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산티아고 이야기(16) 15일차 -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관람

조해훈 승인 2024.12.20 11:35 의견 0
빌바오 버스터미널. 터미널 건물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다. 사진= 조해훈

버스터미널서 오전 8시 빌바오행 버스 올라
18세기 건축물 온전해 전통과 현대 공존해
네르비온 강가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 있어
건물은 물론 미술관 내부 모두가 작품 같아
1층 로비 리차드 세라 대형 철제 작품 주목
비틀어진 듯한 유명한 주비주리 다리도 구경
오후 6시 부르고스행 버스로 돌아와 숙소 가

오늘은 2024년 11월 1일이다. 부르고스 공립 알베르게에서 오전 7시에 일어나 씻고 배낭을 꾸려 1층 접수처로 내려왔다. 주인 할머니께 “오늘 하루 더 이 알베르게에서 숙박합니다. 저녁에 다시 오겠습니다.”라며, 할머니께서 지정해 주시는 구석에 배낭을 두었다. 밖으로 나오니 아직 어둑했다.

알베르게 입구에 서서 약간 어정거리는데 “조!”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포르투갈 여성 아나가 알베르게 입구를 나오면서 필자를 보고 불렀다. “아나, 저는 오늘 빌바오로 가서 구겐하임 미술관(Guggenheim Museum Bilbao)을 구경하려고 합니다.”라고 했다. 아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뷰엔 까미노!”라며, 필자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젊었을 때 무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키가 자그마하나 내공이 많은 여성이었다.

부르고스 대성당 앞을 거쳐 산타마리아 다리를 건너 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오전 8시였다. 빌바오로 가는 버스는 오전 8시 30분에 출발 예정이었다. 터미널 안에 카페가 있었다. 손님이 많아 자리가 없었다. 서서 기다리니 2인용 테이블이 하나 비었다. 그곳에 앉아 그린 티(Green Tea)를 시켜 마셨다. 차를 마시는데 역시 티를 주문한 흑인 남성이 “동석해도 됩니까?”라고 물었다. “예.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해 함께 앉아 차를 마셨다.

빌바오 시가지. 사진= 조해훈

시간이 돼 버스 타는 곳 앞에 서 있었다. 한 여성이 “빌바오 버스 타는 곳 맞습니까?”라고 물었다. 필자는 “예. 그렇습니다. 저도 빌바오에 갑니다.”라고 대답하는데 버스가 도착해 탔다. 부르고스에서 빌바오까지 버스는 2시간 걸린다. 버스는 중간에 한 번 세우고 빌바오에 도착했다. 빌바오 버스터미널 건물이 빨간색 건물로 그 자체가 미술작품이었다. 구겐하임 미술관이 있는 도시인 데다 버스를 타고 손님들이 많이 방문하다 보니 일부러 작품으로 건축한 것 같았다.

터미널 앞 도로를 건너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한잔 마셨다. 오래된 도시인 빌바오 시가지를 구경할 겸 걸어서 미술관으로 갈 생각이었다. 택시나 버스를 타면 금방 가겠지만 그러면 도시를 꼼꼼하게 볼 수 없다. 사실 빌바오에는 두 번 다시 오지 못하리란 걸 알기 때문이다. 빌바오에도 공항이 있지만 마드리드에서도 멀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시 걷는다 해도 또 오기가 쉽지 않다. 오늘처럼 하루의 시간을 온전히 별도로 잡아야 한다.

스페인의 카페는 우리나라 카페와는 달리 커피를 팔지만 와인과 맥주도 팔고, 간단한 식사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느 카페든 도심지의 카페는 북적댄다. 카페를 나와 구글 지도를 보며 걸었다. 공업도시인 빌바오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교통 중심지로 비스카야주(州)의 주도(州都)이다. 금속과 화학 공업이 발달한 도시이다.

구글 지도를 보며 걸으면서 헷갈리는 곳은 행인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외지에서 온 관광객이 많았다. “저도 빌바오는 오늘 처음입니다. 지리를 잘 모릅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도시가 상당히 컸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도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부르고스의 한국 식당에서 일을 돕는 한국 여성이 필자에게 “빌바오는 스페인에서 열 번째로 큰 도시”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오래된 건축물과 현대식 건축물이 조화롭게 혼합돼 있으면서도 안정감이 있었다. 도시가 활력이 넘쳐났다. 어느 길이나 사람이 많고 카페도 즐비했다. 산티아고 길은 스페인 북쪽인 데다 주로 산맥이어서 기온이 낮아 옷을 껴입은 상태로 왔는데 빌바오는 기온이 높았다. 길에 있는 전광판 온도계를 보니 섭씨 28도였다. 그러고 보니 반 팔 차림의 사람이 많았다. 거의 여름 날씨였다. 더워서 입고 있던 등산 재킷 2개를 다 벗었다.

아마 이 도시는 중세 이후로 그다지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지 않은 듯했다. 오래된 건축물들이 손상됨 없이 온전하게 있는 걸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유럽에서 배운 건축 기술을 우리나라에 시험 건축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서울을 비롯해 부산 등지에 유럽식 건축물을 많이 건립하지 않았던가. 예를 든다면 부산만 해도 지금은 사라진 옛 부산세관 건물·옛 부산역 건물·옛 조흥은행 건물 등이 있었다. 서울에는 더 많았다. 필자가 보았던 그런 유럽식 건물이 빌바오에 많이 남아 있었다.

빌바오 네브리온 강. 이 강어귀에서 항해를 업으로 삼던 사람들에 의해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강을 따라 올라가면 왼쪽에 구겐하임 미술관이 있다. 사진= 조해훈

천천히 빌바오의 건축물을 구경하며 길을 걸었다. 오후 1시 50분쯤에 강을 만났다. 네르비온 강이다. 빌바오는 칸타브리카 해안 인근의 항구도시이다. 빌바오는 이 강어귀에서 항해를 업으로 삼던 사람들이 형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세기 스페인 식민지 무역으로 크게 번영해 1874년 이후 산업화를 이루었다. 강 건너편에는 오래된 건축물들이 더 많이 보였다. 대부분 18세기에 건축된 건물들이다. 고딕 양식의 산티아고 대성당, 누에바 광장, 바로크 양식의 시청사 등이 대표적이다.

네브리온강 건너편 구시가지 모습. 사진= 조해훈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 쪽의 강변도로를 따라 걸었다. 이 길을 따라가면 구겐하임 미술관이 있다. 걸을수록 사람들이 더 북적댄다. 미술관이 가까워진다는 징표이다. 강변에는 작은 공원과 쉼터 등이 많다. 필자도 의자에 앉아 쉬었다. 저 앞에 독특한 다리가 강 위를 가로지르고 있다. 바스크어로 ‘하얀 다리’라는 뜻의 유명한 ‘주비주리(Zubizuri)’ 다리이다. 1997년에 처음 지어졌다. 미국의 인터넷 신문 허핑턴포스트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20선’에 포함되어 있다. 가우디 이후로 가장 스페인다운 건축물을 짓는 다는 평을 받고 있는 산티아고 칼라트라바(Santiago Calatrava)가 디자인했다고 한다. 보행자 전용 다리이다. 나선형의 철제 구조물이 비틀어진 듯 보이는데, 구겐하임 미술관의 곡선 외관과 잘 어우러진다는 평을 받는다. 빨간색 아치는 2007년 구겐하임 미술관 개관 10주년 기념으로 새로 설치한 것이다.

주비주리 다리 위의 관광객들. 사진= 조해훈

주비주리 다리를 건너지 않고 강 건너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을 보며 지나 다른 다리를 건넜다. 주비주리 다리는 미술관을 관람한 후 나오면서 걸을 생각이었다. 미술관 마당에는 무슨 대회를 하는지 젊은 사람들이 마이크로 소리를 지르며 요란스럽게 행사를 하고 있었다. 미술관 주변에는 역시나 사람들이 많았다. 입장료를 내고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1층이다.

강 왼쪽에 있는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사진 = 조해훈

첫 전시관은 요시모토 나라(yoshitomo nara)의 작품들이 선을 보이고 있었다. 1959년 생인 그는 일본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에서 태어나 아이치현립예술대학 수료 후 1988년 독일로 건너가 뒤셀도르프예술아카데미에서 수학한 현대 미술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이다. 일본 네오 팝(Neo Pop) 세대의 대표 작가로 일컬어지고 있다. 네오 팝은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 등 대중 문화에 바탕을 둔 창작활동을 하는 작가군을 지칭한다. 커다란 얼굴에 반항심 어린 표정의 소녀와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귀여운 동물들이 등장하는 그의 예술은 우리 내면에 감춰진 두려움과 고독감, 반항심, 잔인함 등을 포착하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작품들의 바탕 색상은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이었다.

미술관 광장에서 젊은이들이 행사를 갖고 있다. 사진= 조해훈

요시모토의 작품들을 관람한 후 나왔다. 로비에 독특한 대형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대형 고동색 철판들이 몇 개 있었다. 둥글게 말린 철판 안으로 들어가니 미로(迷路)였다. 작품마다 미로가 모두 달랐다. ‘하,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들은 빌바오가 스페인의 철강산업 중심지였다는 점에서 관람객들의 관심을 끄는 것 같았다. 또 이 작품들은 곡선으로 된 강철판을 사용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열리거나 닫히는 통로를 만들고, 관람객이 이 통로를 걷게 함으로써 생생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올해 3월 86세로 세상을 떠난 철골 구조물 작가 리차드 세라(Richard Serra)의 작품들로, 주제는 ’시간의 문제‘이다. 미국 동부의 디아 비컨과 글렌스톤 뮤지엄뿐 아니라 세계의 여러 박물관과 공간에도 그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조각과 공간, 그리고 관객 상호작용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에 도전하는 작품을 계속해서 선보인다는 점이다. 세라는 주로 녹슨 강철로 제작된 대규모 조각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강철을 작품의 소재로 선택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아버지가 조선소에서 일했던 경험과 세라 자신이 1960년대에 철강 공장에서 일했던 경험에 기인한다고 한다.

미술관 1층 요시모토 나라의 전시 작품들. 사진= 조해훈
1층 로비에 전시중인 리차드 세라의 대형 철제 작품인 미로로 한 관람객이 걸어들어가고 있다. 사진= 조해훈
1층 로비에 전시된 대형 철구조물 작품들. 사진= 조해훈
2층 벽에 빛이 흘러내리는 설치 작품. 사진= 조해훈

이 미술관은 3층으로 구성돼 있다. 1층 전시관에는 요시모토 마라의 작품, 로비에는 리차드 세라의 강철판 구조물이 전시돼 있다. 2층은 조각 작품, 3층은 회화작품을 전시한다고 되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니 벽에 빛이 흘러내리는 듯한 설치작품이 있다. 그리고 계단으로 오르다 보면 맞은 편에 꽃잎 모양의 큰 설치작품이 있다. 1층에서 3층까지 올라가는 계단과 엘리베이터 구조 자체가 또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건물 자체와 내부 하나하나 모두가 작품이었다.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필자의 이 글은 여행기 성격이지 미술 기사가 아니어서 작품들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쓰지는 않지만 대단한 곳이었다.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3층에 전시 중인 회화 작품들. 사진= 조해훈

3층에는 다 기억을 못할 만큼 많은 작가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일기 시작한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이다. 일부 설치물도 있었다.

작가와 작품 주제는 대충 다음과 같다. 진미셀 바스키야의 ‘모세와 이집트인’, 크리스나 이글레시아의 ‘무제(설화석고의 방)’, 안토니 타페이스의 ‘Ambrosia’, 에두아드로 차이다의 ‘깊은 것은 공기이다’를 비롯해 더 많은 작가의 작품들이 있다. 제프 쿤스의 설치물인 ‘튤립’이 눈길을 끌었다.

3층에 전시된 튤립 설치 작품. 사진= 조해훈

필자는 그동안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과 바르셀로나의 피카소미술관 등은 둘러봤으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마침내 구경할 수 있었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 명성을 잃고 쇠퇴해 가는 공업도시 빌바오 경제에 큰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니, 미술관이 빌바오를 살리고 있다고 한다.

알다시피 구겐하임 미술관은 미국 태생의 전설적인 컬렉터인 페기 구겐하임(1898~1979)에 의해 만들어졌다. 구겐하임은 탁월한 안목과 재력을 바탕으로 금세기미술 화랑을 경영하며 미국에 유럽의 모더니즘을 이식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술의 중심 무대를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은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이탈리아 베니스 구겐하임 미술관,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 있다.

대략 2시간가량 관람을 했다. 그런 후 바로 나오기가 섭섭해 미술관 내에 있는 카페에 가 커피를 한잔 마시며 천천히 오늘 본 작품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미술관 1층의 선물 가게에서 산 엽서에 큰아들과 작은아들에게 각각 글을 썼다.

미술관 바깥의 강변에 설치된 철제 거미. 사진= 조해훈

그런 다음 미술관 밖으로 나왔다. 강 쪽으로 큰 철제 거미가 있다. 이 거미는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의 상징 중 하나이다. 조금 더 걸으니 남자 한 명이 앞으로 걸어가는 동상(銅像)이 있다. 5분 정도 더 걸어 주비주리 다리에 올랐다. 다리 저쪽에서 건너와 미술관으로 가려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더 많은 사람은 유명한 이 다리를 구경하려고 올라온 것 같았다. 가족끼리, 친구들끼리 미술관과 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즐겼다. 필자는 다리를 건너 두어 시간 전에 걸어왔던 길을 걸었다. 차와 사람이 다니는, 구시가지를 연결하는 처음 건넜던 다리를 건넜다. 빌바오 시내 구경은 미술관으로 오면서 구경을 한 데다 버스를 탈 시간도 넉넉하지 않았으므로 택시를 호출해 타고 버스터미널로 갔다. 오후 6시 부르고스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부르고스로 가는 버스는 빌바오에서 만석이었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 빌바오라는 도시와 구겐하임 미술관을 다시 한번 더 회상했다.

부르고스 대성당 옆 바(Bar) 거리. 사진= 조해훈

부르고스 버스터미널에 내리니 오후 8시쯤 되었다. 터미널에서 200m쯤에 있는 한국 식당에 또 갔다. 김치찌개를 주문해 맛있게 먹은 다음 알베르게 쪽으로 걸었다. 알베르게는 대성당 뒤쪽에 있다. 대성당 광장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광장을 지나 바(Bar) 거리를 통과해 알베르게로 갔다. 바 거리에는 사람들이 북적대 어깨를 부딪치며 걸었다. 알베르게에 들어가니 밤 9시쯤 되었다. 내일부터 또 걸어야 하므로 샤워를 한 후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앞에서 필자. 사진= 관광객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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