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래 시인이 읽어주는 좋은 시(72) 단 한 사람의 숨은 독자를 위하여 - 노향림
조승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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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9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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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의 숨은 독자를 위하여
노 향 림
함박 눈발이 아파트 창에 부딪히는 날/ 혼자 넋 놓고 창밖을 바라보는데/ 6동 반장이 벨을 누른다/ 긴급 안건으로 모두 모이는 반상회란다./ 처음으로 참석해 출석 싸인을 하는데/ 이를 본 한 여성이 어마 시인이시네요,/젊은 날 쓰신 시집 애독자였어요/ 옆자리 중년 여성도 한마디 한다./ 요즘 시는 시인들끼리만 본다던데요,/ 아직도 시 읽는 독자가 있어요?/ 그럼요, 단 한 사람의 독자가 있을 때까지/ 시인은 시를 쓰지요, 말해놓고 나는/ 눈 오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단 한 사람의 독자는 바로 그 시를 쓴/ 시인 자신인걸요./ 목젖까지 차오르는 이 말 뒤로/ 한결 더 소리 낮춰 절규하듯 내리는 함박눈/ 나는 회의 시작 전에 슬그머니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차선도 보도블록도 경계가 지워진 설국雪國/ 하늘과 땅 사이가 넓은 백지의 대설원이다./
그 백지의 시 몇 줄에 필생을 건 나는/ 언제나 긴급 안건은 그것뿐이라고/나는 내 시의 독자다, 혼자 소리친다/ 공중에서/ 놀란 눈발들이 한꺼번에 부서져내린다./출입금지 팻말을 단 아파트 화단 목책 너머/ 눈 뒤집어쓴 키 큰 나무들의 적막한 발등에/ 나는 그만 시 한 줄 꾹꾹 눌러 찍고 돌아 나온다.
- 시집 푸른 편지, 2019년
시 해설
시인이 눈 내리는 창밖을 보고 있는데 아파트 6동 반장이 반상회에 참석하라고 벨을 누른다. 긴급 안건이 있다는 것이며 시인은 반상회에 처음 참석하여 출석표에 이름을 쓰니까 곁에서 보던 젊은 여성이 ‘노향림’ 시인의 이름을 보고는 팬이라고 반가워했다.
옆자리 중년 여성이 아직도 시 읽는 독자가 있냐고, 요즘 시는 시인들끼리만 본다던데 라고 했다. 정작 그 여성은 시 한 줄 읽어낼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의 비아냥 소리에 ‘그럼요, 단 한 사람의 독자가 있을 때까지 시인은 시를 쓰지요’라는 말을 하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단 한 사람의 독자는 바로 그 시를 쓴 시인 자신인걸요’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 그 시를 읽는 최초의 사람은 시인 본인이며 그 자신을 위해 쓴 시를 다른 독자들이 읽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그런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싫어서 시인은 그 자리를 슬그머니 떠났다.
시를 쓰는 사람과 시를 읽는 사람의 구분을 없애듯이 ‘차선도 보도블록도 경계가 지워진’, ‘백지의 대설원’ 이 보였다. 거기서 시인의 긴급 현안을 찾아낸다. ‘그 백지의 시 몇 줄에 필생을 건’ 시인은 시의 독자인 자신을 발견하고 ‘혼자 소리친’ 것이다. ‘출입금지 팻말’도 읽을 줄 모르며 시를 안 읽는 미래의 독자는 주위에 많다. 갑자기 ‘눈 뒤집어쓴’ 듯한 시인은 ‘그만 시 한 줄 꾹꾹’ 세상에다 이렇게 남겨 주셨다. 시를 읽는 시인도 있다.
◇ 조승래 시인은
한국타이어 상무이사, 단국대학교 상경대학 겸임교수(경영학박사)를 했고,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이사, 문학의 집 서울 이사, 계간문예작가회 부회장, (구)포에지창원 '시향문학회' 회장, 가락문학회, 시와시학회, 함안문인회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취미생활로는 검도를 하고 있다(4단. 대한검도회 영무검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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