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장편소설】 저곳 - 25. 무식과 자영

박기철 승인 2025.01.05 14:22 의견 0

저곳에서
남녀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되는
물권색
物權色

물권색 이야기가 있는 저곳의 다섯 특징

1. 일찍 들어오고 늦게 들어오고 선후배 없이 다 똑같은 동등한 존재다. 존대말 없이 서로 말을 터도 된다.

2. 살아생전에 언제 어디서 살았던 다른 지역에 대해 대충은 안다. 시공간 초월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다.

3. 이승에서의 집착을 다 비워 버려야 하지만 아직 미련이 있다. 물권색 욕망이 강한 인간의 관성 때문이다.

4. 한 방에서 이성끼리 대화하다 방이 바뀌며 이성 상대가 바뀐다. 덕분에 저곳에서의 생기가 은근히 살아난다.

5. 저곳에서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 최종 정착지가 정해진다. 그러니 저곳은 중간 경유지가 된다.

25. 무식과 자영

나는 내 이름처럼 그야말로 무식할 정도로 권력을 휘두른 자였어. 백인 흑인 황인을 망라하는 마누라가 17명이나 있었고 자식이 50명도 넘어. 그렇다고 내가 옛날 사람은 아니야. 20세기에 살던 사람이야. 나중에 권력을 잃었지만 그렇다고 비참하게 죽지도 않았어. 70대 중반에 그냥 병에 걸려 자연사로 죽었어. 내가 권력을 휘두르며 저지른 죄악에 비하면 잘 살았던 거지. 여기 와서 생각하니 나처럼 무식한 놈은 권력을 잡으면 안 돼. 나는 나 잘 먹고 잘 살 생각으로만 권력을 행사했지. 국민인 백성들 잘먹고 잘살게 해주는 거에는 1도 관심이 없었어. 관심있는 척 하기는 했지. 그런데 너 누구길래 여기서도 그리도 이쁜 거야? 나 살았을 때 너를 만났더라면 반드시 내 여러 마누라 중 하나로 삼았을 텐데.

무식한 놈, 내가 누군데 무식이 넌 그리도 건방지고 방자하단 말이냐. 어이없네. 유난이네. 특이하네. 못생겨가지고… 난 여기서만 2500여 년 동안 산 건 아니고 있었어. 나 살아생전에 너처럼 얼굴 검은 놈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나 죽고난 후에 여기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야. 네가 권력을 그토록 누렸다지만 그래서 많은 마누라를 두었다지만 내가 너 마누라 되었다면 너네 나라도 골로 갔을 거야. 역사가 평가하기를 나는 남자를 후리는 방중술의 대가이고 희대의 요부 요화 요녀 요물이고 경국지색의 음부야. 니 경국지색(傾國之色) 아나?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의 절색의 색끼를 발휘하는 음란한 여자란 뜻이야. 영어로는 팜므파탈(Femme fatal) 이라고 하지. 나로 인하여 세 명의 남편과 두 명의 임금, 그리고 한 명의 아들마저 죽었으니 난 삼부이군일자(三夫二君一子)를 멸망토록 만든 년이야. 이건 역사에 남은 기록일 뿐이고 역사에 남지 않는 또 다른 일들이 수두룩해. 나를 거쳐갔던 수많은 남성들! 참 불쌍한 놈들이야. 알고 보면... 내가 이쁘기로서니 뭘 그리 불나방같이 나한테 달려 들었을까? 그런데도 난 늙어서까지 잘 살았어.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도 도발적 요염미와 암끼의 관능미를 더해갔어. 나한테 마지막 남자로 기록된 굴무라는 사내는 나로 인해 자기 가족이 몰살당하는 비참함을 겪었으면서도 끝내 나를 가졌어. 내 나이 이미 오십이 넘었을 때야. 너도 나한테 걸렸으면 아주 그냥 골로 갔을 거야. 내 앞에서 건들대지마. 조심해.

아! 자영, 너 엄청난 여자였구나. 너 앞에서 난 깨걩할 수밖에 없네. 좋아! 잘 모실게.

대개 미녀박명(美女薄命)이라고 이쁜 여자는 팔자가 사납고 일찍 죽는다는데 나는 절대 그렇지 않았어. 나는 나를 취하려는 수많은 남자들의 투쟁 속에서 잘 살았어. 남자들은 나를 취하기 위해 그리더 사납게 싸웠지만 나한테는 부드러웠어. 나는 여러 남자들의 사랑을 받는 나의 운명을 있는 그대로 수용했어. 내 아들을 죽인 놈도 나를 취하려 했지. 나는 그 놈을 증오하기보다 그냥 수컷 남자로서 받아 들였어. 나는 또 무슨 시기나 질투도 하지 않았어. 나보다 나이 어리며 이쁜 년들을 모함하지도 않았어. 그냥 나는 나대로 이쁜 여자로서 살았어. 남자들이 보자마자 나한테 달려드는 미모에다가 밤에는 뛰어난 성적 능력으로 남자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했어. 내가 그 남자들의 양기를 빨아먹는 요녀인 줄도 모르고 남자들은 나한테 환장했지. 남자들이 나한테 그러는 거는 그냥 그저 당연한 것들이었어. 중국의 4대 미녀라는 말희 달기 포사 여희도 내 앞에서 깨갱이야. 4대 미녀인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도 나를 능가하지 못해. 난 인류사 최고의 요부야! 이런 말을 당당히 할 수 있는 여자가 또 있을까? 나 그런 년이야.

역사상 최고의 치명적 관능미로 숱한 남자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으면서도 잘 먹고 잘 산 여자

나 살아생전에 너 같은 팜므파탈을 만나지 않은 것도 다행이구나. 내 순한 마누라들은 나한테 피해를 주지 않았는데... 넌 참 나쁜 년이네. 근데 그게 네가 나쁘자고 한 것도 아니고 남자들이 그냥 얌전히 있는 너 때문에 괜히 나쁘게 되었네. 그 놈들 좀 안되었다. 어째 남자들은 그다지도 사납게 죽이고 그럴까? 자영이 네가 살 때도 그랬지만 내가 살 때도 그랬어. 내가 죽기 2년 전에는 내가 살던 나라랑 가까운 르완다란 나라에서 종족 분쟁이 있었어. 아주 끔찍했지. 1994년 100일 동안에 최소 50만 명에서 최대 100만명이 학살당했어. 후치족 투치족 간의 비참하며 참혹한 분쟁이었지.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나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는 권력에 의한 학살이었지만 르완다에서 일어났던 후치족-투치족 분쟁은 일반인 서로 간의 증오에 의한 학살이었어. 그 증오의 씨는 거기를 식민지로 점령했던 얼굴 허연 놈들이 키운 거였지. 그런데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어. 학살이 있고 난 후 6년 후에 대통령이 된 투치족 출신의 폴 카가메는 불가능할 것같았던 제노사이드 후의 혼란을 종식시켰어. 엉뚱한 사람한테가 아니라 이런 사람한테 노벨평화상을 주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야말로 카가메 대통령은 철인(哲人)이야. 플라톤이 말한 철인정치가 검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실현되었어. 그가 독재자라는 비난을 받지만 르완다는 카가메 대통령의 안정된 통치로 경제성장을 이뤄냈어. 아프리카에서 유럽보다 치안이 좋은 나라가 되었어. 비닐 봉지 사용을 법적으로 금지해서 길거리에 쓰레기가 별로 없는 깨끗한 나라가 되었어. 르완다 바로 아래에 있는 부룬디라는 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는 오명을 가지게 되었는데… 정말 대단한 르완다의 카가메 대통령이야. 박기철이라는 작자가 카가메에 대해 ‘철학과 철인; 철인정치’라는 제목의 글을 썼던데 정말로 딱이야. 그 전문을 읽어봐.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철학이란 낱말의 유래부터 살필 필요가 있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전후로 일본인들은 수천 권의 서양서적을 번역하며 수천 개의 서양 단어를 번역했다. 『일본어에서 온 우리말 어휘 5,800』이란 책에 의하면 그렇다. 고대 그리스어인 헬라어에서 유래한 ‘philosophy’는 지혜(sophy)를 좋아한다(philo)는 뜻이다. 직역하자면 호지(好知)나 애지(愛知)다. 하지만 필라소피를 번역한 니시 아마네(西周 1839~1897)는 희철학(希哲學)이라고 의역했다. 머리가 밝아지는(哲) 배움(學)을 바란다(希)는 뜻이다. 나중에 바랄 희(希)가 빠지고 철학이 되었다. 그 철학이란 단어가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철학이란 단어를 들으면 특별한 철학자들이나 하는 거 같다. 그러나 밝아지는 배움인 철학(哲學)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나 할 수 없다. 철학 서적을 많이 읽는다고, 철학 지식을 많이 안다고 철학자가 될 수 없다. 철학자란 낱말 뜻 그대로 밝아지는 배움으로 머릿속이 찬 사람이다. 머릿속이 어두우면 생각이 캄캄해진다. 몽매(蒙昧)해지니 어리석고 사리에 어둡다. 생각이 막히니 편협해지고 단편적이다. 파편적 지식만으로 비좁게 사고한다. 오로지(only) 고 거 밖에 모른다. 반면에 머릿속 어두움에서 벗어난 사람은 생각이 훤하고 환하다. 현명(賢明)해지니 어질고 사리에 밝다. 생각이 트이니 광활해지고 거시적이다. 입체적 지혜로 드넓게 사고한다. 전반적으로(over+all) 이리저리 잇고엮기에 능하니 웬만한 거는 다 잘 한다.

그래서였을까? 고대 그리스에서 플라톤은 정치도 철학자들이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저술을 남긴 그는 이것저것 섭렵한 그야말로 철학자였다. 오죽하면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이다”,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다”란 말까지 나왔을까? 그만큼 철학의 대명사가 된 플라톤은 철학자(哲學者)가 정치하는 철인(哲人) 정치를 주장했다.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민주정 위정자들과 시민들에 의한 다수결 투표로 사형선고를 받고 독배를 먹고 죽은 후다. 당시 대중의 인기에만 영합하는 포퓰리즘을 펼치는 민중선동가(demagogue)들이 설치며 합리적 이성보다 일시적 충동으로 민중을 어리석게 하는 중우정치(衆愚政治)로 아테네가 몰락하고 있을 때다. 만일 플라톤이 권력을 잡아 철인정치가 실현되었다면? 아테네는 다시 발전할 수 있었겠나?

그랬을 거 같지 않다. 아무리 똑똑한 철학자인 철인도, 돈많은 부자도, 돈 잘버는 사장도, 인간성 좋은 군자도, 지식이 많은 학자도, 말 잘하는 웅변가도 하기 어려운 게 정치다. 정치는 요물이다. 플라톤이 정치를 했다면 절대적 이데아 철학으로 무장된 그의 고집으로 더 큰 분란을 초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 그렇게나 어려운 정치를 잘 하는 정치인은? 르완다 대통령 카가메를 꼽아도 될까? 반대파를 탄압하기에 욕도 먹지만 카가메는 100만명이 학살당한 투치족-후투족 간 악랄한 내전 후 혼란을 끝냈다. 놀라운 업적이다. 그 험한 아프리카에서 가장 여행하기 안전하며 쓰레기 없는 깨끗한 르완다로 만들었다. 그가 밝은(哲) 철학자인 철인이라면? 철인정치를 말한 플라톤의 말이 맞겠다. 올해 4선에 도전하는 카가메의 온전한 독재가 이어지려나?

딱 내 말이야. 카가메는 2024년에 4선에도 당선되었어. 대단해! 나도 다시 산다면 카가메와 같은 훌륭한 대통령이 되고 싶은데.

근데 왜 이렇게 밖이 소란스러워. 잠깐 스톱, 좀 알아봐봐!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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