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본특집>
독재자 윤석열 그리고 비겁한 공범들 : 누가 민주주의의 적인가?
송현주 (한림대학교 미디어스쿨 교수)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발령으로 시작된 내란 사태가 2025년 4월 4일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파면 선고로 일단락됐다. 민주주의 승리와 헌정질서 회복을 위한 투쟁과 기다림, 그리고 우여곡절의 시간은 무척이나 고통스럽고 길었다. 한편으로는 그 짧은 시간에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곳곳에 남아있던 권위주의 체제의 잔재들과 새롭게 등장한 파시즘의 정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했다. 따라서 윤석열의 파면과 법적 처벌과는 별개로 이번 내란 사태는 향후 다방면에서 다층적으로 서술,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
독재자 윤석열과 국민의힘의 수구 회귀
일단 그런 구조적 서술과 분석에 앞서 윤석열 개인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굳이 윤석열이 예외라서 그런 건 아니다. 팬덤 정치라는 말을 쓰지 않더라도 지금은 정당 같은 조직보다 지도자급 정치인들의 역량과 이미지가 전체 정치세력의 성패를 좌우하는 개인 정치의 시대다. 따라서 일인 독재의 권위주의 체제는 말할 것도 없고 민주주의 국가라 하더라도 대통령제를 채택하는 나라라면 정치인을 개인적 차원에서 분석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 윤석열을 중심에 놓고 지난 5년 정도의 시간을 살펴보면 1) 잠재적 독재자 윤석열이 보수 언론을 등에 업고 손쉽게 대통령 권력을 쥐게 되고 2) 사회 곳곳에 자리 잡고 있던 극단 세력과 결탁해 거침없이 독재자의 길을 걷다가 3) 그 본질을 간파한 주권자들의 심판을 받아 총선에서 참패한 후 4) 의회의 강화된 민주적 견제를 참지 못하고 결국 친위 쿠데타, 내란을 일으켰다가 파면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으며,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 권력의 속성과 관련해 가장 자주 인용되는 19세기 영국의 역사가 액턴 경(Lord Acton)의 명제다. 수많은 연구가 그의 통찰력을 증명해 왔고, 윤석열에 관한 우리의 경험 또한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왜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패하는가? 여기에 대해 영국의 정치학자 브라이언 클라스(Brian Klaas)는 저서 <권력의 심리학>에서 흥미로운 답을 내놓은 바 있다. 그가 악명 높았던 독재자들을 관찰하고 분석한 바에 따르면 권력은 애초에 부패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 잠재적 독재자들을 정치로 유인한다. 클라스가 말하는 그들의 특징은 마키아벨리즘, 나르시시즘, 사이코패스 성향이라는 ‘어둠의 3요소(dark triad)’다. 마키아벨리즘은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한다. 나르시시즘은 오만하고 자아도취에 빠져있으며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과도해 자신의 업적을 과장한다. 사이코패스는 공감 능력이 없고 조작에 능수능란하며 공격성이 강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어둠의 요소들을 조금씩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 곳곳에서 잠재적 독재자들을 마주치곤 한다. 문제는 정도의 차이인데, 세 요소가 극단적으로 응축돼 있는 사람은 작은 권력으로도 여러 사람을 해칠 수 있다. 따라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큰 권력은 그런 사람에게 절대 넘어가서는 안 되겠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더 큰 권력일수록 더 많은 잠재적 독재자들을 유혹하고, 그들은 권력을 쥐게 되면 실제로 독재자가 된다. 그래서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걸러낼 것인가는 민주주의 정치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물론 쉽지는 않다. 마키아벨리즘과 나르시시즘은 비교적 눈에 잘 보인다. 그 자체로도 지극히 위험한 요소는 아니다. 공동체의 번영이라는 대의를 위해서라면 비도덕적 선택도 불사해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나름 설득력이 있고 실제 위대한 현실 정치인들은 대체로 그러했다. 나르시시즘은 그냥 권력 놀음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문제는 사이코패스 성향이다. 정치 지도자가 공감 능력이 없고 눈에 거슬리는 건 모두 짓밟으려 한다면 공동체에 가장 큰 위험이 된다. 더군다나 사이코패스는 속임수에 능수능란하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가 되기 전에는 그 성향을 잘 숨긴다. 그런데 검찰총장 시절부터 탄핵 심판 과정에 이르기까지 윤석열의 언행은 너무나 투명하고 일관됐다. 그의 잠재적 독재자 기질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하게 응축돼 있었고, 스스로 그걸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왜 그에게 대통령 권력을 안겨준 것인가? 여기에 이르면 윤석열 개인이 아니라 우리나라 정치의 문제가 된다.
수권 능력이 있는 정당의 구성원, 유력 국회의원부터 당원까지 공직 후보자를 선출할 때 중요하게 고려하는 요인 중 하나는 당선 가능성이다. 후보들의 능력이나 자질이 정당이 지향하는 가치에 얼마나 부합하는가도 중요하지만 당선 가능성이라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선거 경쟁에서 발생하는 온갖 합종연횡과 정책 노선 변경을 비난만 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러나 유력 대선 후보가 윤석열처럼 잠재적 독재자일 때는 경우가 다르다. 윤석열의 독재자 기질은 멀리서 보고 듣는 사람들에게도 명백했는데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국민의힘은 과연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미국 하버드대의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Steven Levitsky)는 2023년 9월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민주주의의 암살자들은 권력의 전당에 있는 평범한 정치인들을 공범으로 거느린다고 일갈했다. 트럼프 같은 선동가, 극단적 추종자들만으로는 민주주의가 무너지지 않으며 그 붕괴에 필수적인 건 권력에 눈이 멀어 잠재적 독재자를 묵인하고 추종하는 비겁한 정치인들이라는 것이다. 국민의힘과 그 전신이었던 정당들의 정치인들에게도 민주주의는 뒷전이었다. 비상계엄 내란까지는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윤석열이 결코 민주국가의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인물이라는 점을 진즉에 알았지만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애써 무시해 버린 것이다. 극렬 지지자들은 그의 독재자 기질에 오히려 환호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국민의힘은 민주주의 헌정질서를 언제라도 부정할 수 있는 정당임이 내란 사태 이후 더욱 명백해졌다. 1987년 민주화 이후 38년이 지났고 평화적 정권 교체를 거듭하며 민주주의가 안착됐다고 생각했으나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자칭 보수 정당과 수구세력, 그 지지자들은 민주화 이전 시대로 회귀하고 있었던 것이다.
짖지 않는 감시견
잠재적 독재자를 걸러내는 것은 정당의 기능만은 아니다. 언론은 사회의 위험을 미리 감지하고 경고하는 감시견(watchdog)이다. 국민의힘뿐만 아니라 윤석열을 취재해 온 언론도 그의 독재자 기질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력했던 대통령 후보를 잠재적 독재자로 판단하고 배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고 이해해 줄 수 있다. 언론의 감시 역할은 당선 이후, 즉 잠재적 독재자가 권력을 거머쥔 후 현실의 독재자로 변해가는 것을 막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우리나라 언론, 특히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 언론은 최소한 계엄 내란 이전까지는 권력 감시를 통해 윤석열의 독재를 막아서는 게 아니라 재촉했다고 볼 수 있다. 윤석열이 대통령으로서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에 공감하지 않을 때 최소한의 도의적 책임도 묻지 않았다. 헌법과 법률을 무시하고 감사원, 검찰 등 권력 감시 체계를 무력화할 때 언론은 이를 무시하거나 축소했다.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묵인한 것이다. 사소한 일들은 다 젖혀두고 채 해병 사건을 봐도 그렇고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을 봐도 그렇다. 보도를 하더라도 독재자의 길을 가는 윤석열에 대한 야당과 시민사회의 비판과 저항은 정쟁의 틀로만 해석하고 굳이 원인을 따지자면 거대 야당의 독단과 독선 때문이라는 비판에 더 힘을 실었다. 공정성과 객관성을 명분으로 내세운 교묘한 양비론은 보수 언론이 민주적 정당성이 취약한 보수 정치세력을 싸고도는 오래된 방식이다. 물론 이념과 정책의 차이에 따른 대립은 양비론, 양시론이 가능하고 때로는 언론 스스로의 이념적 관점에 따라 일방적인 비판도 가능하다. 그러나 윤석열은 이념을 떠나 헌법과 법률을 무시해 왔다.
좀 더 구체적인 사례로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 임명 거부를 들 수 있다. 5인으로 구성되는 방송통신위원회는 대통령과 여당이 3인을, 야당이 2인을 추천하게 돼 있다. 방송과 통신을 관장하는 부서이기에 장관 독임제가 아니라 위원회라는 합의 기구를 구성하게 만든 것이다. 임기 초부터 공영방송 장악을 서두르던 윤석열은 3대 2의 구도도 불편했는지 야당 추천 상임위원을 이런저런 핑계로 임명하지 않았다. 그 사이 2명의 상임위원의 임기가 끝났고, 결국 자신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는 위원장과 부위원장 2인 체제로 합의 기구인 방통위를 운영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는 스티브 레비츠키가 자신의 연작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와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에서 민주주의가 내부로부터 붕괴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공통적으로 지적했던, 권력자가 헌법과 법률의 허점을 이용해 민주적 절차를 무력화하는 방식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레비츠키는 상원 공화당이 오바마 대통령이 요청한 연방대법관 인준 청문회를 거부한 사례를 들고 있다. 미국 헌법에는 의회가 인준 청문회 개최를 거부할 경우에 대비한 조치가 규정돼 있지 않다. 결국 오바마 대통령은 연방대법관을 임명하지 못했고 그 권한은 후임인 트럼프 대통령이 행사했다. 윤석열이 또한 이런 방식으로 헌법과 법률을 무시했고 이에 대응해 야당이 방송통신위원장을 연이어 탄핵하자 보수 언론은 관련 사안을 대립과 갈등이라는 양비론으로 보도하거나 야당이 탄핵에 중독됐다고 규정했었다. 헌법과 법률 위반 행위와 그에 대한 야당의 비판을 동등한 차원에서 싸잡아 비판하거나 오히려 야당을 비난했던 것이다. 윤석열이 독재자가 되는 과정에서 언론은 비겁한 공범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 파괴라는 심각한 혐의를 떠나, 우리나라 보수 언론이 민주주의 사회의 언론 실천 규범을 위반해 온 것은 분명하다. 미국의 언론학자 다니엘 핼린(Daniel Hallin)에 따르면 사회의 담론 영역(Spheres of Discourse)은 세 가지로 구성되고 각 영역별로 언론의 실천 규범도 달라진다. 먼저 합의의 영역(Sphere of Consensus)은 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의견과 관점이 포함되는 영역이다. 정상적인 언론이라면 이 영역에 속한 사안은 보호하고 방어해야지 논쟁의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민주적 헌정질서의 기본 정신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정당한 논쟁의 영역(Sphere of Legitimate Controversy)은 상반된 의견이 공존하고 대립하는 영역으로, 언론은 사안을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보도해야 한다. 대부분의 정치적, 사회적 논쟁이 주로 이 영역에서 발생한다. 마지막으로 일탈의 영역(Sphere of Deviance)에는 사회적으로 진지하게 다룰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는 아이디어와 관점, 예를 들어 극단적이거나 급진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음모론이나 반사회적 이념이 포함된다. 언론은 관련 사안을 무시하거나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윤석열이 방송통신위원을 임명해야 하는 의무, 해병대 수사단이 채 해병 사건을 경찰에 이첩해야 하는 의무, 수사기관이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혐의를 받는 대통령 부인을 조사해야 하는 의무 등등은 민주공화국의 기본 정신을 바탕으로 한 법 규범으로서 합의의 영역에 속하는 사안이다. 언론은 그 이행을 방해하거나 거부하는 행위를 단호히 비판해야 한다. 반면 종북 세력이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거나 부정선거가 자행됐다는 주장은 일탈의 영역에 해당한다. 언론은 이런 주장을 무시하거나 비판적으로 보도해야 한다. 보수 진영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합의와 일탈의 영역에 속한 사안들을 양비론과 의견 충돌, 의견 대립의 틀에 맞춰 끊임없이 정당한 논쟁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보수 언론은 오른쪽을 보고는 짖지 못하는 감시견에 불과했다.
사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 언론의 행태는 새로울 게 없다. 민주화 이후 독재정권의 족쇄에서 풀려난 이후 보수 언론은 권력의 나팔수에서 권력에 대한 감시견으로 변신한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보수 진영의 당당한 권력 구성원이 됐다. 2000년대 이후 자주 언급됐던, 이른바 ‘언론의 권력화’ 명제는 보수 언론의 사회적 영향력이 증대됐다는 걸 넘어 보수 언론이 지배 권력의 일부로 편입됐다는 걸 의미했다. 언론사 사주는 대통령이나 유력 정치인의 후원자 역할을 했고 많은 언론인들이 공직에 진출했다. 그 비중이 보수 언론에 치우쳤을 뿐만 아니라 보수 언론은 그 역할을 당당하고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와 이명박 정부 때 전성기를 구가했던 보수 언론 권력은 윤석열에게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윤석열 정부, 나아가 보수 진영의 위기를 감지한 보수 언론은 최선을 다해 방어하고 조언했으나 나르시시스트 윤석열은 양비론도 수용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보수 언론의 사설과 칼럼에 대통령이 신문을 보지 않는다는 볼멘소리가 나올 정도로 윤석열은 보수 언론을 외면했다. 그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지난 2년간 조선일보의 구독자 수와 TV조선의 시청률은 유의미하게 감소했다. 30년간 이어져 온 보수 정치권력과 언론의 카르텔이 드디어 붕괴하기 시작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 공백은 무엇으로 채워졌을까?
윤석열과 유튜브, 극단의 결탁
대통령 취임식에 유튜버들이 초청됐다는 사실이 확인됐을 때, 용산 대통령실에 유튜버 출신 행정관들이 근무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을 때, 윤석열이 유튜브만 본다는 믿기지 않는 풍문이 돌았을 때도 반신반의했다. 최근 언론 보도는 윤석열이 유튜브의 허위 조작 정보를 보고 안보실과 국방부에 실태 파악을 지시한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보수 언론을 외면했던 윤석열은 바닥을 치는 지지율에 대한 단순히 위안이나 위로뿐만 아니라 국정을 위한 정보나 조언까지도 유튜브에서 얻었던 모양이다. 유튜브라고 다 같은 유튜브가 아니다. 유익한 유튜브 콘텐츠도 많고 좋은 저널리즘을 실천하는 유튜브 채널도 있다. 보수로 치우친 주류 언론에 대한 대안으로서 유튜브의 저널리즘 콘텐츠는 이미 자리를 잡았다. 윤석열이 즐겨본다는 유튜브 채널들이 허위 조작 정보와 극단적 주장들의 온상이라는 게 문제다. 어느 사회나 극단은 주류 언론으로부터 무시되거나 비판됨으로써 공적 담론의 영역에서 배제된다. 핼린이 말하는 일탈의 영역은 실재하기는 하지만 사회적으로 무시되고 배제되는 담론 영역이다. 따라서 일탈적 담론은 주변부 비주류 매체를 통해서 유지 확산되는데, 우리 사회의 파시즘 또한 마찬가지다. 보수 언론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종교의 탈을 쓴 시대착오적 색깔론, 황당한 부정선거 음모론, 성소수자와 여성에 대한 혐오 등은 유튜브를 매개로 급속히 확산 되어 왔다. 이들 극단 세력이 공식적인 정치 영역과 주류 언론의 봉쇄를 넘어 무시 못 할 정도로 성장했고, 그들을 호명해 준 사람이 대통령 윤석열이었다. 정치적 지지와 정치적 인정에 대한 양 측의 절실함이 만나 서로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과정에서 극단 세력은 윤석열 정권의 핵심부에 깊숙이 침투했다. 윤석열, 그리고 현재의 대다수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극단 세력의 정치적 지지와 대중 동원력을 이용하면서 동시에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파시즘과의 위험한 거래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트럼프의 당선과 미국 공화당의 극우화는 그 생생한 사례다.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공화당과 극우의 결탁은 온건파 공화당 정치인들의 몰락으로 귀결됐다. 당내 경선을 통해 온건파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그 빈자리는 극우 강경파로 채워나갔다. 계엄 선포문과 탄핵 심판 과정, 극단 세력의 집회에서 보듯 유튜브에서 만들어지고 퍼져나간 파시즘의 사고와 언어가 이미 윤석열과 국민의힘 정치인들을 지배하고 있다.
여러 조사 결과들을 종합해 보면 파시즘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2030대 남성과 노년층을 주축으로 해서 성인 인구의 10퍼센트 내외 정도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 정도만 해도 400만 명 이상이다. 극단 세력의 유튜브 채널들의 구독자 수도 100만 명을 넘어서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제 윤석열이 파면됐고 대선 국면이 시작됐으니 극단 세력의 준동도 점차 잦아드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파시즘의 온상인 유튜브와 그 주동자, 수백만의 동조자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전국 단위의 선거는 2, 3년마다 계속 돌아온다. 극단 세력과 이미 결탁해 본 국민의힘 정치인들이 그들의 유혹 혹은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윤석열에 의해 봉인 해제되고 양지로 나온 극단 세력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보수 진영, 더 나아가 우리나라 민주주의 정치에 해악을 끼칠 것이다.
전투적 민주주의, 그리고 더 많은 민주주의
이번 계엄 내란 사태를 통해서 파시즘 세력의 실체가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가당찮게도 엘리트나 사회지도층으로 불리던 위장 민주주의자들의 실체 또한 드러났다. 비상계엄 내란 이후 윤석열이 파면되기까지 우리는 파시즘 세력과 그 동조자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며 온갖 폭력과 정치적, 법적 잔재주를 동원해 민주주의를 형해화하는 역설을 지켜봤다. 새로운 민주 정부가 들어선다면 내란 관련자들을 엄중 처벌하고 독재의 길을 터 준 권력기관들을 개혁할 것이다. 이는 비교적 어렵지 않은 일이다. 히틀러와 나치가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에 따라 바이마르공화국을 붕괴시켰던 역사에서 얻은 교훈처럼 민주주의의 적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정치적 자유나 권리를 일정 정도 제한할 필요가 있고, 우리 헌법에도 그런 ‘전투적 민주주의’(독일어: wehrhafte Demokrati)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단지 그 헌법의 장치들이 이른바 보수에게는 적용되지 않아 왔을 뿐이다. 여기에 더해 권력에 눈이 먼 독재자가 파시즘 세력과 결탁해서 민주주의를 작정하고 파괴할 때 헌법과 법률이 얼마나 취약한지도 새삼 깨닫게 됐다. 헌법과 법률을 엄격히 적용하고 그 미비는 보완하는 일 또한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는 제2, 제3의 윤석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극단 세력과 그들이 유포하는 허위 정보와 혐오를 어떻게 공적 담론 영역에서 몰아내고 소멸시킬 것인가이다. 안타깝게도 유럽 극우의 봉인이 해제된 것에서 보듯 전투적 민주주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극우의 토양이 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격차를 줄이지 못하는 한 극단 세력의 고립과 봉쇄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21세기 그 어떤 국가도 해결하지 못한 난제를 풀 수 있을까?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시대에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자신감을 갖고 경제적 민주주의를 포함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제도화함으로써 민주공화국의 토대를 더 굳건히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송현주 (한림대학교 미디어스쿨 교수)>