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연 박사의 뇌과학으로 풀어보는 생태유아교육】(14)내 마음대로 세상을 만드는 재미, 물모래놀이

임지연 승인 2024.11.23 11:06 | 최종 수정 2024.11.23 11:49 의견 0

<차례>

1. 우리 아이 잘 자라고 있나요?
2. 7세까지 아이의 뇌는 어떻게 배우고 자라는가?
3. 아이들은 논다 : 뇌가 좋아하는 놀이
4. 아이들은 표현한다 : 만들고 그리고 이야기하며 발달하는 뇌
5. 아이들은 일상을 반복하다 : 뇌 발달을 보장하는 하루 일과
6. 아이들은 공간과 호흡한다 : 뇌발달을 지원하는 환경
7. 대한민국에서 지혜로운 부모 되기

[픽사베이]

#14. 내 마음대로 세상을 만드는 재미, 물모래놀이

대한민국 아이들에게만 낯선 물모래놀이

아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놀이가 있다. 흙이나 모래, 물, 그리고 불이다. 그래서 어느 나라의 유아교육기관이나 아이들 놀이에 물과 모래를 적극적으로 제공한다. 그런데 유독 대한민국에서만은 물모래놀이가 천대받고 있다.

2010년대 초쯤이었다. 동네 곳곳의 놀이터와 유아교육기관의 놀이터에서 모랫바닥이 서서히 우레탄 바닥으로 교체되기 시작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전국에서 모래놀이가 가능한 놀이터를 찾기는 하늘의 별따기가 되었다. 영유아교육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아직도 이 급격한 변화의 배경이 의문스럽다. 아파트나 놀이터 시공업자들의 요구였을까? 아니면 아파트 입주민들의 요구였을까? 어쨌든 관련 정책과 제도의 뒷받침과 유아교육 관계자들은 무관심 속에서 이러한 변화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흙먼지가 날리는 모래보다 우레탄 바닥이 위생적이고 관리상 편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그렇게 십수 년 만에 흙이나 모래는 낯설고 더러운 것이 되었다. 이제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물모래놀이는 아주 특별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되었다. 일단 기관 내부나 주변에 모래놀이터가 부족하거나 아예 없고, 있더라도 부모님이 아이들의 모래놀이를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사들은 진흙으로 범벅이 될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젓는다. 항의할 부모님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는 것이다.

[픽사베이]

‘창작 본능’을 충족시켜주는 최고의 놀잇감, 물과 모래

이런 부모와 교사의 마음과 상관없이 아이들은 물모래놀이를 좋아한다. 물모래 놀이의 재미를 맛본 아이들은 매일매일 올해도, 내년에도 계속해서 물모래놀이를 하려고 한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는 교육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법이다.

아이들이 물모래 놀이를 반복해도 지루해하지 않는 이유는 그 반복 속에서 아이는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창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창작 본능’이 있다. 대상을 내 의도대로 바꾸고 싶어 한다. 내 맘대로 무엇인가를 변화시키고 바꿀 때 얻는 쾌감이 있다. 특히 영유아기 아이들은 창작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고 동시에 대소근육의 조절 능력이 발달한다. ‘창작’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생기는 목적의식과 의지, 집중력, 손발의 움직임, 이 모든 것이 뇌 발달로 이어진다.

모래와 물은 아이의 창작 본능을 충족하는 매우 적절한 소재이다. 물과 모래의 가소성과 안전성 때문이다. 아이의 ‘창작’은 혼자서 했을 때 의미가 있고 필연적으로 여러 시도와 실패가 뒤따른다. 모래와 물은 어른이 도와주지 않아도 아이 혼자서 아무렇게나 사용해도 안전하고 아이의 서툴고 작은 힘으로도 변형이 가능하다. 물모래는 삽으로 퍼서 그릇에 담을 수도 있고 물모래를 섞으면 다양한 요리도 할 수 있다. 모래로 산이나 성을 만들고 물길을 만들 수도 댐, 흙공을 만들 수도 있다. 적당히 촉촉해진 흙의 점성 때문이다.

언제든 마음에 안들면 무너뜨리고 다시 만들 수도 있어 실패에 대한 부담이 없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도전도 할 수 있다. 넓은 모래놀이터는 아이가 구상하는 조작의 세계를 더 넓고 다양하게 실현해 준다. 상상력과 창의력의 스케일도 커지고 도전 의지도 강해진다.

반면, 아이들이 마트에서 사달라고 조르는 박스에 포장된 플라스틱 놀잇감들을 떠올려보라. 손가락으로 버튼 하나만 누르면 소리가 나거나 무언가 툭 하고 나온다. 아이가 하는 ‘창작’의 범위를 생각해 보라. 버튼 누르고 빤히 쳐다보는 것이다. 플라스틱 놀잇감은 대개 기능과 형태가 정해져 있어 아이의 힘으로 뜯었다 붙였다 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 많은 놀잇감들이 얼마 지나고 나면 아이들에게서 외면받는다.

[earth]

면역력을 키워주는 놀잇감, 흙

최신 연구들은 흙의 또다른 가치를 알려주고 있다. 학자들은 어릴 때부터 흙이나 모래를 많이 접한 아이일 수록 알레르기와 같은 자가면역질환, 천식, 우울증과 불안, 스트레스 등의 질병에 강해진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영국의 미생물학자 그레햄(Graham A. W. Rook) 박사는 이를 '오래된 친구 가설'(old-friend hypothesis)로 소개한다. 체내에 사는 미생물군(microbiome)은 간이나 신장만큼 중요한 기관으로 면역에 관여하는데, 인간의 면역체계는 일종의 학습 장치라서 생후 다양한 데이터를 입력해야 제대로 기능을 한다고 한다. 따라서 아이의 면역체계는 생후 몇 년간 타인이나 자연환경과의 접촉을 통해 다양한 미생물에 노출되어 다양한 정보를 입력해야 하는데, 이러한 입력이 부족하거나 부적절하면 면역체계 조절에 문제가 생긴다. 즉, 인체에 해로운 유기체뿐만 아니라 무해한 공격에도 반응하여 꽃가루나 먼지, 알레르기 등의 면역질환이 일어날 수 있다. ‘오래된 친구 가설’이란 한마디로, 어릴 때부터 함께하는 ‘오래된 미생물 친구’가 많아야 아이가 건강해진다는 이론이다.

한편, 흙과의 접촉이 행복감을 높이고 우울증과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 준다는 연구도 있다. 미국 콜로라도 대학의 크리스토퍼(Christopher A. Lowry) 박사와 연구팀은 흙에서 쉽게 발견되는 세균인 마이코박테리움 박케(Mycobacterium vaccae)에 노출된 쥐의 뇌에서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이 더 많이 분비되었고 만성적인 스트레스에 대한 회복 효과도 촉진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어릴 때 흙을 많이 만지고 접해야 면역력이 강해진다는 결론이다.

버섯마을을 만들고 있는 아이들 [해운대아이랑어린이집 제공]

탄소중립을 실천하는 친환경 놀잇감, 물모래놀이

기후 위기 시대에 물모래놀이가 가진 최고의 장점은 바로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친환경 놀이라는 점이다. 영유아기 몇 년만 가지고 놀다 버려지는 수많은 플라스틱 놀잇감들이 집집마다 거실과 창고를 가득 메우고 있다. 생산과 유통과정에서 엄청난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버려진 다음에는 수백 년을 썩지 않는 환경쓰레기가 되는 플라스틱 놀잇감들. 그러나 물모래는 다르다. 생산과정에서도 지구를 오염시키지 않으며 언제든 재사용할 수 있어 쓰레기가 없다. 덤으로 미세플라스틱과 환경호르몬의 위험에서 자유롭다.

유치원 담장 위에 모셔둔 아이들이 만든 흙공 [해돋이유치원 제공]

모래놀이터에서 아이는 자기 세상을 ‘창작’하는 재미를 맛본다

요즘은 보기 어렵지만, 신나게 물모래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보면 묘한 공통점이 있다. 쪼그리고 앉아서 깨작깨작 놀던 아이가 어느새 바닥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있다. 조금 있으면 신발을 벗고 맨발로 놀기 시작한다. 동글동글, 반질반질 흙공을 만들어 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 ‘놀이에 한껏 물이 올랐구나’ 알 수 있다. 손이 지저분해지는지 옷에 흙이 묻는지 따위는 상관없다. 온 정신이 이 순간 내가 만들고 있는 흙공이나 산과 강, 터널과 댐에 가 있을 뿐이다. 열심히 만든 멋진 흙공이 어쩌다 부서지기라도 하면 하늘이 무너진 듯 울음을 터뜨린다.

흙공 따위 열심히 만들어서 어디다 쓰냐 할지 모른다. 아니다. 아이는 흙공을 만드는 그 에너지와 집중력으로 다른 일도 한다. 흙공을 대하는 태도가 그 아이가 삶을 대하는 태도이다. 아이들은 모래놀이터에서 자기만의 세상을 ‘창작’하는 연습을 한다. 내 의지대로 내가 그린 세상을 내 손으로 만들어보는 ‘재미’를 맛본다. 그러니 물모래놀이터를 열심히 찾아서 마음껏 경험 시켜주자. 세상을 살아가는 재미와 열정을 알아갈 기회를 주자.

<참고문헌>

- Amoroso M, Böttcher A, Lowry CA, Langgartner D, Reber SO. Subcutaneous Mycobacterium vaccae promotes resilience in a mouse model of chronic psychosocial stress when administered prior to or during psychosocial stress. Brain Behav Immun. 2020 Jul;87:309-317.

- Rook GAW. The old friends hypothesis: evolution, immunoregulation and essential microbial inputs. Front Allergy. 2023 Sep 12;4:1220481.

임지연 박사

◇ 임지연

▷(사)한국생태유아교육연구소(https://www.ecoikium.org/) 소장
▷서울시 생태친화보육사업 컨설턴트
▷대구교육대학교 생태유아교육 강사
▷호치민시 한국학교 유치원 교사
▷부산대 유아교육학과 학사/석사
▷일본 오차노미즈여자대학 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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