의 정체’는 무엇인가?
계층이 있다는 주장을 일단 받아들이면, 반려견과의 애정보다 한 단계 위인 남녀 간의 사랑은 어떠한가? 생명에 대한 예의보다 더 구체적인 ‘상대의 인격에 대한 예의’ 이상의 것이 있을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고지순한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는가? 그 사랑은 ‘허구’에 기반한 무지개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무지개는 결코 우리가 손으로 잡을 수 없다.
우리는 대체로 진실이란 거추장스런 옷을 입기 싫어한다. 우리 바람에 잘 맞추어진 기성복인 ‘허구’라는 옷을 입고 편안하게 살아가려 한다. 하기사 편하게 살기만 하면 장땡이지, 진실 따위가 무슨 대수이랴!
마는, 다음의 ‘장자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쯤은 음미해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장자가 죽음을 맞으려고 했다. 제자들이 후하게 장사 지내려 했으나,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늘과 땅으로 관곽(棺槨)을 삼고, 해와 달로 한 쌍의 큰 옥으로 삼으며, 성신(星辰)으로써 아름답게 장식하는 구슬로 삼고, 만물로 부장품을 삼을 것이다. 이것으로 내 장사 채비는 전부 갖춰진 것이 아닌가. 이 위에 뭘 더 덧붙인단 말이냐?”
이에 제자들이 말했다.
“저희들은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의 유체를 쪼아 먹을까 두려워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자 장자가 말했다.
“땅에 있으면 까마귀나 솔개가 먹고, 땅 속에 있으면 땅벌레나 개미가 먹는 것인데, 그것은 저쪽에서 빼앗아다가 이쪽에 주자고 하니, 어찌 편벽되지 아니한가!” -장자/잡편/열어구-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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