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산티아고 순례 이야기(15) 14일차 -부르고스에서 하루 휴식

오늘 부르고스서 혼자 더 쉬기로 
티토·가브리엘·모니카에게 포옹 인사
부르고스대성당 세계문화유산 지정
중세 엘 시드 고향, 프랑코 초기본부
대성당 들어가 엘 시드 무덤 구경
한국 식당서 김치찌개·제육볶음 먹음

조해훈 승인 2024.12.13 12:08 | 최종 수정 2024.12.13 12:12 의견 0

오늘은 2024년 10월 31일이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씻고 배낭을 꾸린 후 티토의 침대로 갔다. 필자의 침대는 2층 안쪽에 있었으나 티토의 침대는 입구 쪽에 있었다. 티토는 배낭을 꾸리고 있었다. 필자는 티토에게 머뭇거리다 “티토, 대단히 미안하지만 저는 부르고스에서 더 머물 생각입니다. 함께 떠나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티토는 약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괜찮습니다. 좋은 시간 가지십시오.”라며, 포옹을 해 주었다. 티토의 침대와 필자의 침대 가운데 위치쯤에 있는 가브리엘에게도 가 같은 말을 했다. 가브리엘 역시 필자를 포옹하면서 “뷰엔 까미노!”라고 말했다. 모니카에게도 가 같은 말을 했다. 그녀 역시 포옹을 해 주었다. 아무 조건 없이 필자에게 잘해준 벗들인데 혼자 남으려니 돼 참으로 미안했다.

부르고스 대성당 앞에 선 필자. [사진= 다른 순례자]

배낭을 꾸려 1층 접수처로 가 주인 할머니께 “하루 더 머물러도 됩니까?”라고 물으니, “대신에 지금 나갔다가 오후에 들어오세요.”라고 하셨다. 배낭을 입구 구석에 두고 나왔다. 다시 벗들과 알베르게 입구에서 인사를 했다. 벗들은 떠났다. 마음이 너무 섭섭하여 알베르게 앞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한잔 마셨다. 그런 다음 부르고스 대성당쪽이 아니라 반대 방향의 주택가로 걸었다. 조용한 카페로 가 신문을 읽고 글도 쓰면서 쉴 참이었다. 오전 9시가 다 되었다. 마치 카페 하나가 문을 열고 있었다. 들어가 커피를 주문하면서 계산기 옆에 놓여있는 신문을 흘낏 보았다. 1면에 스페인 남동부지방의 홍수 피해 사진이 크게 실려 있었다. 차량이 비에 휩쓸려 겹겹이 포개져 있는 사진이었다. 한 달 내릴 양의 비가 하루 만에 쏟아져 인명 피해도 크다고 했다.

스페인 신문 1면에 난 홍수 피해 사진. 차량들이 뒤엉켜 있다. [사진= 조해훈]


부르고스 대성당 인근 광장. [사진= 조해훈]

커피를 들고 구석 자리로 가 앉았다. 오늘은 걷지 않는다. 휴가를 얻은 느낌이다. 순례길의 종착지인 콤포스텔라 성당까지 3분의 1 이상을 걸었으니, 필자뿐 아니라 피곤하지 않은 순례자가 없을 것이다. 순례 첫날부터 심신이 고달팠던 필자는 지금 휴식을 갖지 않으면 곤란할 정도였다. 마음 같아서는 알베르게에 종일 누워 심신을 충전하고 싶으나 알베르게의 규정상 오전 8시면 무조건 나와 오후 2시쯤 들어갈 수 있다. 또한 역사적인 이야기가 많은 도시인 데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부르고스 대성당(Burgos Cathedral)을 비롯해 여러 문화유적이 있는 곳이어서 그 속에서 하루 푹 빠져 있고 싶은 생각에서 혼자 남은 것이다. 또 하나 있다. 어제 오후에 한국 식당에 갔으나 먹지 못한 김치찌개를 먹을 생각이다.

부르고스 대성당과 엘 시드 동상을 연결하는 다리. [사진= 조해훈]

카페 앞에 빵을 공급해 주는 차가 와 바게트 등 여러 빵을 들여다 주고 갔다. 산티아고 길의 그 많은 카페는 모두 빵을 공급받아 순례자와 주민들에게 파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카페마다 파는 빵이 거의 같았다. 인근 주민들이 집에서 먹을 요량으로 바게트를 많이 사갔다. 필자의 옆자리에 아이들이 딸린 가족이 와 빵 등을 먹었다. 아마 늦잠을 자고 와 아침을 먹는 것 같았다. 오전 11시 조금 넘어 카페에서 나왔다. 그리곤 대성당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주민들과 순례자, 관광객들이 섞여 성당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다.

부르고스 대성당에 있는 엘 시드의 묘. [사진= 조해훈]

성당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다. 스페인 사람들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중세(中世) ‘엘 시드(El Cid)’ 장군의 무덤을 볼 생각에서였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그의 무덤은 대성당 중앙에 있었다. 바닥에 무덤을 알리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밟지 말라고 주변엔 펜스를 쳐놓았다. 그의 무덤과 대성당 내부를 둘러보고 광장으로 나왔다.

부르고스 교구의 주교좌 성당인 이 대성당은 1984년에 스페인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대성당은 1221년에 짓기 시작하여 1567년에 완공했다. 4세기 동안 건축된 것이다. 부르고스 대성당은 스페인에서 세비야·톨레도에 이어서 세 번째로 큰 규모다. 게다가 스페인의 고딕 양식 건축물 중 가장 빼어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부르고스 시가지. [사진= 조해훈]

부르고스는 스페인 중북부 카스티야 레온 지방 부르고스주(州)의 주도(州都)로, 아를란손 강 유역에 있다. 도시가 평지처럼 보여도 해발 800m 이상의 높이다. 평균 고도는 856m이다. 마드리드에서 북쪽으로 200여km, 레온에서 동쪽으로 100km, 바야돌리드에서 동북으로 80km, 팜플로나에서 서쪽으로 120km, 빌바오에서 서남쪽으로 90km 떨어져 있다. 고대부터 켈트족의 취락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9세기 말 아스투리아스 왕국에 의해 요새 도시가 건설되었다. 초기 레콩키스타(Reconquèsta)의 군사적 근거지가 되었다. 레콩키스타는 711~1492년까지 780년 동안 에스파냐의 그리스도교도가 이슬람교도에 대하여 벌인 실지 회복 운동을 말한다. 11세기에는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엘 시드 동상. [사진= 조해훈]

대성당을 나와 산페르난도 광장을 지나 약간 왼쪽으로 틀면 대성당과 바깥을 연결하는 산타마리아 아치형 출입구가 있다. 이곳을 통해 나가면 강보다는 작은 개울 위의 다리를 만난다. 아를란손 하천(Rio Arlanzon)이다. 그 위의 산타마리아 다리를 지나 좌회전해 조금 가다 횡단보도를 건넌다. 오른쪽 마오 시드 광장에 엘 시드 장군의 동상이 크게 서 있다. 부르고스 출신으로 ‘엘 시드’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 길을 따라 비스듬히 가다 우회전을 해 가면 오른쪽에 ‘소풍2’라는 자그마한 한국 식당 간판이 보인다.

엘 시드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겠다. 스페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인물인 엘 시드의 본명은 로드리고 디아츠 데 비바르(Rodrigo Díaz de Vivar)이다. 스페인 국토회복운동인 레콩키스타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스페인의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는 그는 카스티야 왕국의 귀족이자 장군이었으며 발렌시아를 정복한 통치자였다. 발렌시아에서 엘 시드는 아내인 도냐 히메나(Dona Jimena)와 함께 5년 동안 살았지만 1099년 무라비트 왕조가 결국 발렌시아로 쳐들어왔고 6월 10일 결국 전투 도중 심장에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그의 죽음으로 발렌시아군은 사기를 잃고 발렌시아는 함락당했다. 1101년, 그의 아내 히메나 디아스는 수행원들과 함께 엘 시드의 시신을 운구하여 부르고스로 피난했다. 원래 카스티야의 산 페드로 데 카르데냐 수도원에 묻혀 있던 그의 시신은 현재 부르고스 대성당 가운데에 묻혀 있다. 그의 유해는 1919년 아내의 유해와 함께 부르고스 대성당의 중앙에 안치돼 있다. 그이 무용담을 담은 서사시 ‘엘 시드의 노래’(Cantar de mio Cid)sms 카스티야어로 된 최초의 작품이자 스페인 문학의 효시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또 ‘엘 시드 (El Cid)’라는 제목으로 1961년 12월에 그의 일생을 다룬 영화도 개봉됐다. 찰턴 헤스턴과 소피아 로렌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다.

엘 시드 영화포스터. [출처= 위키백과사전]

게다가 부르고스는 스페인 내전의 시작 이후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초기 정부(1936~1939)의 본부가 된 곳이다. 1936년 7월 부르고스는 스페인 내란 중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민족주의 정부의 공식적인 소재지가 되었으며, 마드리드와 바스크 지방을 상대로 한 작전기지가 되었다. 스페인 내전은 1936년 7월 17일 프랑코가 모로코인 용병을 포함한 자신의 직속 군대를 이끌고 공산주의 정부인 인민전선 정부에 반대해 군사반란을 일으켜 일어났다. 내전에서 승리한 그는 국민 정부의 주석 및 군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독일의 히틀러와·이탈리아 무솔리니의 도움으로 1939년 수도 마드리드를 함락시켰다. 이후 1975년 82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38년간 독재자로 군림했다.

어제 오후에 구글 지도를 보며 한국 식당에 가 봤기 때문에 오늘은 지도 없이 그냥 걸어도 길을 알 수 있었다. 식당에 도착하니 낮 12시 조금 못 되었다. 식당은 지하에 있다. 입구로 들어가니 어제 보지 못한 한국인 여성이 “12시 되면 오세요.”라고 말했다. 그때 주방에서 나오던 주인아주머니가 “어제 오신 분이네요. 들어오세요.”라며,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부르고스 한국 식당에서 먹은 김치찌개와 밥. [사진= 조해훈]

김치찌개와 밥을 주문했다. 산티아고에 와 처음 먹는 우리나라 음식이었다. 필자는 “김치찌개와 밥을 먹으니 좀 살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다 먹고 나니 배가 불렀다. 홀에 있던 한국 여자분이 “제육볶음도 드셔 보세요. 한국 손님들 그렇게 많이 드세요.”라고 말했다. ‘배가 부른데 먹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네, 그것도 주세요.”라며 주문했다. 스페인의 돼지고기는 맛있기로 유명하다. 제육볶음까지 먹으니 배가 불러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수고하십시오.”라고 말한 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인근에 있는 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내일 빌바오로 가는 버스표와 돌아오는 버스표를 예매하기 위함이었다. 내일 11월 1일 오전 8시 30분에 이곳에서 출발하여, 오후 6시에 빌바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버스표를 예매했다.

버스터미널에서 나와 엘 시드 동상 인근의 카페에 들어갔다. “와이파이 됩니까?”라고 물으니, 주인은 “와이파이 됩니다.”라고 했다. 공립 알베르게에는 거의 와이파이가 되지 않는다. 카페도 와이파이가 되는 곳이 잘 없다. 그래서 메일을 보내야 할 때는 애를 먹는다. 오늘 하루 쉬면서 김치찌개를 먹고 커피를 마시니 몸과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창밖은 도로다. 차들이 많이 지나다닌다. 저 도로를 건너면 다리이고, 더 걸으면 대성당이 나온다. 도로와 성당 쪽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보니 주민들보다 관광객이 더 많은 것 같다. 필자는 옷차림과 표정을 보면 관광객인지 아닌지 구분이 된다.

지금 이곳은 초겨울 날씨여서 주민들은 겨울옷을 많이 입었다. 관광객들은 옷차림이 다소 간편하면서도 표정에 휴가의 느낌이 묻어난다. 주민들은 일상적인 표정이다. 물론 순례자들은 바로 티가 난다. 배낭을 메고 있다. 숙소에 배낭을 두고 온 순례자들이라도 차림이 깔끔하지 못한 데다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필자 역시 배낭을 메지 않고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주민이나 관광객이라고 보지 않는다. 바로 순례자라고 알아차린다. 등산화가 흙이 믿어 지저분한 데다 등산모자을 쓰고 있고, 바람막이 옷을 입고 있다. 게다가 얼굴은 많이 걸어 지쳐 있고 검게 그을려 있다.

계속 앉아 있으니 미안해 커피를 한 잔 더 시켰다. 피곤하기도 하고 다리도 아파 커피를 더 마시며 길을 오가는 사람들과 카페에 들어오는 손님들을 좀 더 구경할 심산이다. 오후 5시가 넘으니 조금씩 어둑해졌다. ‘여기서 저녁까지 해결하고 가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빵을 하나 주문해 먹었다. 그렇게 부르고스에서 놀면서 하루를 보내다 보니 ‘내가 부르고스에 동화(同化)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에서 오후 6시 반쯤 바깥으로 나왔다. 천천히 걸어 대성당 광장에 와 이곳저곳 둘러봤다. 대성당 인근은 바, 즉 술집 거리다. 아이러니하다. 대성당 인근에 관광객들 숙소와 순례자들의 알베르게가 많다 보니 자연스레 바들이 형성됐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바에서 간단하게 식사도 할 수 있어 손님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오후 7시 반쯤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주인 할머니가 이번에는 3층에 있는 침대를 배정해 주셨다. 아마 2층 침대가 다 찬 모양이었다. 노트북과 일기장을 갖고 1층의 식당 테이블로 갔다. “조”라며, 반기는 사람이 있었다. 포르투갈 여성 아나였다. 그곳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녀는 식재료를 사와 종종 알베르게 식당에서 조리해 식사하셨다. “어제 사립 알베르게에 주무시더니 어떻게 오늘은 여기로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 “그곳에서 이틀이나 묵기에는 부담이 좀 있었습니다. 이곳 공립 알베르게가 규모가 크고 시설이 좋다해서요.”라고 답했다. 식당에 여러 사람이 들락거렸으나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식당에 왔다갔다 하는 사람은 대부분 한국 순례자들이었다. 그렇게 식당에 좀 앉아 있다 침대로 가 옷을 벗고 씻은 후 잠을 청했다. 내일도 이 알베르게에서 하루 더 묵으며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에 다녀올 생각이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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